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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王 '히로히토=평화주의자'? 쇼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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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王 '히로히토=평화주의자'? 쇼는 끝났다!

[프레시안 books] 허버트 빅스의 <히로히토 평전>

히로히토가 죽음을 맞이하던 1989년 1월 7일 나는 도쿄에 있었다. 병석에 누운 다음부터 긴급 뉴스로 시시각각 전해지는 "하혈 ○○cc, 체온 ○○도" 같은 병상 소식을 밥상머리에서 들으면서 느꼈던 위화감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상가는 철시하고 모든 행사가 취소되는 등, 일본 전체가 이른바 '자숙(自肅)' 무드에 휩싸였다.

그리고 언론들은 히로히토가 얼마나 평화주의자였는가를 앞 다투어 보도하였다. 히로히토의 죽음 후, 당시 수상이었던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는 히로히토가 "언제나 평화주의자였고 입헌군주였다"는 애도사를 발표하였다. 히로히토의 죽음에 대한 '애도' 이외에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 이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언론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광풍'이었다.

히로히토가 병석에 누워있던 1988년 12월 7일, 나가사키 시장 모토시마 히토시(本島等)가 시의회에서 "나의 군대 생활의 경험에서 볼 때,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한 것은 예외 중의 예외였다. '광풍'에 숨죽이고 있었던 히로히토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 모토시마의 용기 있는 발언에 소리 없는 성원을 보내겠지만, 이 용기 있는 발언이 자숙과 추모 일변도의 전체주의적 분위기를 바꾸지는 못했다.

모토시마는 자민당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정치가였다. 하지만 모토시마의 용기 있는 발언과 이 발언을 성원하던 사람들의 '소리 없는 소리'도 그로부터 1년 후에 우익단체가 모토시마 시장에게 가한 총격 테러로 더욱 어둠으로 사라졌다. 모토시마 시장은 중상을 입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렇게 해서 '히로히토=평화주의자'라는 등식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굳어졌다.

히로히토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본 사회에 벌어진 소동 아닌 소동을 보면, 마치 잘 짜인 한 편의 연극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를 평화주의자로 '각색'하기 위해 1945년부터 시작된 거대한 프로젝트가 드디어 1989년 그의 죽음으로 '완성'을 맞이한 것이다.

히로히토는 1901년에 태어나서 1926년에 천황이 되어 1989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무려 63년 동안 일본의 최고 자리에 군림했던 인물이다. 20살이 되던 1921년에 병석에 누워있던 자신의 아버지를 대신해 섭정관의 자리에 올랐으니 실제로 최고 권력 기관의 수장으로 군림한 것은 근 70년에 이른다.

히로히토의 인생 전반기는 침략 전쟁으로 점철되던 '야만'의 시대였고 1945년 패전 이후인 인생의 후반기는 '상징'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야만의 시대에 점철되었던 수없는 침략 전쟁에 대해서는 일부 몰지각한 군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놀아난 힘없는 '꼭두각시 군주'라는 이유를 들어 전쟁 책임에서 벗어났고, 인생의 후반기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상징 천황제로서 살아남았다. 인생의 후반기는 미국의 일본 연구자 존 다워가 말한 '천황제 민주주의'로 살아남은 것이다.

이 말썽 많은 인물을 '꼭두각시'로, 혹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상징적 군주로 살아남게 만든 것은 물론 미국과 일본의 '긴밀한 합작'의 결과였다. 도요시타 나라히코에 따르면, 히로히토의 권위와 권력을 이용하고자 했던 미국과 그런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자신의 자리는 물론, 천황제를 유지하려 했던 히로히토 간의 전략적 거래의 산물이 '꼭두각시'와 '평화주의자'로서의 히로히토였던 것이다.

히로히토가 전쟁 행위에 대해서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으리라는 것은 당시의 정황 증거로 볼 때도 상상하기 힘든 일도 아니다. 또 대일본제국헌법 하에서 모든 권력을 지닌 그가 침략 전쟁에 대해 그 어떤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은 형식 논리로 보면 매우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로히토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온화한 천황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 <히로히토 평전>(허버트 빅스 지음, 오현숙 옮김, 삼인 펴냄). ⓒ삼인
이 불편한 허구에 정면으로 도전한 책이 바로 허버트 빅스의 <히로히토 평전 : 근대 일본의 형성>(오현숙 옮김, 삼인 펴냄)이다. 2000년에 으로 출간되어 퓰리처상을 받았고, 2002년에는 <쇼와덴노(昭和天皇)>(講談社 펴냄)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번역·출간되었으니, 한국 출판은 원저 출판에서 10년이 지난 셈이다.

무려 940쪽이 넘는 방대한 이 책은 이른바 온화하고 평화적이며 비정치적인 히로히토에 대한 일본 사회의 공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상을 실증적으로 제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이 책을 가리켜 "역사의 폭탄"이라고 평한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히로히토가 어떻게 호전적이고 팽창주의적인 능동적 군주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는가를 밝히는데 매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책은 매우 뛰어난 히로히토 평전이다. 또 히로히토의 개인사가 이 책의 한글판 부제에 붙어 있는 것처럼 근대 일본의 형성에 어떻게 관계되고 있는가를 밝혀내고 있다는 점에서 뛰어난 일본 근·현대사 연구라 할 수 있다. 히로히토라는 개인과 근대 일본의 형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 시점은 히로히토를 정치적 주체로 간주한다는 것을 뜻한다.

히로히토라는 천황을 정치적 주체로 설정하는 시점은 물론 허버트 빅스의 연구가 효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주로 '천황 기관설'에 입각한 기존의 학설에서 보면 이색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천황 기관설은 대일본제국헌법 하에서 통치권은 국가라는 법인에 있으며 천황은 국가라는 법인의 최고 기관으로서 통치한다는 국가법인설에 입각한 학설이다.

따라서 천황은 헌법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상의 한 기관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근대 천황제는 절대군주제가 아니라 입헌군주제라는 주장이다. 대체로 1930년대 중반까지 미노베 다쓰기치(美濃部達吉)가 채용했던 학설이다. 1930년대 중반 미노베는 천황 기관설을 주창한 책임을 지고 귀족원에서 물러났고 우익 테러로 중상을 입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빅스는 실증적인 논거를 제시하면서 히로히토 자신이 헌법의 제약을 받는 입헌군주제라는 자각을 가진 적이 없으며, 항상 자신을 헌법 위에 군림하는 절대군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매우 정교하게 전개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 하에 히로히토가 정치적 주체로서 그의 재임 기간 중에 일어났던 수 없이 많은 침략 행위에 정책 입안자로서 최고 결정권자로 관여했음을 밝힌다. 따라서 입헌군주제 설에 입각한 '평화주의자=히로히토'라는 불편한 허구로 가득 찬 항간의 이미지는 이 책으로 완전히 붕괴된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는 빅스의 주장이 미국에서 출판되었던 2000년에는 매우 신선한 새로운 실증 분석이었지만, 그 후 일본에서 진행된 새로운 자료 발굴과 실증 연구 수준에서 보면 2010년 단계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의의는 '평화주의자=히로히토'라는 항간의 이미지를 붕괴시키는 대중적인 실증서의 효시로 자리매김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이 책의 분석이 주로 1945년 이전의 히로히토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평화주의자=히로히토'라는 기존의 이미지를 실증적으로 붕괴시키는데 히로히토의 전전의 행적이 결정적이라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쟁 책임자로서 살아남기 위해 동원된 '평화주의자=히로히토=입헌군주=꼭두각시'라는 등식이 전후에 만들어지는 과정과 전후의 냉전 체제 하에서 천황제가 이른바 친미 반공의 보루로서 살아남는 과정이 연동되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전후 냉전 체제 하에서의 히로히토의 행적 또한 매우 중요하다. 빅스는 제4장에서 히로히토의 전후사를 담고 있는데, 책 전체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그 비중이 낮다. 이런 점에서 히로히토의 전후 행적을 다룬 도요시타 나라히코의 <맥아더와 히로히토>(권혁태 옮김, 개마고원 펴냄)와 같이 읽을 것을 권한다.

빅스에 견해에 대한 비판은 물론 일본에 아주 많다. 이 책이 일으킨 반향도 적지 않았다. 대체로 위에서 말한 입헌군주설에 입각한 반론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서구 학자 중에 빅스를 비판하는 독일 출신의 피터 웨츨러(Peter Wetzler)는 "천황이 카이저처럼 명령하면서", "전전의 천황이 언제나 어둠 속에 숨어 인형을 조정하는 것처럼 군부를 움직였다는 '전쟁하는 대원수'이며, 전후의 평화주의자의 이미지는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빅스의) 설에는 찬성할 수 없다"면서 히로히토는 언제나 "황통(皇統)의 지속"이라는 점에서 일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産経新聞>, 2002년 12월 1일).

인상적인 것은 빅스와 대립되는 입장을 지닌 피터 웨츨러의 책이 빅스에 대적하듯이 빅스 책이 출판된 2002년 같은 해에 일본에서 <쇼와천황과 전쟁(Hirohito and War: Imperial Tradition and Military Decision Making in Prewar Japan)>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매우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히로히토는 죽어서도 여전히 논쟁적이다.

하지만 빅스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히로히토를 개인으로 정치적 주체로 설정함으로써 메이지 유신 이후에 개시된 근대 천황제의 역사가 히로히토라는 개인의 문제로 환원되어 천황제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점이 약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의식해서인지, 빅스는 마지막에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 현상을 언급하면서 천황제가 "민주주의의 심화와 인민의 주권의식 성장을 가로막는 방향으로" 이용당할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아울러서 일본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 이 귀중하면서도 방대한 책을 번역한 역자(오현숙)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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