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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이 금한 최초의 소설은? 그 작가는?

[근대 의료의 풍경·69] 日 유학생 안국선

"1895년 도일(渡日) 유학생" 가운데 21명이 과학기술, 공학, 농학, 의학 등 이른바 "이과(理科)" 계열의 고등 교육 기관에서 2, 3년씩 공부하고 졸업했다는 것은 당시로는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기존 체제를 위협할 위험성이 적다고 여겨진 분야를 주변에서 권유하고 스스로도 택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면 정치, 경제, 재정, 법률 등 "문과(文科)" 분야는 어땠을까? (한국에서는 아직도 고등학교부터 학급 편성과 학과목이 "문과", "이과"로 분리되어 있어 학문 영역 간의 소통과 융합에 어려움이 적지 않은데, 이는 시급히 청산해야 할 일제 잔재 중 하나이다. 특히 인문학적, 인간학적 측면이 중시되어야 할 의학을 이과로 편제한 것은 매우 큰 문제이다.)

개항 이래 일부 급진 개화파와 그 대척점의 위정척사파를 제외하고는, 국왕을 비롯하여 조선(한국) 지배층의 기본적인 국정 노선은 동도서기(東道西器) 또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이었다. 즉 사상, 철학, 이념은 전통적인 성리학을 고수하면서, 그 바탕 위에 서양의 기술을 흡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노선이 올바르고 성공적이었는지도 논의의 대상이거니와, 더욱 근본적으로 도(道)와 기(器)가 분리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재고해 볼 여지가 있다.

오늘날에도 도(사상, 철학, 이념)와 기(과학기술, 실무 분야)가 분리 가능하며 둘 사이에 상하 위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적지 않다. 하지만 철학, 사상과 분리되는 과학기술과 실무 분야라는 것이 있을까? 근대 과학기술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등 근대 철학의 바탕 위에서 발전해 왔으며, 또 거꾸로 그 자신 근대 철학, 나아가 근대 세계의 형성에 크게 기여해 왔다. 의술과 (의)철학, 법률과 (법)사상 사이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의학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곤혹스러운 경우는, "동양 의학"은 철학적이고 "서양 의학"은 과학적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을 때이다.)

합리주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등 근대적 정신은 불온시하여 철저히 배제한 채 "부국강병"과 생산력 증대에 도움이 된다고 여긴 과학기술, 의술, 법률 조항과 재정 운영 기법 등만을 수용하겠다는 국정 노선은 애초부터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이것이 대한제국기의 이른바 "광무개혁"이 근대적인 겉모습을 띄었지만 실제 개혁은 이루지 못한 채 결국 망국으로 이어진 근본적인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 재정, 법률 등을 공부한 사람들이 관리로 등용된 경우는 과학기술과 공업 분야를 학습한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고 등용 시기도 더 뒤졌다. 예컨대 이인식(李寅植)과 정인소(鄭寅昭)가 도쿄전문학교(東京專門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했을 때, 학부에서 내부, 외부, 법부, 탁지부에 공문을 보내 이들의 발탁을 요청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관리로 임용되더라도 그들이 학습한 학문의 정신이나 이념이 아니라 실무 역량만을 취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문과" 출신자들은 사립학교 등 민간 부문에서 활동한 경우가 더 두드러졌다.

유학생 중 일부는 이미 다음과 같이 민권 사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국왕과 지배층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이었고, 그러한 불온사상을 품고 있다고 여겨진 유학생들은 등용되기는커녕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나라란 무엇을 이름인가. 만인의 공중(公衆)을 이름이라. 나라는 1인의 소유인가. 만인의 소유이다. 그런즉 만인이 공정한 의무를 각자 애호하여 국세를 공고히 하고 민권을 확장하여 자주독립을 확고히 세움이 국민의 공정한 의무로다. (유창희, '국민의 의무', <친목회 회보> 제3호, 1896년)

▲ <황성신문> 1899년 12월 13일자. 학부에서 내부, 외부, 법부, 탁지부에 일본 유학에서 5년 만에 돌아온 이인식과 정인소를 등용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기사이다. ⓒ프레시안

도쿄전문학교(나중에 와세다(早稻田) 대학교로 개편)에서 정치학, 외교학,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으로는 이인식, 정인소, 김용제(金鎔濟), 권봉수(權鳳洙), 어용선(魚瑢善), 김기장(金基璋), 그리고 신해영(申海永)과 안명선(安明善)이 있었다.

당시 이들이 도쿄전문학교에서 공부한 과목은 논리학, 근세사, 국가학, 행정학, 국제공법, 근세외교사, 일본헌법, 각국 헌법, 헌법사, 법학통론, 민법대의, 상법대의, 경제원론, 경제학사, 화폐론, 재정론, 외국무역론, 예산론, 은행론, 공채론, 응용경제학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이인식은 1906년 11월 한국인들이 경영하던 한일은행(韓一銀行) 지배인에서 물러나(정확히 언제부터 근무했는지 알 수 없지만 한일은행이 설립된 것은 1906년 5월이었다) 광신(廣信)상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김용제(1868년생)는 광흥학교(光興學校) 등 사립학교 교사를 지낸 뒤 1901년 관리로 임용되어 궁내부 비서과장, 제도국 이사 등을 지냈다. 김용제가 광흥학교에 재직했을 당시의 동료 교사는 권봉수, 어용선, 신해영, 남순희 등 도일 유학생 동기들이 대부분이었다.

권봉수(1870년생)는 1902년 궁내부 주사로 시작하여 내부 서기관, 주일 공사관 참서관, 경무국장, 내장원 부경(副卿), 충청북도 관찰사(1908년) 등 유학생 출신으로는 최고위급에 이르렀다.

어용선(1869년생)은 사립학교인 광흥학교 교감, 화동학교(華東學校)와 장단보창학교(長湍普昌學校) 교장, 그리고 관립 한성일어학교 교관 등 주로 교육계에서 활동했으며, 뒤에 학부 시학관(視學官)과 내각 서기관 등 관직도 지냈다.

김기장은 1904년부터 시종원(侍從院) 시종, 주일 공사관 참서관, 경리원 감독 등을 지냈다.

한편, 유학 시절부터 리더십을 보여 유학생 친목회 회장을 지냈던 신해영(1865~1909년)은 1898년 귀국 후 독립협회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협회 추천으로 중추원 의관(議官)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중추원 회의에서 변하진(제68회)과 함께 박영효와 서재필(徐載弼)을 대신(大臣) 후보로 천거하여 국왕 측근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투옥되기도 했다.

신해영은 석방된 뒤로는 정치 활동보다 주로 광흥학교, 광성학교(光成學校),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등 사립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1904년 12월 탁지부 참서관을 시작으로 관직에 몸을 담아 1906년 8월 학부 편집국장으로 임명되어 1907년 4월까지 재직했으며, 그 뒤 1909년 사망할 때까지 재일 한국 유학생 감독(학부 서기관)으로 일본을 내왕했다.

또한 신해영은 이용익(李容翊, 1854~1907년)이 1905년 초 보성학교(교장 김중환)를 설립할 무렵 그 상급학교인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 개설에 관여하여 그해 3월부터 적어도 1907년 말까지 교장으로 재임했다. (신해영은 재일 한국 유학생 감독으로 일하면서도 교장직을 수행했으며, 사임한 시기는 확실치 않다.)

철저한 반일주의자 이용익이 일본 유학 경력이 있는 신해영을 발탁한 것은 조금 의아한데, 이는 아마도 신해영의 능력과 인품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교 당시 보성전문학교에는 법학과, 이재학과(理財學科), 농업학과, 상업학과, 공업학과 등 5개과가 설치되었는데, 이것도 신해영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 <황성신문> 1905년 3월 22일자. 4월 1일 개교 예정인 보성전문학교 제1회 학생 모집 광고. 개교 당시 보성전문학교에는 법학과, 이재학과, 농업학과, 상업학과, 공업학과 등 5개과가 있었다. 교주 이용익은 전문학교 설립에 관한 모든 일을 교장 신해영에게 일임했다고 한다. ⓒ프레시안

▲ 신해영이 펴낸 <윤리학 교과서>(1906년 보성중학교 발행). 모두 4권 2책 466쪽이다. 이 책은 1909년 공공연히 애국심을 고취하고 국권 회복을 선동하는 불온한 교과서라 하여 통감부로부터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프레시안
신해영은 교사, 교육 행정가뿐만 아니라 저술·출판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1901년에는 일본인 마츠나가(松永五作)가 지은 <잠상실험설(蠶桑實驗說)>을 번역했고, 유학 동기인 법률가 이면우가 쓴 <회사법(會社法)>(1907년)을 교열했으며, 역시 유학 동기인 원응상과 함께 <경제학>(1907년)을 저술하기도 했다.

특히 신해영은 1906년 6월 당시 대표적인 윤리 교본 <윤리학 교과서>(보성중학교 발행)를 편술, 애국심 고취를 통하여 청년 학생들에게 국권 회복의 의지를 심어주고자 했다. 통감부는 1909년 이 책을 일본을 배척하고 국권 회복을 선동하는 불온한 교과서라 하여 발매 금지시켰다.

이렇듯 여러 방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신해영은 독립 자강이라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09년 9월 22일 일본에서 세상을 떠났다.

도쿄전문학교를 졸업한 또 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신소설가" 안국선(安國善, 1907년 4월에 개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안명선(安明善, 1878~1926년)이 있다. 안국선은 변하진, 신해영과 마찬가지로 귀국 뒤 독립협회에서 급진적 정치 활동을 하다 1898년말 독립협회의 해산 시에 체포, 투옥되었다. 그리고 1902년에는 유학 동료인 오성모(제68회)와 함께 대역사건에 연루되어 참형을 선고받았다가 오성모와는 달리 다행히 감형되어 1907년 3월까지 진도에 유배되었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안국선은 그 뒤 주로 애국계몽단체에서 정치와 경제에 대해 강의를 하는 한편 <정치원론(政治原論)>, <연설법방(演說法方)>, <외교통의(外交通義)>(번역서) 등 저술에도 힘을 쏟았다. 그리고 안국선은 1908년 탁지부 서기관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관직에도 종사했다.

안국선이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1908년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을 저술한 덕분이다. 대표적인 개화기 소설 <금수회의록>은 까마귀, 여우, 개구리 등 여덟 가지 동물의 입을 빌려 인간을 풍자한 우화소설로, 풍자 대상은 나라가 망하든 말든 동포가 죽든 말든 외국인에게 아첨하여 벼슬을 얻으려는 자, 부모 자식 간에 서로 사랑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 자,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속국으로 만들려는 외세 등이었다. 1909년 통감부에 의해 소설로는 처음으로 판매 금지되었다. <연설법방> 또한 금서 목록에 올랐다.

안국선의 또 한 가지 대표적인 작품은 1915년에 펴낸 <공진회>이다. 안국선은 여기에서는 그 전의 비판 정신과 기개를 잃고 패배주의에 빠진 현실순응주의자들을 통해 일제 통치의 미덕을 그리고 있다. 일제 강점 초기 청도 군수를 지내고 금광 개발, 주권 등에 손을 대는 등 일제에 대한 저항을 포기한 그의 삶이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 (왼쪽) <금수회의록>(1908년) 표지. (오른쪽) <공진회>(1915년) 서문. 두 작품의 차이만큼이나 인생과 세계에 대한 안국선의 자세도 달라졌다. ⓒ프레시안

도쿄전문학교 출신 역시 나중에 훼절한 사람도 나타났지만, 대체로 자신들이 유학을 통해 습득한 것을 한국 사회에 적용해 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다음 회에 한 차례 더 유학생들의 귀국 후 활동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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