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 전공자로서 나는 누군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키워드>를 번역해 주기를 오랫동안 바랐다. 영문학이라는 제한된 분야를 공부하고, 가르치고, 또 글을 쓰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말을 다루는 사람으로 나 자신을 정체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이란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 물건인가! 아니 '물건'이란 말이 살아 움직이며 역동적 변화 과정을 겪는 말을 가리키는 적절한 말이 될 수 있는가? 사전을 찾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하나의 말은 다른 말을 가리키고, 그 다른 말은 또 다른 말을 불러들인다.
끝없이 미끄러지는 말의 움직임을 가리켜 어떤 철학자는 '대리보충(supplement)'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지만, 사전을 들추어보는 간단한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말의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더욱이 말은 구조주의자들이 생각하듯 순전히 자의적 기호 체계에서 일어나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 아니라 인간의 주체적 감정, 욕망, 가치, 이해관계가 개입된 의미(meaning)의 각축 공간이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의미를 쟁취하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전투가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말은 현실의 '반영'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실천적 노력이 투입된 역동적 '생산'의 과정이다. 윌리엄스가 이 책에서 일정 부분 원용하는 러시아 언어철학자 볼로시노프의 말처럼 언어는 계급 투쟁이 일어나는 격전장이다.
윌리엄스의 <키워드>는 '핵심 어휘'라는 창을 통해 계급 투쟁의 역사적 현장을 누비고 그 과정을 생생히 기록한 문화 전투 일지이다. 더욱이 그는 직접 전투에는 가담하지 않은 채 기록만 하는 중립적 기술자가 아니다. 그는 웨일스의 노동 계급 출신이라는 자신의 계급적 기원을 잃지 않고 노동 계급의 당파성에 입각하여 어휘의 변천사를 기록한다.
▲ <키워드>(레이먼드 윌리엄스 지음, 김성기·유리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윌리엄스의 <키워드>는 '핵심 어휘'라는 창을 통해 계급 투쟁의 역사적 현장을 누비고 그 과정을 생생히 기록한 문화 전투 일지이다. 더욱이 그는 직접 전투에는 가담하지 않은 채 기록만 하는 중립적 기술자가 아니다. 그는 웨일스의 노동 계급 출신이라는 자신의 계급적 기원을 잃지 않고 노동 계급의 당파성에 입각하여 어휘의 변천사를 기록한다. |
사실 이 발견은 노동 계급 출신인 그가 귀족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케임브리지에 처음 입학했을 때 느꼈던 위화감과 연결되어 있다. 윌리엄스는 '영어'라는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의 언어와 자신의 언어는 현격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발음이나 억양의 차이를 넘어서는 '의미의 차이'였다. 저들의 언어에 동조할 수 없었던 그가 케임브리지 대학이 개설한 일반인 대상의 '성인 교육' 강좌를 맡으면서 노동 계급 수강생과 함께 찾고 만들어간 열정의 산물이 바로 <키워드>라는 어휘 사전이다.
하지만 <키워드>는 단순한 어휘 사전이 아니다. 이 책의 모태가 된 <문화와 사회>(1956년)가 무엇보다 '문화(culture)'라는 단어를 둘러싸고 벌어진 의미의 갈등, 투쟁, 변천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19세기 이후 진행되어온 영국 문화사, 지성사, 사상사를 다시 읽어내는 비판적 작업이었다면, <키워드>는 윌리엄스가 이 책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핵심 어휘들을 통해 영국 사회의 문화적 변동을 읽어내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문화와 사회>에서 윌리엄스는 '문화', '계급', '예술', '산업', '민주주의', 이 다섯 개의 어휘가 상호 연결되어 복잡한 의미망을 형성해왔음을 추적한다. <키워드>는 원래 이 책의 부록에 싣기 위해 만든 60개의 단어 해설집에서 출발했는데, 출판사에서 분량 문제로 수록을 거부하자 묵혀 두었다가 1976년 초판 발행 시 110개의 표제어를 실었고 1983년 재판을 찍을 때 21개의 단어를 추가하여 총 131개 어휘에 대한 분석 및 해설을 싣고 있다. 이번에 국역된 <키워드>는 이 재판을 완역한 것이다. 어휘 사전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책은 어휘라는 매개를 통해 문화와 사회의 변화를 읽어내는 비판적 독해이자 문화 유물론적 실천이다.
그렇다면 왜 키워드인가? 그리고 키워드란 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윌리엄스는 재판 서문에서 이 책이 특정 학문 분야의 사전이나 용어 설명 책자가 아니며, 사전 편찬의 역사에 대한 보충 설명이나 다수 낱말을 풀이한 사전도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어휘에 대한 탐구의 기록"(21쪽)이라고 말한다. 이 때 키워드로 선정된 어휘들은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정의된다.
1) "어떤 종류의 활동과 그 활동의 해석을 연결하는 중요한 단어."
2) "어떤 사상의 형태를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
윌리엄스가 다루는 키워드는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평범한 단어이다. 하지만 그 속엔 역사적 활동 및 해석과 사상을 구조화하는 핵심적 이슈가 들어있다. 따라서 이런 키워드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집단에 의해, 어떤 의미가 특권화되고, 어떤 사회·문화적 제도를 거쳐 형성되어왔는지 추적해보면, 해당 사회를 역사적으로 구조화해온 담론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스스로 '역사의미론'으로 명명한 이런 방법론을 통해 윌리엄스는 궁극적으로 영국 사회를 형성해온 담론의 역사를 노동 계급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읽어내고 대안적 의미를 구축하고자 했다.
사실 <키워드>는 단어의 의미를 중립적으로 기술한 책이 아니며, 정통적 시각에서 해당 어휘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책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윌리엄 엠프슨의 <복잡한 단어의 구조>나 <옥스퍼드 영어 사전>과는 지향점이 다르다. 윌리엄스가 무엇보다 강조한 것은 해당 어휘의 지배적 의미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의미의 '갈등'과 '대결'과 '각축'의 국면이다.
윌리엄스가 <마르크스주의와 문학>(1977년)에서 정식화한 '잔존', '지배', '부상' 문화의 역동적 대결 과정은 특히 '민주주의', '기회', '교육', '계급' 등 해석의 차이에 따라 상당히 다른 의미를 구축할 수 있는 단어에서 첨예하게 드러난다. 윌리엄스는 사전이라는 권위 있는 외피 뒤에 숨음으로써 이런 의미의 대결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상식이라는 지배적 의미에 안주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 만큼 윌리엄스의 어휘 설명이 많은 반론과 저항에 부딪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특히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인식의 부족은 이 남성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남아있는 문화적 공백 지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국역본에는 빠져있지만 영어 원본의 맨 마지막에 '독자 메모'라는 형식으로 그가 백지를 끼워 넣은 것은 부상하는 새로운 의미에 자신을 개방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자 후기에도 지적되어 있듯이, 윌리엄스의 <키워드>는 요즈음 국내 학계에서 시도되고 있는 코젤렉의 '개념사' 연구나 '번역어' 연구와도 연결될 수 있는, 현재 진행형의 작업이다. 영국에서는 <키워드> 초판 출간 30주년이 되던 2005년에 그의 후계자들이 <뉴 키워드>(2005년)를 출판하여 자기 시대의 어휘 정의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각 시대는 자기 시대의 문학 전집을 가져야 하듯, 자기 시대의 <키워드>를 가져야 한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라는 어휘를 둘러싸고 격렬한 의미의 전투를 치러왔고, 아직 이 전투는 종결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국회, 법정, 학교 같은 제도화된 공간뿐 아니라 거리에서, 술집에서, 사이버 공간에서, 그리고 가정집 거실에서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이 낯익은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각축과 투쟁의 역사를 누군가 기록하여 후세에 물려준다면, 우리는 우리의 투쟁의 역사를 담고 있는 오롯한 사전 하나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키워드>가 필요하다.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낱말이 외국어 번역어이듯이, 번역된 근대를 거쳐 온 우리에게 <키워드>는 문화 번역의 과정을 담고 있는 번역어 사전일 수밖에 없다. 사실 윌리엄스가 설명하고 있는 많은 영어 단어도 희랍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사이에 의미의 이동, 횡단, 혼융의 과정을 거쳤던 낱말들이다.
역어의 선택에서부터 그것의 의미 구성에 이르기까지 키워드의 역사는 이질 문화가 서로 만나 몸을 섞는 의미 혼숙의 과정이기도 하다. 특정 문화의 의미 체계가 낯선 이국성을 만나 자신을 변용해내는 의미 생성 과정으로 문화 번역을 이해한다면, 한국에서 키워드 편찬 작업은 서양 문화를 번역해내는 문화 번역 과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누가 과연 이 거대한 작업을 할 것인가! 한국의 인문학은 해야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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