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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이승만 주석, 공산당을 이끌어 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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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이승만 주석, 공산당을 이끌어 주시오!"

[해방일기] 1945년 10월 22일

1945년 10월 22일

10월 22일 오후 이승만의 재경 신문 기자단 회견에서 아래 문답들이 주의를 끈다.

(問) 8月 15日 이후 우리들의 해외 정책이 환국하지 않은 것은 국제적 협정이 있는 까닭인가? 또 38도 이북에서는 모든 권리가 인민의 수중으로 들어갔는데 38도 이남은 그렇지 않으니 여하합니까?

(答) 북위 38도 이북에 대한 비난과 여러 가지 사실을 다루고 있음으로 종합적인 해답도 들어 갈 것이나 여하간 침묵을 지킬 수는 없다. 남북의 우리 강토를 회복해야 함으로 북방에서 어떠한 복리를 그 곳 주민에게 주든 혹은 남방 미군이 어떠한 복리를 주든 이러한 분할적 복리로서 만족한 것이 아니므로 爲先 강토 환원의 장애는 제거해야 할 것이다.

(問) 트루만 미 대통령의 극동 정책 중 조선의 자주 독립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신탁 통치를 한다고 전해진 것 같은데 사실일까?

(答) 전연 알 수 없으나 桑港에 있을 때부터 이러한 신탁 통치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영토는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신탁 통치라는 것은 자주 독립의 실력이 없을 때에 있을 수 있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것을 들을수록 시급히 우리의 실력을 갖추고 우리의 자주독립으로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자유신문>, 1945년 10월 23일)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위 질문에서 이남의 주민 자치가 이북처럼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지적했는데, 이승만은 이것을 "분할적 복리"로 폄하하고 38선의 제거를 앞세웠다. 그의 상투적 수법이다. 주민 자치라는 민주주의의 근본 과제를 '복리' 정도의 표현으로 깎아내리면서 누구나 동의할 '38선 제거'라는 명분으로 내리누른다. '38선 제거'에 대한 진정성은 별개 문제다.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한국인에게 자주 독립의 실력이 있다는 이유로 신탁 통치를 반대한다는 뜻을 완곡히 밝혔다. 다른 질문의 대답에서 미국이 한국인의 능력을 잘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더욱이 1942年 진주만 사건이 있자 곧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하여 미국이 원조를 안 할 것은 소련 관계와 일본의 악선전 또 불령한 한인들의 모략의 관계로 조선에 새로운 정부를 줄 수 없다는 인상을 받은 까닭이다. 그러나 다행히 대통령이 그러한 사실을 부인했으며 국무총리도 조선의 실정을 잘 양해하였고 태평양 방면 최고 지휘관 맥아더 장군도 조선인의 분열 자주 실력이 없다는 것은 허위선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조선에 있는 지휘관 하지 중장과 아놀드 군정장관 역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각 정당이 상호 협력하여 합동 통일하면 훌륭히 자주독립할 수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다.

당시 워싱턴 사정을 제일 잘 아는 한국인으로서 그는 사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서 대답했다. 맥아더와 하지가 한국인의 실력을 믿든 안 믿든 신탁 통치에 반대한다는 사실은 바로 지난주에 함께 앉아서 확인한 사실이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성이 신탁 통치를 추진하고 있었던 것은 한국인의 실력이 불충분하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미국인이 한국인의 실력을 믿고 있다는 이승만의 대답은 신탁 통치에 반대하고 남한에 단독 정치조직을 만들려는 맥아더와 하지의 방침을 뒷받침하려는 책략이었다.

참으로 교묘한 화법이다. 왜 이남에서는 이북처럼 민주적 발전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냐는 질문에는 38선이란 현실 문제를 방패로 삼고, 신탁 통치 반대를 위해서는 민족 자존심에 기댄다. 이 문답으로부터 70여 일 후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은 그가 정치적 주도권을 잡는 수단이 될 것인데, 귀국 시점에서 그는 벌써 이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었다. 이것 때문에 그에게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 있던 김구도 그에게 거듭거듭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일 때 김구는 장관급도 못 되는 국장급이었으니까. 임정의 법통을 내세우는 김구로서는 전임 임정 대통령의 체통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대통령 경력은 떳떳한 것이 못 되었다. 임정에서는 원래 대통령직을 두지 않기로 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선출했다. 그런데 이승만이 임의로 대통령 행세를 하고 추인을 요구했기 때문에 임시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게다가 퇴임도 당당했던 것이 아니라 직무 방기와 위임 통치 청원 때문에 탄핵으로 쫓겨났다. 일본의 패망이 가시화된 단계에 와서야 주미외교위원부라는 이름으로 임정과 다시 관계를 맺었다.

1919년에 만들어진 여러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영수급 직책에 추대한 이유를 아무리 조사해 봐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로 식민지 구도에 변화가 일어나던 당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외교적 승인을 통한 독립의 길에 기대가 컸기 때문에 외교통, 특히 미국통인 이승만이 중시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도 이승만의 사람됨이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었을 텐데, (상해 임시의정원에서 신채호는 위임 통치 청원을 이유로 이승만의 국무총리 선출에 반대했다) 이제 희망을 갖고 세우고자 하는 국가의 원수로 어찌 그런 인물을 추대할 수 있었을까.

상해 임정의 경우 배경과 성향이 서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단시일에 모여 조직이 안정되지 못한 상태여서 '검증'이 충분치 못했던 것 같다. 의견 조정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다중이 모였을 때 소수라도 확고한 지지자를 가진 후보가 유리한 위치를 누리는 법이다. 이승만이 상당한 범위의 확고한 지지와 함께 조선 왕실 자손과 미국 박사 등 그럴싸한 간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그의 득세를 가능케 한 것 같다.

이승만이 1902~1904년간 옥중에서 40여 명의 동료 죄수를 기독교로 인도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그의 중요한 지지자들을 많이 얻었다. 이것이 상류층 인사들의 대규모 입교로는 특기할 만한 일이어서 그들이 YMCA 등 기독교계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맡으며 한국 기독교 사회, 그리고 후에는 부르주아 계층의 이승만 지지를 확보해 주었다. 1919년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도 그들은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1919년에서 1945년 사이에 이승만은 영욕을 반복하며 지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한국의 운명의 상당 부분이 미국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이승만은 독립운동 경력자 중 최고의 미국통이었다.

9월 14일 인민공화국 중앙위원회는 이승만을 주석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좌익에게까지 지도자로 인정받은 이승만은 새로운 후광을 얻었고, 이 후광으로 그의 지저분한 과거가 가려졌다. 그가 귀국했을 때 박헌영이 그에게 공산당을 이끌어달라고 간청하기까지 했다. 이 일을 놓고 서중석은 "이승만을 주석으로 앉혔다는 것은, 그가 미국에서 좌우 협동을 거부하고 반소반공을 해온 것을 전혀 모른 데에서 나온 것으로, 국외 소식에 좌익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드러낸 것이었다"고 한탄했다.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21쪽)

1919년에 이승만의 후광을 만들어준 임시정부도, 1945년에 그의 후광을 다시 만들어준 인민공화국도 얼마 안 있어 그 일을 후회해 마지않았다. 그렇게 얻은 후광은 그가 맥아더와 흥정하는 데 소중한 밑천이 되었다. 묘한 일은, 1948년에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한민당도 역시 후회를 겪게 된다는 사실이다. 아마 초년에 그를 지원해준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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