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0월 20일
30년 전 <해방 전후사의 인식>은 현대 한국을 바라보는 눈을 오랫동안 가리고 있던 안대를 벗겨내는 작업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김도현의 '이승만 노선의 재검토'는 이승만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봉쇄되거나 제한되어 있던 상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비판에 치우친 감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외교 제일주의'에 대한 설명은 정확하다.
이승만은 이러한 자신의 외교 제일주의를 위해서, 미국 내에서 무장 독립군의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며 자기를 하와이에 초청해 준 박용만과 다투고, 실력 양성을 애쓰는 안창호와 불화하고, 침체한 독립운동에 활력을 준 김구의 테러 행위를 비난했으며, 이청천 등의 무장 유격 행동도 비판하였다.
(…) 미국의 외교가 한국민에 대한 동정보다 제국주의적 이익에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깨닫지 못한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승만 외교의 일생에 걸친 헛수고를 두고 오늘날까지 '외교에는 귀신'이란 말이 그에게 적용되고 있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이다.
해방 후만 하더라도 대미 의존 외에는 아무런 국제적 지위를 얻지 못한 것이 그의 외교의 전부였다. 이승만은 또 "세계의 분쟁을 일으키는 조화를 가진 사람으로 알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재미 교포 사회와 독립운동 사이를 분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승만은 1913년 하와이로 갔는데 그 뒤 25년의 그곳 생활은 분쟁으로 보낸 것이라는 평을 받을 만큼 교포 사회를 분열시켰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1>, 363~364쪽)
외교를 중시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외교만을 내세워 다른 방법을 무시하거나 방해하는 '제일주의'는 문제다. 어제 얘기한 스티븐스 저격 사건의 재판 통역 거부가 이 '제일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다. 독립운동은 명분일 뿐이고 개인의 출세가 목적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유리한 '외교'만을 고집하고 실제로 '독립'을 향한 의지는 없었던 것이다.
정병준은 <우남 이승만 연구>의 제4장 '외교 독립 노선의 형성과 특징'(97~136쪽)에서 이승만의 활동 노선을 개관했는데, 1904년 옥중에서 쓴 <독립졍신>을 그 외교 독립 노선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외세에 대한 우호적 생각과 현실 순응적 정세관"을 바탕으로 무저항적 적응만을 국권 보존의 방법으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이런 노선을 선택한 이유를 정병준은 이렇게 설명했다.
외교 노선은 이승만의 출세 지향적 기질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이승만은 신분-지위-연령 등 모든 면에서 사회-정치 지도자가 될 수 없었지만, 외교 무대에선 한국을 변론하는 대표성과 명망성을 자임할 수 있었다. 특히 1905년 30세의 나이에 한국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대미 외교를 경험했던 사실은 이후 그가 외교 노선으로 일로매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승만이 외교의 방식을 선호한 개인적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 생사를 건 투쟁이 아니라 현실주의에 기초해 필요에 따라 시도할 수 있으며 개인적 안전을 보증할 수 있는 방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승만의 외교 노선은 개항기 한반도의 상황 및 국제 정세, 미국-기독교-옥중 생활이라는 개인적 경험, 출세 지향성-안전 보증이라는 개인적 특성이 결합되면서 형성된 것이었다. 특히 옥중 생활에서 본격화된 미국 선교사-기독교-미국에 대한 그의 신뢰는 유학 기간을 통해 신념화되었고, 이를 통해 대미 외교 일변도의 외교 노선이 형성되었다. (98~99쪽)
연구서의 서술로는 좀 아슬아슬한 표현이다. 연구의 엄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연구자는 주제에 대한 직설적 비판을 삼가야 한다. 그래야 나 같은 평론가가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어느 독자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다고 말하는데, 이 정도 표현이면 정말 독자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승만의 행각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객관적 서술만으로도 바닥이 다 드러나 보이는 문제가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미 일변도의 외교로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소득이 있었나? 서중석은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에서 이에 대해서조차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 정부의 불신에는 이승만이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1932년 제네바행을 제외하고는 1920년대 중반 이래 거의 활동을 중지하였던 이승만은 중일전쟁 이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여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외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 1943년 여름 태평양협의회의 한 모임에서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송자문 중국 외교부장에게 한국인들의 저항 운동을 평가해줄 것을 요구했다. 송자문은 이승만에게 한길수와 제휴하도록 설득했으나 헛수고였고, 그래서 송자문은 한국인들이 너무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지원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루스벨트에게 성급히 보고하였는데, 이것이 임시정부 승인 또는 지원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181~182쪽)
1904년의 <독립졍신>은 당시의 '외세 줄서기' 행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국권 수호'라는 명분하에 각자 유리한 나라를 붙잡고 매달리는, "외국 공사들을 영수로 하는 당쟁"의 양상이었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미국통'이 되었으나 미국의 한국 개입이 약했으므로 일본 쪽에 붙어 독립협회에서 반러시아 활동을 했다. 1904년 여름 하야시 일본 공사가 그의 석방을 주선한 것도 그의 친일 활동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1898년의 맹렬한 반러시아 활동에서부터 해방 후의 극단적 반공 노선까지 이승만은 러시아-소련에 적대적인 태도를 일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20년대 초부터 1933년 모스크바 방문 때까지 그가 소련에 추파를 보낸 시기가 있다. 미국이 한국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시기에 소련의 지원을 기대한 것이다.
1898년 이승만의 독립협회 활동기에 한국에서 부딪치고 있던 외세는 일본과 러시아였다. 이때 그가 일본을 택한 것은 독립협회에 일본 측 돈이 많이 풀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는 대한제국 조정에 대한 영향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일본은 독립협회의 친일파를 통해 이에 도전하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이 러시아에 반대한 이유는 러시아가 백인국가라는 것뿐으로, 일본의 '아시아인 단결' 주장에 호응한 것이었다. 미국이 백인국가라는 이유로 배척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외교 노선은 피부색보다 돈으로 결정되는 것이었다.
1920년 소련이 거액의 지원금을 상해 임시정부 쪽으로 보내는 것을 보고 이승만은 소련에 매달릴 생각을 일으켰다. 소련에 접근할 기회를 꾸준히 노리다가 마침내 1933년 7월 모스크바까지 갔으나 이튿날로 추방당했다. 그의 일관된 반공-반소 노선은 그 시점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일본에 대한 그의 태도 역시 상황에 따라 굴곡을 보였다. 1912년 미국으로 떠난 것이 일본의 박해를 피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때도 그는 식민 통치를 찬양하고 있었다. 1912년 11월 18일 <워싱턴포스트>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합방 후) 불과 3년이 지나기도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 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 오늘의 서울은 주민의 피부 색깔을 제외한다면 신시내티와 다를 것이 없다. (정병준 위 책 104쪽에서 재인용)
이듬해 하와이로 가서 민족의식이 강한 교민 집단에 의탁하게 되면서야 반일적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민사회 내에서만 항일 얘기를 했을 뿐, 대외적으로는 일본에 적대적인 태도를 표하지 않았다. 심지어 1923년에는 자기가 운영하던 한인기독학원 학생들을 모국 방문단으로 보내면서 하와이 일본영사관과 교섭, 일본 여권을 가지고 가게 하기까지 했다. 이 조치에 대한 사례로 일본영사관은 이승만에게 상당액의 학교 건축비를 지원해 줬다. 한인 학생들을 일본 국민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직함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 때 한 짓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이 일본과 평화로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동안 일본을 적대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이 터진 후 1939년 워싱턴으로 건너가면서 일본을 적대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그는 친미파 한국인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인이었으며, 직업은 지한파(知韓派) 정치 브로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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