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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여! 너는 누구 편이냐?"

[편집자, 내 책을 말하다] 키어런 앨런의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는 종국에 가서는 오해가 풀리는 사랑이 담겨 있다. 키어런 앨런의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박인용 옮김, 삼인 펴냄)에도 오해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 오해가 풀린 자리에는 사랑 대신에 추악한 진실과 전쟁 그리고 폭력이 있다.

막스 베버가 누구인가. 고전 사회학의 거두이며 좌장격인 인물로 마르크스에 필적하는 학자가 아닌가. 그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인문·사회과학 분야 필독서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불온한 혁명가의 이미지가 강한 마르크스와 달리 막스 베버는 신사적이고 냉정한 학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점잖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으며, 냉철하게 관료제의 문제에 천착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랫동안 베버를 연구해온 저자는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베버가 실은 지독히도 보수적인 골수 극우 제국주의자였으며, 누구보다 정치적인 인물이었음을 폭로한다. 저자가 짚는 논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키어런 앨런 지음, 박인용 옮김, 삼인 펴냄). ⓒ삼인
하나는 베버의 인생 자체가 게르만 민족의 영광과 독일 제국의 승리를 위해 정향되었다는 점이다. 베버는 29살에 이미 "독일이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역사가 내린 의무일 뿐 아니라 대중이 남부럽지 않은 삶을 향유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보면서 '독일에서 가장 사악한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단체'로 평가받던 범독일연맹에 가담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베버는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낸다. 그는 그즈음에 발표한 한 논문에서 "전쟁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독일이 필요로 한 것은 쉽사리 절망에 빠지기 쉬운 수사적 호언장담이 아니라 분명한 전략적 목표"라고 주장하면서 군사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테면 베버는 중부 및 동부 유럽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선 영국과는 협정을 맺고, 폴란드는 독립을 보장하되 독일의 지배 아래 두면서, 궁극적으로 러시아를 주된 적국으로 상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벨기에를 일종의 볼모로 활용할 것으로 강조하면서 미국의 불가피한 간섭은 피해야 한다는 냉철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이쯤 되면 베버의 냉정함은 학자의 것이 아니라 군사 전략 조언가의 것이었던 셈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베버는 전쟁이 끝나가 패색이 짙던 와중에도 전국적인 게릴라전을 주장하며 결사항전을 외쳤다. 학자 베버의 실제 직업은 이데올로그이자 선동가였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베버의 극우적 면모는 그의 생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흔히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알고 있는 그의 이론이 사실은 철저한 인종 차별주의와 엘리트주의로 점철되었다고 지적한다. 우선 베버는 학문 연구의 궁극적 목표를 "독일의 정치 교육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는데, 여기서 정치 교육이란 "독일제국을 이끌어 나갈 사명을 뜻한다"고 강조한다. 아예 학자의 가면을 쓴 극우 이데올로그임을 자처한 것이다.

또 저자는 베버가 여러 논문과 저서를 통해 흑인과 인도인, 중국인 등 다른 인종과 문화를 폄하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예를 들어 베버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문화가 없으며 식민지 지배를 받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봤으며, 심지어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과 싸운 적군에 대해 "점차 야만인,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미개인 건달들로 구성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베버는 또 호전적 제국주의의 관점에서 기묘하게 동양을 무시했는데, 이를테면 "전쟁과 대립으로 점철된 유럽의 역사는 발전과 활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된 반면에, 중국 사회는 정체된 관료제를 만들어 낸 평화주의 때문에 멸시되었다"다면서 엉뚱한 평을 하기도 했다.

베버의 추악한 진실은 그의 정치 지도자 론에서 그 정점에 달한다. 베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료화의 진행은 막을 수 없고, 탈출구란 없다고 주장하면서 의회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 제도에 불신을 드러냈다. 그런데 베버는 단순한 엘리트적 비관주의에 머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애 후반에 그가 지도력 민주주의라고 지칭한 정치 지도자 론을 전개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베버의 정치 지도자론의 핵심은, 카리스마 있는 강력한 지도자에게 대중이 철저하게 자신들의 운명을 위탁하고, 지배당할 때, 관료화로 무력해진 국가의 번영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베버의 이러한 지도력 예찬을 고삐 풀렸다고 표현하면서 "대중은 위대한 지도자가 손으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엿가락 같은 대우를 받을 뿐 아니라, 그 지도자 주위에 있는 정치 활동가조차도 그 지도자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베버의 정치 지도자 론에서 베버 사후에 출현할 히틀러의 냄새를 맡는다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

이 책은 베버가 사실상 독일 제국의 군인이자 파시즘의 출현을 노래했다는 점 그 이상의 것들을 시사한다. 그것은 학문이 과연 정치 외재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영역에 자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많은 학자들, 교수들이 강단과 책에서는, 짐짓 정치와 사회 현실에 초연한 태도를 취하면서 '학문'을 강조하다가, 어느새 정계로 진출해 지배 집단의 하수로 맹활약을 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봐왔다.

물론 대다수 학자들은 조용히 학문 연구에 매진해오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가 우리의 사회적 삶을 철저하게 관통하는 세상에서, 초연한 척하는 태도는,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행위일 것이다. 정치와 학문이 분명하게 분리할 수 없는 상호 구속적인 것이라면, 학자는 언제나 선택을 요구받을 수밖에 없다. 지배 계급의 편이냐, 피지배 계급의 편이냐, 불의의 편이냐 정의의 편이냐, 부자들의 편이냐 가난한 자들의 편이냐를.

가혹한 양자선택이고 선악의 도식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회가 가혹한 폭력들이 수 놓아진 잔인한 곳이라는 점을 누가 부정할 수 있으랴. 그 점을 부정하는 자들은 착취와 폭력과 억압의 현실을 기만하려는 이데올로그와 기생충처럼 호의호식하는 자들뿐이리라.

결국 이 책, <막스 베버의 오만과 편견>은, 우리에게 마르크스의 책을 다시 들춰보고, 그가 말한 어떤 비정한 진실 속으로 돌아가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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