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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아직 '반성문'을 제출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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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아직 '반성문'을 제출하지 않습니까?

[親Book] 김도연의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아무 생각 없이 제 생각대로만 하면 잘못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제 생각대로만 하면 잘못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제 생각대로만 하면 잘못입니다……."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쓴 반성문은 똑같은 문장을 한없이 늘여 쓴 것이었다. 산수 시간에 사용할 바둑알을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학교에 간 아이가 교문에서 아빠에게 급하게 바둑알 10개를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고, 아빠가 부랴부랴 가져간 바둑알이 전날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흰 색과 검은 색으로 각각 5개가 아니어서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워 결국 결석까지 한 것이었다.

너무나 어이가 없던 나는 퇴근을 하고 온갖 야단 끝에 잘못한 것을 반성문으로 써오라고 했을 때 아이가 가져온 반성문이 바로 위의 한 문장을 종이 한 면에 빽빽하게 채운 내용이었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어이가 없었지만 심한 야단 끝에 약간 맥이 풀려버린 후라 뭐라 말도 못하고 넘어 갔는데, 아이가 쓴 반성문이 존 버닝햄이 쓴 동화 <지각 대장 존>(박상희 옮김, 비룡소 펴냄)에 나오는 반성문을 흉내 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어이없는 웃음을 삼켜야 했다.

<지각 대장 존>에 나오는 존은 날마다 학교에 가려고 길을 나서면 온갖 기이한 이들이 일어나 학교에 지각하고 만다. 어느 날은 사자가 길을 막고 있어 학교에 늦고, 다음 날은 파도가 밀려와 옷이 흠뻑 젖어 학교에 늦는다. 다음 날은 악어가 가방을 채가서 가방을 뺏어오느라 학교에 늦게 된다. 그리고 그런 존을 거대한 몸집으로 내려다보며 까만 옷을 입은 권위적인 선생님께서 거짓말은 용서할 수 없으니 날마다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반성문을 300번 이상 쓸 것을 요구한다. 권위적인 학교 문화를 풍자한 <지각 대장 존>을 좋아했던 아이가 반성문을 흉내 낸 것을 보고 '내가 아이에게 쓸데없이 동화를 너무 많이 읽혔구나' 하는 씁쓸한 한숨을 내쉬어야 했는데 최근에야 알고 보니 그때는 아이가 너무 어려서 반성문은 원래 그렇게 쓴 것인 줄 알았다고 하여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려야 했다.

사족이지만 존의 거짓말에 대한 기준은 어른들의 잣대인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존이 만난 악어는 몸짓이 큰 고양이일수도 있고, 파도는 어느 집 아줌마가 차를 세차하기 위해 호스로 뿜어내는 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남들이 알기 어려운 상황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겠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의 우리 아이가 역시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어느 날 하교 후에 집에 아무도 없자 제가 언젠가 가보았던 아빠 연구실을 찾아가기 위해 장장 1시간 이상을 걸어(겨우 집에서 세 정거장 거리 정도였지만…) 만난 작은 개천(신림동 도림천)을 보고 '한강에 왔다'는 소동을 벌여 주변을 깜짝 놀라게 만든 에피소드가 있었다. 작은 개천이 거대한 한강으로 인식되는 아이의 순박함을 짓누르는 예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의 반성문은 물론 동화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이해하기 어려운 내면을 지닌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은 별의별 사건들을 일으킨다. 올해만 해도 보호자의 전화번호를 일부러 잘못 말해놓고 장장 몇 달을 거짓말로 속여 가며 결석한 일을 겪었고, 며칠 전에는 출근길에 우리 반 여학생 3명이 한 오토바이에 위험하게 매달려 헬멧도 쓰지 않은 채 교복 치마를 휘날리며 등교하는 모습을 보고 기겁한 일도 있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 얘들을 데려다 겁도 주고, 소리도 지르고, 어르고 달래다가 결국은 반성문을 쓰게 한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그 나름대로 만만치 않은 관록을 뽐내며 반성문을 쉽게도 참 잘 써낸다.

학교 현장에서 반성문은 눈물과 지겨움의 반복이다. 끝도 없는 교사와 학생 간의 지루한 싸움이다. 서로가 뻔하게 결과를 알고 있지만 잘못된 상황을 접한 교사가 가장 쉽게 내미는 카드가 반성문이고, 학생 입장에서는 진실함이 없이도 문제를 피핼 갈 수 있는 것이 또한 반성문이다.

▲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김도연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김도연의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문학과지성사 펴냄)은 지금까지 나온 반성문과 참 달랐다. 어른이 되어 소설가로 살고 있는 중년의 주인공은 어느 날 중학교 2학년 담임이셨던 국어 선생님이 간암 말기라는 말을 듣고 병실을 찾아간다. 30년 만의 그 지극한 해후에서 선생님이 불쑥 말씀을 꺼내신다.

"자네는……내가 내준 숙제를 왜 아직도 제출하지 않고 있나?"
"예? 무슨……말씀이신지?"
"……반성문 말일세."
"반성문요? 아, 예……."


병상에 누운 선생님의 반성문에 대한 재촉은 계속된다. 화자는 선생님의 말끝에서 끝없이 피해만 다녔던, 끝까지 피하고만 싶었던 기억과 마주한다. 그것은 중2 백일장 대회에서 학생 잡지에 난 '정류장'이라는 글을 표절하여 쓴 글이 덜컥 장원이 된 사건이다. 글을 쓰고 살아가는 소설가가 글과 만난 첫 만남에서 남의 글을 베껴온 이야기는 평생의 멍에로 작용했을 것이다. 용케 다른 이의 눈을 피해갈수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자신의 양심의 눈까지는 속일 수 없었던 비밀스런 이야기를 담임선생님이 알아버리신 것이다. 담임선생님은 상까지 받아버린 화자에게 500매 반성문을 요구했고, 화자가 많은 분량을 감당하기 어려워하자 기한을 평생 연장해주며 살아가면서 언제라도 그 반성문을 제출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애처로울 정도로 화사하지만 언제 그 잎을 떨굴지 알 수 없는 목련같이 위태로운 생명의 끈을 잡고 있는 선생님과 자신의 외로웠던 유년을 위해 화자의 반성문 쓰기는 시작된다. 착하고 영리한 아내의 자극을 받아가며 어두운 기억의 방문을 열고 묵은 먼지에 쌓인 옛 추억과 마주한다. 자신의 존재감을 처음으로 인식하며 처절한 고독감에 휩싸였던 이야기, 안경을 쓴 전학생과 과자 인심이 후하던 가겟집 주인 아들에게 느낀 참을 수 없는 열등감 그리고 뭔가 남들보다 잘나 보이기 위해서 시작한 웅변과 글의 표절까지, 한걸음씩 깊이 그 시절로 들어가며 그 시절을 훑어 나간다.

반성문을 통한 선생님과의 만남을 지속하며 화자는 뜻밖에도 500매라는 과도하고 버거운 숙제 이면에 감춰진 선생님의 지난 아픔을 알게 된다. 군사 독재 시절, 시위를 하다 잡혀간 깜깜한 감방에서 자신의 양심 노트와 안정적인 교단 자리를 맞바꾸고 교사가 된 선생님의 아픈 과거가 바로 그것이다. 선생님의 회한과 무거운 짐은 제자에게 이어졌던 것이고, 선생님의 최후를 아름답게 꽃불을 켜고 지켜드렸던 제자의 반성문은 바로 선생님과 제자가 함께 써내려간 인생의 반성문으로 자리매김 되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떠난 자리에서 화자는 선생님이 내주신 반성문이라는 숙제를 통해 서툴렀지만 진실했던 자신의 성장통을 긍정하고 양심을 회복했으며 아름다운 추억들을 되찾았음을 확인한다.

과거를 통해 현재가 풍요로워 지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요즘 나 또한 현재의 나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을 때마다 지난 시절을 더듬게 된다. 인내와 성찰이 부족했던 젊은 시절을 생각해보면 내가 반성문을 써야 한다면 소설에 나온 내용보다 훨씬 가혹하고 아픈 내용이 될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실패와 좌절만이 때로는 인생의 진실처럼 느껴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은 너무 작위적이고 미화되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책 곳곳에 스며있는 아름다운 문장력에 감탄하다가도, 선생님과의 달콤한 인연의 외피를 쓰고 화자는 참 적당히 아름다운 것들과 타협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거장에서 만난 소녀와 첫입맞춤을 하는 동화적 분위기나 반성문을 쓰기 위해 절에 들어간 이야기' 등에서 특히 그랬다. 그리고 덧붙인 이야기인 <진부의 송어낚시> 또한 삶에 대한 작가의 진정성은 느껴졌지만, 작가의 욕심이 앞서 전체 소설의 결을 흐린 것 같아 못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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