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말은 정말 대안을 찾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지금 자신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는 말인지에 대해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더하여 대안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그 공격성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수동적인 말이다. 대안이 자기 손에 구체적으로 주어질 경우에만 자신은 움직이겠다는 뜻이다. 자기가 나서서 대안을 생산하고 실천해보겠다는 의지는 이 말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 더하여 나는 요즘 대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의심을 품는 결정적인 다른 이유를 하나 더 발견하였다. 그것은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서 우리 삶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꼼꼼하게 자기 감정을 이입하며 알아보고 살펴보려는 태도가 실종되었다는 것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이들의 태도는 이렇다. '당신이 말하는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우리도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그런 사례들이나 분석 같은 것은 이만 되었고, 그래서 대안이 뭐야?'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무엇'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명박 정부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래서 세상의 인민들이 얼마나 비참해졌는지, 이 모든 것을 자신들이 잘 알고 있고,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말한다. '됐고, 그래서 결론은? 대안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이들에 필요한 것은 사유하는 인문·사회과학이 아니라 기획하는 인문·사회공학자들이다.
그런데 정말 이들이 잘 알고 있는가? 대학교 강의실에서부터 대중 강연장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그들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느꼈는지를 물어보면 의외로 허점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의 이야기가 '다 안다는' 그들의 앎에는 빠져있다. 대신 그 허점투성이를 채우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 구조적 모순, 그리고 파시즘 따위의 헐렁헐렁한 개념들이다.
이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은 그 '단어'들이지 사람들의 세상 이야기가 아니다. 리처드 세넷이라는 한 사회학자의 말을 응용해서 말한다면 이들이 알고 있는 것은 사태의 '이름'에 불과하지 '사태'가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데치다'라는 말은 야채를 끓는 물에 살짝 삶는 것에 대한 이름이지 삶는 행위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그래서 이들이 알고 있다는 그것에는 세상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이들의 앎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없다. 대신 요즘 세상과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고발 르포'인 것처럼 보인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의
▲ <암행 기자 권터 발라프의 언더커버 리포트>(황현숙 옮김, 프로네시스 펴냄). ⓒ프로네시스 |
노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이 독일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읽으면서 독자는 아마 '오 마이 갓! 이게 '복지 사회' 독일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노동조합을 파괴하기 위해 일부로 성희롱 사건을 조작해내고 노동조합 간부들을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어서 승리를 이끌어내려고 하는 변호사와 사측의 음모를 보면서 '오 마이 갓, 이게 노동조합이 힘이 세다고 하는 독일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외롭게 사는 노인네들과 독일어를 잘 하지 못하여 언제나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터키계 사람들이 운영하는 가게를 협박하여 물건을 강매하는 텔레마케팅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오 마이 갓! 이게 소비자들의 권리가 잘 보장되고 사람들이 법과 규칙을 잘 따르는 독일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것이다. 마치 우리가
독일인뿐만이 아니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이 이야기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뭐야, 독일 이야기잖아' 하고 시작하지만 곧 이것이 우리 사회의 이야기라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 가톨릭계 사회복지 단체에서 운영하는 노숙자들의 쉼터가 정부 지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해도 좋을 젊은이조차 붙들어두고 있다는 고발에서는 한국의 많은 장애인 시설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들에게 노숙자와 장애인은 정부 보조금을 위한 '숫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 사장을 하다 노숙자가 된 사람의 이야기에서는 잘 나가는 직장인 혹은 사업가에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은 1997년 이후 한국의 노숙자들이 생각날 것이다. 책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 '생각 외로 이 길은 빠르고 쉬우며'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빵 공장에서 노조를 파괴하기 위해 '모든 직원들을 개인적으로 한명씩 불러서 노동조합의 권리 보호보다 보험 증권이 더 범위가 넓다'며 노조원을 회유하는 장면은 초국적기업 삼성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텔레마케팅 회사에 사원들 간에 묘한 경쟁 의식을 부추기고 알량한 몇몇 떡고물을 던지면서 실적 경쟁을 압박하는 장면에서는 수많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허울밖에 없는 직위 상승을 미끼로 대학생들의 노동력을 갈취하고 있는 한국의 '알바' 노동이 생각난다. 결정적으로 실적이 나쁜 직원을 의자에 앉히지 않고 서서 업무를 수행하게 하는 벌칙은 대형 할인점에서 계산원들에게 의자를 제공하자는 것이 '투쟁'을 해야하는 '사업'이 되어야했던 것이 생각날 것이다.
자,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세계화를 예찬했던 토머스 프리드먼의 <지구는 평평하다>가 맞았다는 것이다. 단, 그가 말한 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말이다. 지구촌 어디에 있건 간에 노동하고 돈 벌 기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지구가 평평해진 것이 아니다. 잘 나가는 '선진' 국가의 시민이라고 하더라도 언제든 '권리 없음'의 벌거벗은 생명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공격은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경계를 넘어 모두의 삶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아주 안 좋은 방향으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어떤 담론이 필요한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대안인가? 정책인가? 맞다. 그러나 그 대안과 정책으로 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래서 우리가 가정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환상을 더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그런 르포가 필요하다. 1980년대 지배자들이 빼앗으려고 했던 것은 '사회과학'이라는 개념이었다. 그 개념들이 인민에게 사회를 읽는 힘을 주었고, 우리 사회의 실체를 폭로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기적으로 대학가나 공단에 있던 사회과학 서점을 털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그들은 어떤 언어를 두려워하며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는가? 바로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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