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0월 13일
근래 미군 통역생에 대한 항간의 물의가 분분한 것 같다. 조선 사정을 바르게 이야기하지 않고 그릇된 說問으로 한다느니 또는 어느 당파에 이용되어 그 당파에 관한 것은 좋게 이야기하고 다른 당파에 관한 것은 좋지 않게 이야기한다느니 □□□□□한다느니 하고 갖은 아름답지 않은 풍설이 떠돌아다니는 것 같다.
이것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단순한 항간의 풍설이니 만치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적어도 통역을 담당할 만한 사람이면 고등교육을 받았을 것이요 이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오늘날 조선에 있어서 각 방향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며 식견과 인격이 결코 이 같은 좋지 못한 행동을 하기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런 풍설이 들리는 것은 쓸 데 없이 말하기를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의 풍설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지금 항간의 주목의 초점이 이를 미군 통역생에게 집중되어 있고 또 사실로 이들 통역생이 바른 통역으로 조선에 대한 정당한 해설을 갖게 하여야 모든 일이 순조롭게 또는 타당하게 운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역생들은 어떠한 태도로 이에 대하여야 할 것인가 첫째로 통역생은 한국에 협력하는 가장 중대한 임무를 가진 것을 자각하여 일거일동을 한국□□의 □□로 하여야 할 것이다. 즉 불편불당의 어느 정당이나 당파에 가담함이 없이 공명정대한 입장에서 지금 조선과 조선 민중이 직면하고 있는 생활 현실과 사회 현실 및 조선 민중의 희망 이상 등을 바르게 정확하게 소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조선 민중은 4천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수한 문화 민족이다. 불행히 일본 식민지가 되어 그 학정 밑에서 고난을 겪어 왔음으로 昔日의 면목이 없어졌지만 그 근본을 캔다면 어느 문화 민족에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민족이다. 이 긍지를 굳게 갖고 엄연한 대국민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써 조선을 소개하는 통역의 任에 當하여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위에 말한 항간의 풍설에 다소라도 혐의를 받을 만한 행동을 한다면 이는 중대한 문제다. 통역생 제씨는 학식과 인격이 겸비된 지도적 인물이니 만치 우리가 이 같은 충고를 줄 필요가 없지만 다만 노파심에서 이같은 충고를 주는 것이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13일)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미국 군정은 남한에서 영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삼았다. 미군정의 점령 통치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이다. 미군 중에 아무리 한국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더라도, 한국인을 다스리는 정치라면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공용어로 지정하고 통역 제도를 공식화해야 했다. 영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했기 때문에 통역 제도는 공식화되지 못하고 개인의 필요와 취향에 따라 채용되는 부수적 요소가 되었다.
해방 당시 영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 중에는 두 개의 큰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기독교인으로서 미국에 유학한 사람들이었고, 또 하나는 사회주의자들이었다(공산주의자 포함).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한민당 당원이나 지지자였다. 사회주의자들 중에 미국에 유학한 사람들과 영어를 통해 사상을 학습한 사람이 많았다. 어제 얘기한 박헌영도 러시아어를 못해서, 국제레닌대학에서도 주로 영어반에서 공부했다.
미군정 담당자들이 두 그룹 중 한 쪽을 배척하는 태도는 9월 8일 상륙을 앞두고 인천 앞바다의 함상에서 시작되었다. 건준에서 파견한 여운홍, 백상규와 조한용은 사흘이나 쪽배를 타고 기다렸다가 미군 함대가 도착하자 기함 카톡틴 호에 올랐다. 하지 사령관은 그들의 접견을 거절했는데, 이듬해 4월의 한 기자 회견에서 이 일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들이 "일본인들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건준이 일본인들의 괴뢰라는 주장은 한민당에서만 나온 것이니, 9월 8일 당시에 하지가 그런 생각을 했을 수가 없는 일이고, 서울 도착 후 한민당 인사들에게 세뇌당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민당 인사들이 10월 5일 구성된 군정장관 고문단을 채우면서 통역도 같은 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채용되었다. 서울 주재 미 국무성 고문관 윌리엄 랭던은 군정청 한국인 접촉의 편향성에 대한 문제 제기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군정에서 부유층을 편애하고 인기있는 좌파를 제외시킴으로써, 우리는 시초부터 비율에 맞지 않는 정도로 부유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 어떠한 인물이 있는지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실용적인 목적 때문에 우리는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채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과 그들의 친우들은 주로 돈 있는 계급 출신이며 그것은 영어가 한인들 사이에선 사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벌써부터 이것이 한국 사회 구조를 대표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이 구조의 사회적 기초를 신속히 확장시키고 있었다. (1945년 11월 26일 국무성에 보낸 서신,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김자동 옮김, 일월서각 펴냄) 205쪽에서 재인용)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희귀한 미군 장교로서 하지의 보좌관으로 특채된 조지 윌리엄스는 선교사의 아들로 충남 공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었다. 조병옥 등 한민당 인사들을 군정청 요직에 임명하는 데 윌리엄스가 큰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10월 17일 한민당 당사를 방문했을 때 윌리엄스가 송진우와 조병옥 등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들이 다 알고 있듯이, 북한에서는 공산군이 조직됐습니다. 비록 공산주의 이론은 자명하고 반공 사상이 (한국에서) 철저히 확립되었다 하더라도, 만약 이것(반공)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정세에 대처할 애국자가 한국에 없다면, 이를 철저히 다루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하지 장군이 한국을 위하여 군정과 협조할 그런 애국자의 천거를 요청했으니, 여러분이 이에 대하여 심사숙고하여 나에게 추천해 주기를 바랍니다. (커밍스 위 책 212쪽에서 재인용. 이 책 557쪽의 참고문헌 일부가 누락되어 있어서 원전은 파악하지 못했음.)
통역 정치의 상황을 강준만은 이렇게 개관했다.
미군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해방 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생존 무기는 단연코 영어였다. 영어를 할 수 있는 통역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제 시대 때 해외 유학을 했거나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영어를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대주주 집안 출신으로 해방 전엔 친일파, 해방 후엔 친미파 노선을 걷는 사람들이었다. 정당으로 보자면 바로 한민당이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정당이었는데, 하민당은 사실상 해방정국을 지배한 이른바 '통역정치'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하지의 보좌관이자 군정 인사문제조정위원인 조지 윌리엄스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극소수의 미국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한민당의 득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윌리엄스는 일제 시대에 조선에서 전도 사업을 한 선교사의 아들로 한민당 간부들과 친했다. 하지의 통역관인 이묘묵을 비롯해 군정청에 근무한 400여 명의 통역관들도 거의 대부분 한민당 세력이거나 한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한국현대사산책 1>(인물과사상사 펴냄), 88~89쪽)
당시 검사로 근무하던 선우종원도 통역관들의 행태에 관한 증언을 남겼다.
게다가 통역관들이 거짓 통역을 해서 죄가 되게끔 만들어버렸어요. '예스'라고 해야 되는 걸 '노'라 하고 말이야. 그런 식으로 유죄를 만들어서 형무소로 보내는 걸 우리가 봤어요. 그런데 검찰 입장에서는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일이거든. 우리 같은 젊은 검사들이 정의감에 불타 통역관을 잡아넣었어요.
(…) 그렇게 하니까 구속된 놈들이 형무소에 가서 자기를 잡아놓은 검사가 공산주의자니 뭐니 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다녔어요. 아마 그때 내가 실언을 좀 했을 거예요. 나도 26살밖에 안 됐을 테니까, 이를테면 이런 얘기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이 자식아, 우리가 일본 놈한테 억눌려 산 것만 해도 분한데, 상전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제 미국 놈한테 붙어서 한국 사람을 괴롭히냐?" 그러니까 그걸 꼬투리 잡아서 '검사가 반미주의자다' 떠들고 다니는 거죠. 재판 끝나면 선우 아무개 검사 구속한다, 몇 년 징역을 보내겠다, 그런 이야기까지 돌았어요. (<8·15의 기억: 해방 공간의 풍경, 40인의 역사 체험>(한길사 펴냄) 116~117쪽)
권력을 끼고 도니 부패 또한 없을 수 없다.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동용하는 이런 증언을 남겼다.
나무를 실어 나르는 허 씨라는 업자가 있었어요. 내가 미군 중위하고 나무를 싣고 차를 열 대씩 가지고 왔다 갔다 하니까 하루는 이 미군 중위를 초대했어요. 어디에 초대를 했는가 하면 지금의 명동인데 그곳에 장춘각이라는 기생집이 있었어요. 거기로 데려가더라고요. 난 기생집이라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장가도 안 간 총각이었으니까 아무것도 몰랐죠. 허 씨는 가방에 돈을 가득 넣어 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 순 장사꾼이죠. 미국 사람을 통해 어떻게 들여온 나무를 차를 통해 다른 곳으로 실어 나르고, 자세한 건 모르지만 수완이 대단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일개 중위를 모시고 다니는 나이어린 통역관도 뜻하지 않은 돈벼락을 맞을 지경이니 영관급 장교들은 그야말로 황제가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전숙희의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 베어드 대령이 '여간첩' 이수임과 함께 살던 '옥인동 19번지'의 대궐 같은 집 얘기가 나오는데, 프레시안 주소가 옥인동 19-29번지로 되어 있어서 물어보니 그 빌딩 터를 포함하는 넓은 대지 위의 엄청난 저택이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식민지 체제로부터 많은 달갑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았는데, '부패'에 관해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역할이 미군정만큼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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