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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의대에도 체벌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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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의대에도 체벌이 있었을까?

[근대 의료의 풍경·65] 의학교

의학교는 일요일에는 수업이 없었다. 일요일이 학교 휴업일로 정해진 것은 1895년 9월 7일(음력 7월 19일) 소학교령(칙령 제145호)이 제정되면서부터이다. 의학교의 하루 수업 시간이 5시간(체조시간은 제외하고)이었으니 1주일에 30시간으로 지금과 큰 차이는 없었다. (요즈음 의과대학의 주당 수업 시간은 대체로 하루 35시간(7시간×5일)쯤 된다.

그밖의 휴일로는 5대 국경일, 한식 전날과 당일, 추석 전날과 당일이 있었다. 당시 5대 국경일은 황제 고종의 생일(萬壽聖節, 음력 7월 25일), 황태자의 생일(千秋慶節, 음력 2월 8일),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날(開國紀元節, 음력 7월 16일), 고종의 국왕 즉위일(興慶節, 음력 12월 13일), 고종의 황제 등극일(繼天紀元節, 음력 9월17일)이었다.

방학은 60일 이내의 여름 방학(해마다 절기를 보아 교장이 방학 날짜를 정해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았다)과 12월 26일부터 1월 5일까지의 겨울 방학이 있었다. 하지만 설 명절로 음력 12월 21일부터 1월 20일까지 쉬었으므로 겨울 방학은 사실상 40일가량 되는 셈이었다.

▲ <황성신문> 1901년 4월 5일자. 의학교 "학기 시험"에서 우등을 한 6명에게 상품을 주었다는 기사이다. 여기에서 일급 학원(一級學員)은 2학년 학생, 이급 학원(二級學員)은 1학년 학생을 지칭하는 것이다. 기사에 열거된 우등생 가운데 홍종훈(洪鍾熏)은 제2회 졸업생 홍종욱(洪鍾旭)의 오기로 보이며, 최규수(崔奎綬)는 중도에 의학교를 그만 두고 1907년 무렵부터 탁지부 관리가 되었다. 중퇴한 최규수에게 <의학교 규칙>의 처벌 조항을 적용하여 몇 해 동안 취업을 금지했는지는 알 수 없다. ⓒ프레시안
학급은 학생 수와 학력에 따라 편성한다고 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과 실행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우열반을 둔다는 뜻으로 보인다. 중등학교 과정이 확립되기 전이라 학생들 사이에 학력 차이가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밖에 면학 조치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월말 시험에 연속하여 세 차례 우등한 학생과 학기 시험 우등생에게는 포장을 부여하고, 학년 시험 우등생에게는 특별한 상을 시상하도록 했다. 그리고 월말 시험 우등생은 학급 내에 승좌(陞座)한다는 규정으로 보아, 성적순으로 좌석을 배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요즈음 기준으로는 "학생 인권 조례"에 위배되는 조치였다. 하지만 체벌 규정이 없었던 것은 오늘날보다 오히려 나았던 점이었을까? ("시험 못 봐도 맞았었는데…", 학생 인권 조례 시범학교 가보니. <노컷 뉴스> 2010년 10월 7일자.)

<의학교 규칙>에 의하면 "졸업장을 부여한 후에 내부대신이 의술개업면허장을 부여한다"(제6관 제9조)라고 되어 있다. 의학 교육은 학부 소관이지만 면허 등 의사의 관리는 내부에서 관장했기 때문이다. 1897년 하반기부터 관립 교육 기관들은 학부에 소속하게 되었고 사립학교들도 학부에서 관할했다. 중요한 교육 기관 중 학부에 속하지 않았던 것으로는 "법관양성소"가 있었다. 1909년 10월 법학교로 개편되어 학부에 소속되기 전까지 법관양성소는 법부(法部)에서 관할했다. 이러한 점은 "사법관으로 채용할 만한 자격(자)을 양성한다"라는 <법관양성소 규정>(1895년 4월 19일 제정) 제1조와 더불어 법관양성소의 성격이 법과대학보다 사법연수원에 더 가까웠다는 주장의 한 가지 근거가 되었다.

▲ 제1회 졸업생 김교준(金敎準, 1884~1965년)이 졸업 때 받은 우등 증서(<대한의학협회지> 제5권 제10호, 1962년). "제5호"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김교준은 5등으로 졸업했을 것이다. 동기생 가운데 제일 어렸던(열다섯 살에 입학해서 열여덟에 졸업했다) 김교준은 졸업 후 의학교 교관(교수)을 지냈으며, 스승 김익남이 1937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의 충직한 동반자였다. ⓒ프레시안

내부는 1900년 1월 2일자로 <의사 규칙(醫士規則)>을 제정하여 "내부 시험을 거쳐 인가를 받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의업(醫業)을 행하지 못하도록"(제2조) 했다. 종두 의사에게 한정되었던 면허 제도를 모든 의사에게 확대하는 조치였다. 하지만 <의학교 규칙>에 의해 의학교 졸업생들은 특혜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시대의 이른바 "총독부 지정 학교"(총독부의원 의학강습소, 경성의학전문학교, 1923년 이후의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 출신들은 의사시험을 치루지 않고 면허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 경우라고 생각된다.

▲ 최신경성전도(1907년). (A) 의학교(1번)를 관할하는 학부(學部). (B) 광제원(2번)이 소속된 내부(內部). 학부는 현재의 주한 미국 대사관 자리에 있었고, 내부는 오늘날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위치에 있었다. ⓒ프레시안

▲ <의사 규칙(醫士規則)>(내부령 제27호, 1900년 1월 2일 제정). 내부령 제27호를 보통 "의사 규칙"이라고 하지만 이 법령에는 "약제사 규칙" "약종상 규칙" "약품순시(巡視) 규칙"도 포함되어 있다. 의료인의 자격을 종합적으로 규율한 법령인 것이다. ⓒ프레시안

일각에서는 "의술개업면허장"의 실물이 발견된 것이 없으므로 의학교 졸업생들이 면허를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국가가 법령으로 의사 자격을 보장한 것 이상의 근거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리고 이들은 의학교 교관, 군의관 등 국가의 관리로 임용되었고 개업도 했다. 의사로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은 바가 없었다. 즉 <의사규칙> 제2조에 저촉되는 바가 없었던 것이다.

▲ <의학교 규칙> 중 공·사립 의학교 관련 규정.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공·사립 의학교도 반드시 정부의 인가를 받아야만 했다. 그 오른쪽 제6관 제9조에는 의학교 졸업생에게 내부대신이 의술개업면허장을 준다는 조항이 적혀 있다. ⓒ프레시안

<의학교 규칙>은 기본적으로 1899년에 정부가 세운 관립 의학교에 관련된 사항을 규정한 것이지만, 차후에 공사립 의학교가 세워질 것에 대비하여 다음과 같은 조항을 부칙으로 마련했다. <종두의양성소 규정>(1895년)이 원래 정부가 만들 관립 기관을 염두에 두고 제정되었음에도 사립 기관을 규율하는 데까지 확대 적용되었던 것에 비해, <의학교 규칙>은 제정 단계에서부터 공사립 의학 교육 기관까지 모두 고려했다는 점에서 법 체계상으로도 진일보한 것이었다.

제1조 공사립 의학교를 설치함도 종의(從宜)하야 허(許)함이라. 공립은 관민이 경비를 공동하야 설립이요 사립은 사인(私人)이 경비를 지변(支辨)하야 설립에 계(係)한 자(者)를 칭함이라.
제2조 공사립 의학교는 지방관과 관찰사를 경(經)하야 학부대신의 인가를 승(承)함이라.
제3조 공사립 의학교에 학과 및 정도와 기타 규칙은 학부에서 정하고 교과서도 학부의 검정을 경(經)함이라.


▲ 진고개에 있던 후루시로의 찬화병원. 부설 종두의양성소는 한국 정부의 인가를 받고 모두 81명의 종두의사를 배출했다. ⓒ프레시안
<의학교 규칙>의 이 규정에 따라 공립과 사립 의학교는 반드시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인가뿐만 아니라 학과 등에 관한 규칙도 학부에서 정하고 교과서도 학부의 검정을 받아야만 했다. 정부의 간섭이 지나치다 할 정도였다. 따라서 1908년 <사립학교령>이 제정될 때까지 사립학교에 관한 법률이 없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 규정에 따라 설립된 공사립 의학교는 1908년까지 한 군데도 없었다. 설립을 신청했다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1900년말 김인제와 김원일 등이 공주군에 의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지만(제44회) 설립 신청 단계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밖에도 몇몇 병원에서 의학 교육을 하고 있었지만 법령에 따라 의학교를 설립한 곳은 없었다.

▲ 주한 일본 공사 가토가 1899년 4월 7일자로 본국 외무대신 아오키(靑木固藏)에게 보고한 기밀 제22호 "경성학당 연보(年報) 진달(進達) 및 보호금(保護金) 건." "경성학당이 드디어 이 나라 정부의 인가 학교가 되었으며 아울러 연액 일금 360원의 보조금도 받기에 이르렀다(遂ニ當國政府ノ認可學校トナリ尙ホ年額金三百六十圓ノ補助金ヲ得ルニ至リタルハ)"라고 보고했다. ⓒ프레시안
외국인과 외국단체가 세운 사립학교는 한국 정부의 인가를 받지 않아도 되었을까? 후루시로가 세운 사립 종두의양성소도 정부(처음에는 내부, 1897년 하반기에는 학부)의 인가를 받았다(제47회). 1896년 4월 "대일본 해외교육회"가 세운 경성학당(京城學堂, 제48회)도 1899년 정부의 인가를 받고 보조금도 받았다.

1899년 4월 7일 한국 주재 일본 공사 가토(加藤增雄)는 본국 정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경성학당의 작년도 사업 상황은 그 보고서와 같이 매우 양호하며 내외 조야의 동정을 받아 점차 융성을 거듭하여 드디어 이 나라(한국) 정부의 인가 학교가 되었으며 아울러 연액(年額) 일금 360원의 보조금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듯 외국인이 세운 사립학교도 자격을 갖춘 경우 한국 정부의 인가를 받았다.

외국인이 세웠든 내국인이 세웠든 인가를 받지 못한 사립학교는 보조금과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하고 법으로 보장하는 권리를 누릴 수 없었지만, 그러한 법외(法外) 사립학교를 폐쇄하거나 처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1908년 8월 26일 일제의 간섭으로 <사립학교령>(칙령 제62호)이 제정된 뒤로는 모든 사립학교를 새로 인가받도록 했으며, 이때 인가받지 못한 사립학교는 퇴출될 수밖에 없었다. <사립학교령>은 한국인들에 의한 교육 사업을 장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억제하고 장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률이었기 때문이었다.

1907년 의학교를 폐지하는 등 관립 교육 기관을 장악한 일제는 이어서 사립 교육 기관에도 침략의 비수를 꽂았던 것이다.

▲ <황성신문> 1900년 1월 26일자. 학부가 관할하는 관립학교와 사립학교가 전국에 92개교가 있으며, 미국감리교에서 운영하는 배재학당 등 모든 사립학교에 한 달에 30원씩을 지원하고 있음을 보도했다. 경성학당이 1년에 360원의 보조금을 받았다는 바로 위의 일본 공사의 보고와 부합되는 기사이다. 이 기사에는 경성학당에 대한 언급이 따로 없는데, 경성학당이 주로 일본어를 가르쳤으므로 외국어학교에 포함시켰는지 모른다. 학부가 학교 경비로 지출한 총 액수가 8만여 원이었던 것은 관립학교에는 연(年) 360원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들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직접 관립학교를 운영하고 또 사립학교를 지원하는 방법을 통해 교육을 진흥시키려 노력했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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