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그 많은 '을'들은 왜 모두 바보가 되었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그 많은 '을'들은 왜 모두 바보가 되었나?

[시민정치시평] 단결권과 집단적 교섭권이 중요한 이유

"본 계약의 해석에 다툼이 있을 경우 갑의 해석에 따른다."

농심(갑)과 특판점(을) 사이에 체결된 계약서의 말미에 나오는 조항이다. 이 조항이 유효하다면 불공정행위에 대한 공정위 처벌을 포함해 갑이 무슨 짓을 해도 사실상 제재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한국타이어의 가맹사업인 T-Station 사업본부(갑)와 서울 송파 가맹점주(을)가 체결한 가맹계약서에는 갑이 송파점 인근에 추가의 가맹점을 낼 경우 을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하지만 을은 자신의 영업권이 보호되는 지역 범위가 공란으로 남겨진 계약에 서명했다. 그리고 2006년 1월 가맹계약 체결 이후 2012년 5월까지 송파점 인근 약 2Km 이내에 7개의 T-Station 가맹점이 새로 들어섰다.

어째서 이런 터무니없는 계약이 체결되고 유지되는 것일까?

계약이 국가와 시장의 조직·운용·재생산의 기초가 된 것은 근대부터다. 국가 통치의 권원(權原)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왕권(왕권신수설)에서 국가가 시민과 체결한 계약(사회계약론)으로 이전되었다. 장원(莊園)을 공동체의 터전으로 하는 봉건적 신분관계 대신, 시장에서는 참여자들의 사이의 모든 관계가 크든 작든,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경제적 급부와 반대급부를 내용으로 하는 계약 관계가 되었다.

국가 통치의 원리로서든 시장의 토대로서든, 계약이라는 말 자체에 내재된 선험적 의미는 계약 당사자의 '자유'다. 역사적 실재가 아닌 이론적 구성물에 불과한 사회계약론이 시민적 저항의 토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국가를 대표하는) 정부의 계약불이행에 대해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시민의 자유가 이 이론의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계약은 그 효력이 제한되거나 부인되는 법리를 갖추고 있다. 시장 참여자들 사이의 계약이 기본적으로 '자유계약'이라는 의미다.

을들은 왜 바보가 되었을까?

이 '자유계약'이야말로 을들의 분노와 저항을 상대하는 갑들의 모든 항변에 흐르는 기조다.

참여연대는 지난 4월 CJ대한통운(갑)을 화물운송 운전자들(을)에 대한 불공정행위로 공정위에 신고했다. 갑은 '회사가 소유한' 화물차량의 취득 가격의 일부를 화물운송 계약을 맺은 을이 받아야 할 운임에서 '도둑질'하고 있다. 화물운송을 주선한 대가로 갑이 취하는 수수료는 전국 각 지역의 지사별로 2배 이상 차이가 난다. 갑은 을의 운임에서 공제하는 항목과 그 금액의 크기를 엿장수 마음대로 넣고 빼고 줄이고 늘린다.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한 갑 회사 관계자의 반박 중 하나는 "을이 스스로 원해서 체결한 계약"이라는 것이다.

현대차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철탑 농성 중에 '사내하청 노동자, 과연 사회적 약자인가'라는 비공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를 받아 보도한 한 언론 기사는 "현대차 협력사 근로자들은 사내하청 협력업체에 입사하는 게 꿈"이라는 사내하청업체 사장의 발언을 전했다.

이들의 항변에 흐르는 기조로서 자유계약의 논리를 수용한다면, '어째서 이런 터무니없는 계약이 체결되고 유지되는 것일까?'에 대해 즉각 떠오르는 답은 하나다. 그것은 거의 대부분의 을들이 바보라는 것이다. 사실 위에 언급된 계약 조항을 보고 있노라면 누가 을들을 바보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을들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관의 수준에서라도 자유계약의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직관만으로는 부족하다. 갑을관계를 지배하는 얄팍한 자유계약의 논리를 깨기 위해서는, 자유계약에서의 '자유'의 의미에 대한 깊은 성찰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나아가는 실마리를 얻기 위해 처음 던졌던 질문을 살짝 바꿔야 한다. '을들은 왜 바보가 되었을까?'

그 사연을 추적하기 위한 하나의 예로, 화물운전자(을)가 화물운송사업자(갑)와 지입제 화물운송 계약이나 차량관리 위수탁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어떤 처지에 있는지 살펴보자.

을은 화물차량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번호판으로 불리는 영업권이 없으면 독립적인 화물운송 영업을 할 수 없다. 번호판을 얻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그 조건에는 심지어 화물운송 사업자의 동의도 들어 있다. 또한 그렇게 천상의 별을 딴 소수의 을도 갑으로부터 일감을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적정 소득을 얻을 수 없는 지상에 발을 딛고 있음을 안다. 개인사업자인 을은 갑과 집단적 단체교섭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공정위는 뚜렷한 근거도 없이 화물운전자와 화물운송 사업자 사이의 계약 관계에는 공정거래법보다는 운전자에게 유리한 하도급법을 적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해 왔다.

을이 처한 구체적 상황은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을의 밥줄이 걸린 길목 구석구석까지 대기업이 장악한 시장, 국가기관의 대기업 편들기, 공적 규제의 공백, 자본에 종속된 언론과 지식 환경, 무너진 노동권 보호의 울타리와 이로 인한 자영업의 과다 경쟁 등은 거의 모든 을들이 갑과 계약을 체결하기 전에 주어진 공통의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대리점, 특판점, 편의점, 백화점과 대형마트의 납품업체, 하청업체, 화물 및 택배노동자 등 모든 을들이 터무니없는 계약을 체결하고 유지하는, 즉 바보가 된 사연이다.

자유 계약의 외부에 있는 갑을관계의 실체적 진실

자본주의 발전기에 자유주의자들이 아동 노동을 옹호한 주된 논리가 바로 자유계약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자유의 의미에 대한 마르크스의 신랄한 비판은 당대의 지적 양심에 호소하는 바가 컸고, 참혹했던 아동 노동의 근절에 기여했다. 최근 잇따른 을들의 자살은 을들에게 주어진 자유가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양자택일로 좁혀지고 있는 슬픈 현실을 반영한다. 이 자유계약 사회에서 갑의 횡포를 근절하기 위한 노력이 자유의 의미에 대한 성찰에 기초해야 하는 이유다.

이런 성찰의 실천적 함의는 결코 작지 않다.

자유가 '자기 발로 걸어가 자기 손으로 계약에 서명하는 행위'라는 극히 제한된 의미를 벗어나 계약을 둘러싼 갑과 을의 권력관계까지 고려한 의미로 확장된다면, 필요한 수준의 공적 규제가 들어설 여지도 그만큼 넓어질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사안으로, 집단으로서 단결된 힘을 보유하지 못할 때 을의 자유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갑을관계를 재정립하는 제도 설계에 반영되어야 한다. 10여 년 전만 해도 갑 회사의 노동자였을 많은 을들이 개인사업자로 등장하는 배경, 남양유업이나 CJ대한통운이 대리점협의회나 택배파업 비상대책위원회와의 공개적 집단교섭을 한사코 거부하려했던 이유 등은 갑을관계 제도개혁의 핵심이 을의 단결권과 집단적 교섭권 보장임을 역설한다.

지난 총선과 대선 시기의 경제민주화의 주요 의제였던 재벌·대기업의 소유지배구조의 문제와 이와 맞물린 경제력 집중의 문제를 다시 사회적 의제로 불러와야 한다. 순환출자, 금산분리, 부당내부거래 등을 규제하는 제도적 틀이 갑에게 크게 유리하게 짜인 결과가 을의 처지를 계속 궁색하게 만들고 있다. 을의 분노가 그렇게 갑의 횡포의 근원과 재생산 구조에 대한 깊은 이해로 나갈 수 있다면, 을의 자유는 딱 그 발걸음만큼 전진할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