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청에서는 5일부로 각계 명망 있는 조선인 지도자를 군정장관의 고문관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번에 기용된 고문은 다음의 11氏이다.
金性洙(敎育家) 全用淳(實業家) 金東元(實業家) 李用卨(醫師) 吳泳秀(銀行家) 宋鎭禹(政治家) 金用茂(辯護士) 姜柄順(辯護士) 尹基益(鑛業家) 呂運亨(政治家) 曺晩植(政治愛國家) 前記 11氏 中 曺晩植은 당일 불참하였는데 상경하는 대로 任官될 터이며 무기명 투표에 의하여 金性洙가 위원장에 決定되었다.
(<자유신문>, 1945년 10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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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에서 건국에 이르는 3년 '공간'의 정치 상황에서 언제나 첫 번째로 주목되는 것이 '분단'이다. 그러나 '점령'에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실질적 의미가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점령의 상황이 아니라 민족의 자주성이 존중받는 상황이었다면 분단 문제만 하더라도 극복의 길이 더 활발하게 모색되었을 것이고, 분단은 짧은 일시적 상황으로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점령의 상황이 "항복 접수라는 실용적 목적을 위한" 것으로 출발한 분단을 강고하게 만든 것이다.
분단을 고착화시킨 문제가 아니라도, 겨우 벗어난 일본 통치가 점령군의 통치로 대치되는 데 대한 민심이 좋았을 리 없다. 북한에서 소련군이 인민위원회를 후원함으로써 '점령 통치'의 인상을 약화시키려 노력한 데 대비해 남한에서 '유일한 정부'를 자처하는 미군정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군정은 민심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통치 기구에서 일본인을 미군 장교와 한국인으로 대치했다. 그러나 미군 장교들은 직책을 수행할 능력이 없어서 고문으로 임명된 일본인 전임자들에게 의지했다. 새로 임명된 한국인들도 거의가 일본인 밑에서 하위직에 종사하다가 승진되어 역량이 부족한 사람도 많고 민족의식이 약한 사람도 많았다.
내 아버지는 금융조합의 지방조합 이사로 있다가 중앙회 과장으로 승진되었는데, 사령장을 받던 12월 5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하상용 씨를 통해서 신 회장에게서 사령을 받았다. 구 회장 이하 일인 간부 환시 하에서 다시 미인의 사령을 받게 되니 얼굴에 모닥불을 퍼붓는 것 같다. 저놈들이 옛날은 우리들에게 와서 머리를 굽신거리더니 이제는 또 미인의 앞에 같은 태도로 나갈 것이다 하고 일인들이 속으로 비웃을 걸 생각하니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자꾸만 후회스럽다. (김성칠, <역사 앞에서>(창비 펴냄), 22~23쪽)
아버지는 몇 달 안 되어 금융조합을 떠났다. 금융계의 중견 간부직을 그만두고 서울대 사학과에 조수(조교)로 들어간 것을 보면 정말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다. 떠나는 결심을 하는 장면은 이듬해 3월 19일자 일기에 적혀 있다.
장덕수 씨 등 민주의원 측이 하상용, 임흥식 씨 등을 초청해서 공작한 결과 과장회의에서 중역들이 우익과 결탁하기를 선포하였을 때 나는 그 비(非)를 지적하고 두 시간 동안 고군분투하였다. 다시 3월 9일 오후 인민비판사 주최로 좌익 편에서 금융조합 문제를 논의하고 민전, 전평, 전농, 해방일보 등 좌익의 논객들이 금융조합에 공격의 일제 화살을 보내왔을 때 나는 그들의 공식주의적인 관념론을 상대로 세 시간 동안 항변하였다.
그러나 금융조합의 우익 편향은 이제 결정적인 사실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나는 이 기관을 물러나야겠다. 나는 현하의 조선에 있어서 좌익의 경거망동을 싫어한다. 그러나 우익의 혼란도 보기 숭하다. (같은 책, 43쪽)
한국인 고문단 임명에도 한국인의 참여를 선전하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북한에서 소련군의 조치와 비교하면 여러 모로 빈약한 조치였다. 능동적 역할이 없는 자문직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구성도 구색을 맞추기 위해 넣은 여운형과 조만식을 제외하면 모두 미군정에 순종적인 한민당 사람들이었다. 조만식은 서울에 오지도 않았고, 여운형도 곧 고문직을 사퇴해서 미군정 고문단은 한민당 군정청 지부처럼 되고 말았다.
진주한 지 한 달이 거의 지나서야 허울만의 고문단이나마 임명한 사실도 사정을 말해준다. 미군정 담당자들은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채로 들어왔다. 한국인을 정치에 참여시킬 의사도 없었다. 한국이 어떤 변화를 필요로 하는지 아무 생각도 없이 일본을 대신해서 남한을 통치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들어왔다. 전쟁터에서의 고생을 점령자로서의 호강으로 보상받는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 사령관이 진주 전부터 일본인들에게 건준에 대한 비방을 듣고 있어서 건준을 적대시했다고 하는데, 그런 비방을 쉽게 곧이들은 것은 권력의 독점욕 때문이었을 것이다. 건준을 파트너로 인정한다면 대등한 입장에서 긴장된 관계를 풀어나가야 한다. 아무 정치력이 없는 미군 입장에서는 그런 긴장된 관계가 부담스럽고 귀찮고 싫었을 것이 당연하다. 미군의 권력을 깍듯이 받들어주는 일본인 전임자들이 데리고 놀기에 편안했고, 수십 년간 한국인을 통치해 온 그들의 노하우를 전수받는 것이 임무 수행을 위해 가장 쉽고 편한 길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조만간 돌아가야 했다. 한국인과 놀지 않을 수 없는데, 건준처럼 독자적 권위를 주장하는 집단은 싫었다. 한국인 중에서도 일본인처럼 미군정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상전으로 받드는 사람들이 좋았다. 한 달 지내며 어울려 보니 영어도 잘하고 태도도 좋은 사람들이 한민당에 많았다. 그래서 한민당 위주로 고문단을 짜게 된 것이었다.
아놀드 군정장관과 하지 사령관은 고문단 임명 전날에야 여운형을 처음으로 만났다. 며칠 후에 나올 아놀드의 건준 비난을 보면 4일에도 여운형을 만나고 싶어서 만난 게 아니라 억지로 만난 것 같다. 실권 없는 고문단, 그것도 한민당이 판을 치는 고문단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呂運亨은 미군정 당국의 초청을 받아 4일 오전 9時에 비로소 아놀드 군정장관 同 오후 2時에 하지 중장과의 첫 회견을 하였다. 呂運亨은 이미 미군이 상륙 준비로 인천 부근 해상에 있을 때에 白象奎, 呂運弘, 崔謹愚 3氏를 사절로 보내어 하지 중장에 친서를 보냈으나 여하한 곡절인지 이 친서가 수교되지 않고 또한 그 후 하지 중장이 진주한 이래로 呂는 일본인과 결탁하였다는 허무맹랑한 악질의 모략으로 된 중상으로 지금까지 회견이 늦어졌다는데 4日에야 미군은 모든 오해를 풀고 건준위원장의 자격으로 呂運亨에 회견을 요청하여 식량 기타 생산업 운영에 대한 협력을 요망하는 제1차 회담을 하였다 한다.
(<자유신문>, 1945년 10월 6일)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미군정에서 하지와 아놀드의 역할을 놓고 "어리석은 놈들"이라는 비판이 당시에도 많았고 지금도 많다. 나는 이 비판이 아주 부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게으른 놈들"이라는 데 있었다고 본다. 군정장관 고문단 임명은 이 문제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례였다.
점령 통치 방침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점령 통치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려면 고문단 구성을 그렇게 '통역 정치' 수준에 묶어놓을 일이 아니었다. 명색이 '통치'를 한다면서 긴장된 관계를 그렇게 싫어하다니, 정말 게으른 놈들이었다. 그 게으름으로 인해 자기들도 나중에 꽤나 고생을 하게 되지만, 한국인이 입은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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