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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 언제까지 '식민지 노예'로 살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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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 언제까지 '식민지 노예'로 살 텐가!

[프레시안 books] 월터 미뇰로의 <라틴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

G20 정상회의, 우리에게 무엇인가?

2010년 11월 11일부터 12일까지 이틀간에 걸쳐 이 나라에서는 G20 정상 회의가 열린다. 이명박 정권은 이를 한국의 선진국 진입에 대한 국제적 인정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이만큼 우리가 잘나가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회의가 열린 곳에서 반드시 대대적인 반대시위와 집회가 조직되어 온 것은 말하지 않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 질서 재편에 봉사하는 이 회의의 본질은 이로써 이 나라 대중들에게는 무지의 영역으로 남는다. 미국이 중심이 된 서구 제국주의 체제의 동요로 인해 중간 지점에 놓인 국가들을 포섭, 자본주의의 세계적 주도권을 안정화시키려는 목적에 대한 논의는 이로써 실종되게 되는 것이다. 언론은 환율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헤게모니 격돌을 언급하고 있으나 정작 관심 가져야 할 바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권리와 안전이다. 그런데 이들의 삶의 형편과 그 권리는 논의 구조에서 실종되어 있다.

지난해 런던에서 개최되었던 G20 정상 회의에는 무려 160여 개 NGO들의 연합 시위와 반G20 회의 조직을 통해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가 가는 길이 과연 모두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 신랄하게 물었다. 투기적 금융 자본에 대한 일정한 제동을 걸자는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나오기만 하고 정작 실현되지 못하는 상황,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 사이의 극심한 빈부 격차에 놓여 있는 여전한 식민주의적 현실을 이들은 지적했다.

그런 와중에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한 명이 곤봉에 맞아 숨졌다. 런던 경찰은 이를 은폐하려다가 <가디안>의 사진 자료로 더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자본의 계급 권력을 옹호하는 국가의 경찰 기능에 의해 타살된 한 청년의 희생은 오늘날 세계가 놓여 있는 모순의 실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자본의 악마적 탐욕의 구조는 여러 형태로 자신의 겉모습을 변화시켜오면서 지속되고 있으며, 민초들은 발언권을 상실당하고 있다.

월터 미뇰로가 가하는 도전

▲ <라틴 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월터 미뇰로 지음, 김은중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따라서 한국에서 열리는 G20 정상 회의는 우리에게 선진국 진입 잔치가 아니라 자본의 세계적 지배 구조를 명확히 인식하고 이를 타개하면서 우리의 현실이 절실하게 요구하는 바를 정면으로 내거는 기회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선진화"라는 구호에 매몰된 채 우리사회에서 삶의 권리가 배제되고 누락된 현실의 뿌리를 제대로 캐내지 못하며, 누가 이를 극복할 중심에 서야 하는지도 명백하게 깨닫지 못하고 말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월터 미뇰로의 <라틴아메리카, 만들어진 대륙(The Idea of Latin America)>를 읽는 것은 세계의 현재 질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사유 방식에 중대한 파열을 일으키면서 인식의 충격적인 전환을 가져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스페인 문학 연구로 문장의 깊이를 연마해온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김은중의 빈틈없이 유려한 번역은 우리에게 읽는 즐거움과 사회과학적 사유의 명징성을 체험하게 해 줄 것이다.

이 책은 서구 자본주의의 근대성과 식민지성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역사적 관찰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서구가 시동을 건 근대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안에 구조적으로 내포된 식민지성을 그대로 수용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우리 내부에도 끊임없이 이 식민지성을 확대 심화시키는 체제를 지속시키게 될 뿐이라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런 주장은 종속론이나 제국주의론에 대한 이해가 있는 이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듯하지만, 월터 미뇰로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것은 이로 말미암아 우리 내부에 누군가를 누락, 배제시키고 이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의식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는 점을 치밀하게 파헤친 점이다.

그로 말미암아 정작 그 요구가 채워져야 할 이들은 지속적으로 주변부화되고, 현실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자들은 서구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착취 구조에 연결된 근대성 논리를 지원하고 이를 새로운 환경에서 계속 다른 이름으로 내걸고 자신들의 특권을 거머쥐는 자들이 된다.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

미뇰로의 어법에 따르면 근대라는 역사적 지점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가 작동했으며 따라서 이를 분명하게 응시하고 이것의 지속적인 유지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이를 해체하는 "탈식민지적 전환"이 있지 않고서는 새로운 대안 체제를 상상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아메리카"라는 개념은 서구 제국주의의 대륙 약탈에 따른 기획의 결과이며, 여기에 "라틴"이 붙었을 때 이는 앵글로색슨이 지배하는 북아메리카와는 별도의 영토로 확정하려 했던 남미 유럽계 후손들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이 지역 원주민들을 비롯한 비(非) 유럽계 인종과 주민들을 억압, 배제하는 식민지성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착취와 폭력의 결합을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이러한 대륙에 대한 유럽적 명명(命名)은 이 대륙의 주체가 되어야 할 원주민들을 비롯한 노예 체제의 후손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인식의 식민지 권력 매트릭스를 정당화하고 유지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즉, 이는 이 대륙을 서구의 자원으로 보게 하며 이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이들 서구의 자본주의체제에 동원될 노동력 내지는 소모품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어머니 대지"라는 뜻을 가진 '파차쿠타' 등의 개념이 라틴아메리카 내부에서 거론되고 주장되는 것은 식민적 상처를 극복하고 이들의 주체적인 목소리와 요구를 담아내는 중대한 출발일 수 있다. 미뇰로의 관점을 중심에 놓고 보자면 기존의 좌파가 가지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인식도 수정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폭력적인 정치경제 상황을 겪은 라틴아메리카의 최근 진보적 변화를 놓고 서구 진보 세력이 라틴아메리카의 좌파 권력이라고 부르거나 볼리비아의 원주민 출신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의 대통령 당선을 라틴아메리카 좌파 노선에 대한 합류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는 라틴아메리카 내부의 탈식민적 전환과 그간 배제되어왔던 원주민 주체의 새로운 세계관, 그리고 대안의 선택이라는 차원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원주민 출신의 에보 모랄레스의 존재는 북미주 원주민들이 거의 제거되다시피 한 기반 위에 이루어진 미국의 흑백 혼혈 오바마의 당선과는 전혀 역사적 궤를 달리하는 사건인 것이다.

원주민의 정체성과 그 발언권의 회복

그래서 미뇰로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이냐시오 라모네가 에보 모랄라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시선을 이렇게 비판한다.

"라모네는 모랄레스의 당선을 원주민 운동이 라틴아메리카 좌파에 합류하는 좌파로의 전환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상 그 반대였다. 다시 말해, 모랄레스의 집권은 혁명의 주도권이 오로지 마르크스주의 좌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좌파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유럽 중심적 좌파가 스스로를 지역화하고 이를 통해 재기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이렇게 좌든 우든 서구 자본주의와 그 대항 논리가 유포해온 인식에서 실종된 원주민 주체성에 주목하는 것이야말로 탈식민적 전환의 중대한 동력이며 이를 주목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인 이들의 요구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대안의 실현이 가능해질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

미뇰로의 이러한 인식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정리된 프란츠 파농의 인식, 즉 서구 식민주의 체제 아래 배제되고 그 원초적 정체성이 부인되어 왔던 존재들의 발언권 회복과 탈식민화의 움직임에 맞닿아있음을 알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권력 집중의 혐의를 받고 있는 차베스와는 또 구별되는 에보 모랄레스의 의미를 주목하게 된다.

"에보 모랄레스 정부는 행정, 경제, 교육 분야에서 탈식민성 기획을 확실하고 공개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주체성을 탈식민화하는 것 혹은 존재를 탈식민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이 생산할수록 (남들보다) 더 잘 살 수 있다는 철학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식민적 사유이다. (…) 에보 모랄레스가 대통령에 선출된 것은 지정학적 게임의 법칙이 탈식민적 전환의 시기에 들어섰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러한 전환은 라틴아메리카 '이후'를 예시하는 사건이다."

역자인 김은중이 지적하고 있다시피 "책 전체에서 미뇰로가 누누이 강조하듯이 탈식민적 선택은 논쟁의 내용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논쟁의 틀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며, 자유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 기획으로부터 벗어나(de-link) 지역의 필요성을 재설정하는 (re-link) 작업을 통해 또-다른 패러다임을 건설하는 것이다. (…) 길은 이미 정해졌다. 탈식민적 선택은 좌우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회복이며, 전 지구적 수준의 윤리적 해방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미 1980년대 중반에 신자유주의의 몰락을 내다보면서 서구 자본주의의 근대성 논리가 숨기고 있는 식민성의 논리로부터 "결별(delinking)"할 것을 요구한 사미르 아민의 주장이 확대 심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 해방을 위한 미래의 보편적 흐름

사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식민적 상처()를 정리해낸 에두아루도 갈레노라든가 이슬람권에 대한 인식 재구성()을 시도한 마샬 호지슨, 아프리카의 문명사적 목소리를 파고 들어간 마틴 버널()등을 비롯한 학문적 운동의 보편적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또한 1972년 가이아나의 지식인 월터 로드니가 <유럽은 어떻게 해서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막았는가?(How Europe underdeveloped Africa?)>를 내놓았을 때 주었던 충격에서 예상되었던 궤도이다. 이제 문제는 이를 우리 자신의 사유 방식으로 선택해서 "근대성과 선진화"라는 식민성에 기초한 인식의 틀을 어떻게 해체하면서 이 나라 민중의 가장 절절한 요구를 담아낼 수 있는 대안적 선택을 만들어낼 것인가에 있다.

본래 아프리카 전문가였던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근대 세계 체제의 뿌리를 캐들어 가면서 세계 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냈다고 한다면, 이제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철학자 엔리크 뒤셀을 비롯해서 월터 미뇰로 등은 그 모순의 희생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대안의 미래를 구성해가는 시대를 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책을 덮고 나서 던지게 되는, 또는 던져야 할 질문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의 요구와 주체적 정체성을 확보하면서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남이 가져다 준 생각과 인식의 틀(식민적 권력 매트릭스)의 논리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자신의 역사가 겪은 식민적 상처에 둔감한 지역의 주민들은 탈식민적 전환을 이루어낼 수 없다.

그 어떤 미래의 선택도 이제는 이 전환의 지점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오래 걸리고 힘들다 해도 말이다. 미뇰로는 이것을 앞으로 다가올 "500년을 위한 투쟁"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작하지 않으면 시작되지 못한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내기 위한 우리의 500년 투쟁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 식민적 권력의 해체를 기도하지 않는 일체의 시도는 지난 과거의 되풀이에 그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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