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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의 나도향이 '진짜' 이름을 버린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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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의 나도향이 '진짜' 이름을 버린 까닭은?

[근대 의료의 풍경·58] 나성연과 그의 집안

이번 회에서는, 조선총독부의원 의학 강습소 제1회 졸업생 27명 중 의술개업인허장 번호가 가장 앞서는 전유화(田有華)부터 살펴보자.

전유화는 의학 강습소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여 1912년 도쿄 지케이카이(東京慈惠會) 의학전문학교를 다시 졸업했다. 당시 일본의 의학전문학교는 4년제였으므로 의학강습소 3년 학력을 인정받아 1년만 더 다녔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까지는 조선에 전문학교가 없었으므로 일본에 유학하여 전문학교를 다니고 졸업하는 것은 보통의 조선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는 1916년에야 처음으로 경성의전 등 관립 전문학교 4개가 생겼고, 1917년에는 세브란스의전과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전문학교들은 모두 신설된 것이 아니라 기왕의 학교가 승격된 것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전유화는 1914년 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함경북도 경성자혜의원(鏡城慈惠醫院)에서 조수로 근무한 뒤, 인접한 성진(城津)에서 개업을 했다. 자혜의원이나 총독부의원 같은 관립 의료 기관에서 잠시 근무한 뒤 개업하는 것, 이것이 당시 관립 의학교 졸업생들이 취한 대표적 코스 가운데 하나였다. 김용채와 김교창은 총독부의원, 권영직(함흥), 김종현(초산), 이충하(수원)는 자혜의원을 거쳐 개업했다. 반면에 김기웅, 김덕환, 나진환, 서병호, 송영근, 원의준, 이민창, 이상종, 최영주, 최창환 등은 그러한 경력 없이 개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들도 정식 임명은 받지 않았더라도 관립 의료 기관에서 임상 경험을 쌓았을 여지는 있다.

전유화의 출생지는 일본이다. 아버지는 당시 일본 유학생으로 얼마 뒤 요절한 전재식(田在植), 어머니는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이자 친일 반민족 행위로 악명을 날린 배정자(裵貞子, 1870~1952년)였다. 어머니의 잘못된 행동으로 자식까지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배정자의 친일 행각에 비해 전유화가 받은 혜택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구자흥(具滋興)은 졸업도 우등으로 했거니와 1학년을 마칠 때에도 류진영(柳鎭永), 김용문(金龍文)과 함께 우등생이었다. 그런데 이 세 사람 가운데 류진영과 김용문은 졸업생 명단에 보이지 않는다. 김용문은 다음 회에서 언급할 "이완용 처단 기도 사건"에 연루되어 학교 대신 감옥으로 가게 되었지만, 류진영이 학교를 그만 둔 사유는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류진영과 구자흥은 1910년 7월 <신찬 중등 무기화학(新撰 中等 無機化學)>이라는 중등학교 및 사범학교 용 화학 교과서를 펴내었다. 이 책의 맨 뒤 "서지 사항"에 류진영의 주소는 "평양 대성학교"로 되어 있다. 아마도 이때 류진영은 1908년에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만규는 의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의사 생활을 한 뒤 교육자의 길로 갔지만(제57회), 류진영은 아예 의학 공부를 중도에 포기하고 교사 생활에 전념한 것으로 생각된다. 류진영은 그 뒤 대성학교와 중국 선양(瀋陽, 당시 봉천)에서 교육 활동에 종사했다.

구자흥은 <신문계(新文界)>에 몇 차례 인체와 의학 관련 글을 기고한 것 외에는 일제 강점기의 활동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해방 직후에는 조선적십자사 부총재(총재는 김규식)를 지냈고(1949년 법률에 의해 대한적십자사가 생기기 이전), 대동청년단과 대한국민당 등 지청천(池靑天) 계열의 우익 단체에서 정치, 사회 활동을 했다.

▲ 류진영과 구자흥이 함께 펴낸 <신찬 중등 무기화학>(1910년 7월 발행, 375쪽). 중등학교와 사범학교 용 화학 교과서이다. 국한문 혼용으로 일제 강점기에는 공식적으로는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프레시안

▲ <매일신보> 1915년 8월 5일자. 김교창이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공의(公醫)에 임명되었다고 보도했다. 일제는 조선인을 공의로 임명한 것도 자신들의 치적으로 내세웠다. ⓒ프레시안
김용채와 함께 도쿄 제국대학 부속의원에 유학하여 피부비뇨기과를 공부한 김교창(金敎昌)은 귀국한 뒤 1913년 8월 20일부터 1915년 7월 29일까지 총독부의원의 조수 생활을 거쳐 전북 전주에서 개업했다. 그리고 이때 공의(公醫)로 임명받았는데, 공의는 개업을 하면서 공공 의료에도 종사하는 직책이었다. <매일신보>에 의하면 조선인으로는 김교창이 최초의 공의였다.

김기웅(金基雄)은 "평남 야소교 구제병원 부속의학교"를 졸업하고 1908년에 대한의원 의육부로 입학(편입)한 케이스이다. 1년간의 학력을 인정받은 셈이었다. 김기웅은 재학 시절 <서북학회월보> 제5호(1908년 10월 1일)에 "식물론(食物論) 및 방부법(防腐法)", 제16호(1909년 10월 1일)에 "태생법 약설(胎生法 略說)"을 게재하는 등 사회 활동, 특히 보건 분야 계몽 교육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 <매일신보> 1911년 1월 5일자. 한성의학강습소 학생 모집 광고. 강습 과목으로는 해부, 생리, 약물, 세균 등 기초의학 과목과 내과, 외과, 소아과, 산과, 안과 등 임상의학 과목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광고 내용으로 보면 김기웅과 손수경이 개교 초에 교육을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김기웅은 졸업 후에는 동기생 손수경과 함께 한성의학강습소 설립에 참여하여 주무(主務) 겸 교수를 지냈다. (손수경은 학감 겸 교수였다.) 한성의학강습소는 수업 연한 1년 반의 속성 교육 기관으로, 전의장(典醫長)을 지낸 서병효(徐丙孝)가 소장인 것을 보면 한의사들에게 근대 의학을 가르치는 역할도 한 학교였던 듯하다. 김기웅이 강습소 활동에 언제까지 관여했는지 알 수 없지만 1914년 10월부터는 고향인 평남 강서에서 자신의 의원을 열었다.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20일자에는 당시로는 보기 드문 광고가 실렸다. 한성종로자혜의원을 홍보하기 위해 개복 수술 장면이 실린 것이다. 집도의는 홍석후(1905년 의학교 졸업, 1908년 세브란스 의학교 졸업)이고, 박계양(대한의원 1907년 졸업)과 이민창 등이 수술을 거들고 있는 장면이다.

이 광고에 나오는 이민창(李敏昌)이 바로 1910년 졸업생 27명 중의 한 명이다. 이민창은 당시 1년 과정을 마치고 2학년 과정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런데도 학교 선배인 홍석후의 수술을 거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가 당시에 흔한 것이었는지, 예외적인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민창은 졸업 후에는 마산(1914년), 공주(1915년) 등에서 개업을 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 <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20일자 광고. 같은 광고가 네 차례 연달아 실렸다. 개복(할복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봉합 수술을 하는 "실지 사진"이라고 강조되어 있고, 홍석후 등 수술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조선인이 근대식 수술을 집도한 사진으로는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생각된다. ⓒ프레시안

송영근(宋泳近)과 이상종(李商鐘)은 동기생끼리는 보기 드물게 같은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개업하면서 사회 활동도 활발히 벌였다. 특히 1920년대 후반의 신간회(新幹會) 활동에 적극적이어서 송영근은 신간회 홍원 지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에는 많은 의사들이 거주 지역에서 유지 역할을 했지만, 신간회와 같은 일제 당국의 주목과 감시를 받는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또한 이충하(李忠夏)는 1921년 황해도 장연군에서 발생한 의용단-적십자사 사건에 연루되어 검찰에 송치되기도 했다.

▲ <총독부관보> 1937년 7월 13일자. 손수경이 평안남도 도회 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음을 공고했다. ⓒ프레시안
반면에 손수경(孫壽卿)은 고향인 평양에서 조만식, 노진설 등과 함께 "조선인의 생활 권익의 옹호 신장을 목적으로" 설립된 건중회(建中會)에서 활동하는 등 한때 온건 민족주의 활동을 했지만, 뒤에는 도회(道會) 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고(1937년) "평양 애국단체시국간담회"에 관여하는 등 친일 행적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나성연(羅聖淵, 1883~?)과 그 집안에 대해 알아보자. 나성연의 아버지는 당시 한의사로 명성을 날렸던 나병규(羅炳奎, 1852~1924년)이다. 나병규는 1914년 2월 3일 총독부로부터 한의사 자격증에 해당하는 "의생(醫生) 면허"(제45호)를 부여받았고, 1919년 12월에는 약종상 조종대(趙鍾大,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22년 함흥 감옥에서 옥사했다), 의생 이연수(李延洙)와 이기헌(李起憲), 약종상 윤홍모(尹弘模) 등과 함께 "철원 애국단 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되었다. 나병규는 일흔 가까운 나이 때문인지 징역형은 받지 않고 벌금형에 처해졌으며, 이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동기생들에 비해 나이가 몇 해 많은 편이었던 나성연은 의학보다는 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졸업 때 성적이 최하위였다. 그래도 졸업 뒤에는 개업을 하여 주로 외과 환자를 돌보았다. 아버지 나병규의 사망으로 가세가 기운 1924년 이후에 더욱 열심이었다고 한다.

나성연의 아들 경손(慶孫)도 할아버지의 강권으로 1918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지만 1년 만에 가족 몰래 그만 두고 결국 작가가 되었다. <물레방아>, <뽕>, <벙어리 삼룡이> 등 지금도 애독되는 명작을 남긴 나도향(羅稻香, 1902~1926년)이 바로 나경손이다.

경손이라는 이름은 "경사스러운 손자"라는 뜻으로, 나도향은 할아버지 중심적인 이 이름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아마도 나도향은 가부장적인 집안 분위기에 대한 저항으로 이름과 의학 공부를 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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