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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생이 이토 히로부미와 무슨 상관이요?"

[근대 의료의 풍경·56] 대한의원

이번 회에서는 주로 1907년 대한의원 교육부에 입학하여 1910년 11월에 졸업한 학생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정확도와 신뢰성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1911년도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는 대한의원 시절 의학생 상황에 대해 개략적인 정보를 제공해 준다.

지원자와 입학자의 수는 1907년 700명과 45명, 1909년 450명과 50명, 1910년 388명과 50명으로 경쟁률은 1907년 15.6 대 1, 1908년 9 대 1, 1910년 7.8 대 1이었다. 이렇게 지원자가 많고 경쟁률이 높은 것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당시 신문 보도에도 지원자가 많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것은 근대 서양 의학이 이전 시대에 비해 더 수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생각된다.

"대한의원에서 의학교 생도를 현금 모집하는 중인데 의학이 시급하다 하여 입학 지원자가 다수에 지(至)하였다더라" (<황성신문>, 1909년 5월 27일)

▲ <1911년도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제586표. "관립 의학 강습소 상황"(각 연도 3월 말일 현재). 괄호 안의 숫자는 <1910년도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 기재된 수로 1911년도치와 조금 차이가 난다. 통계치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4년제는 1910년도 입학생부터이므로, 1910년에 4학년으로 기재한 것은 잘못이다. 1907년 가을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앞둔 학생들을 4학년으로 표현한 것이다. ⓒ프레시안

당시 신문과 <관보> 등을 종합해 보면, 1907년도 입학시험은 4월 26일 오전 10시부터 중서(中署) 훈동(勳洞)의 전(前) 의학교 건물에서 치러졌다. 입시 과목은 의학교 시절과 비슷하게 한문 독서, 국한문 작문, 산술(筭術) 문답 등 세 과목이었으며, 중학교 졸업 증서가 있는 사람은 입학시험이 면제되었다. 그때까지도 중학교 졸업생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학교 졸업생에게 일종의 "특혜"를 준 것 이외에 입시는 공개적으로(<황성신문>에만도 12차례나 입시 광고가 실렸다) 공정하게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의학교 시절과 뚜렷이 차이나는 점은 국가가 교육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는 "관비생" 이외에 자신이 학비를 부담하는 "사비생(私費生)"도 선발했다는 것이다.

▲ <황성신문> 1907년 4월 10일자. 대한의원 교육부 학생(學員) 모집 광고. 4월 23일까지 12차례 연속으로 실렸다. 당시 학생의 공개 모집은 "의학교"가 이미 1899년 설립 때부터 모범을 보여 확립되어 있었다. ⓒ프레시안

의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대한의원 시절에도 학생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하면서 일본인 학생도 입학하게 되었으며, 몇 해 뒤부터는 일본인 학생 수가 더 많아졌다.) 1907년 입학생들이 언제 입학식을 갖고 수업을 시작했는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1909년의 경우 9월 11일에 입학식(開校式)이 있었던 것을 보면 그와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을에 새 학년이 시작된 것 또한 의학교 때와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대한의원 초기에는 많은 것이 의학교 시절과 비슷했다.

교육도 마등산(지금 서울대학교병원 자리)의 대한의원 본관 건물이 지어질 때까지는 훈동(관훈동)의 전 의학교 건물에서 이루어졌다. 11월초 본관 건물이 준공되자 우선 9일과 10일, 광제원의 시설을 그곳으로 이전했고 이어서 14일에는 적십자사병원의 시설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21일, 의학교가 8년 남짓 보금자리 구실을 했던 훈동을 떠났고, 그 자리에는 관립 덕어학교(독일어학교)가 이전해 왔다. 이제 물리적으로도 광제원, 적십자사병원, 의학교가 사라지게 되었다.

마등산으로 옮겨 온 의학생들은 어디에서 공부했을까? 대한의원 본관(시계탑 건물)의 평면도(규장각 소장)가 이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2층 평면도를 보면, 원장실과 고문실을 제외하고는 본관 2층의 거의 모든 공간이 교실 5개, 의국(醫局), 탈모실(脫帽室), 식당 등 학생과 관련된 시설로 배치되어 있다. 학생들은 1909년 11월 부속의학교 건물(지금의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자리)이 준공될 때까지 약 2년 동안 이곳에서 공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본관 건물을 교육 장소로 쓴 것을 보면, 학생 교육에 상당한 배려를 한 것으로도 보이고, 또 한편으로는 학생들을 철저히 장악하기 위한 조치로도 여겨진다.

▲ 대한의원 본관(시계탑 건물)의 정면도(위)와 2층 평면도(아래). 별개의 도면 두 개를 필자가 합성한 것이다. 본관 2층에는 원장실(A)과 고문실(顧問室)(B)이 대칭으로 있으며, 교실(파란색 네모)이 다섯 개 있다. 학생들은 부속의학교 건물이 준공될 때까지 2년 가까이 이곳에서 공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프레시안

고문실의 규모만 보아도 고문(제55회)의 위상과 역할을 잘 알 수 있다. 건물 준공 조금 뒤인 1907년말의 <대한의원 관제> 개정으로 고문이 폐지되고, 고문이었던 사토 스스무가 원장이 된 뒤에 고문실은 어떤 용도로 바뀌었을까? 고문실(拷問室)? 누군가는 통감부 시절과 일제 강점기를, 발음의 유사함을 이용하여 이렇게 표현했다. "강꼬꾸(かんこく, 韓國)는 온통 강고꾸(かんごく, 監獄)이었다."

의학생들의 복장과 두발 상태는 어땠을까? <대한의원 개원 기념 사진첩>(1908년)에 들어 있는 의육부(醫育部, 1907년말 교육부를 의육부로 개칭했다) 학생들의 수업 장면 사진이 그것에 대해 말해 준다. 사진 속의 학생들은 대부분 교복 차림이며, 머리도 짧게 치켜 깎았다. 이러한 복장과 두발 상태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의학교 시절 학생들의 사진이 남아 있지 않아 알기 어렵다.

▲ <대한의원 개원 기념 사진첩>(1908년) 중의 의육부 학생들의 수업 장면. 본관 2층의 다섯 개 교실 중 하나, 특히 원장실 옆의 가장 넓은 교실에서 찍은 것으로 생각된다. 학생들 대부분이 검정색 또는 회색 교복을 입고 있으며, 4명만 한복을 입고 있다. 모든 학생이 머리를 짧게 깎았다. 1907년에 입학한 학생들로 여겨지는데 18명밖에 되지 않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 한복을 입고 서 있는 사람은 한국인 교수 유세환, 유병필, 최규익 중 한 명으로 여겨지지만 확실치는 않다. ⓒ프레시안

▲ 대한의원 의관(醫官) 겸 교수인 우치다(內田徒志)가 독일 유학을 떠나는 것을 기념하여 1910년 6월 2일에 찍은 사진(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지음, <한국근현대의료문화사>에서 전재). 사진 속의 학생들은 1907년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거의 마치고 졸업을 앞둔 학생들로 보인다. 모든 학생이 각모(角帽)를 쓰고 있다. 일제 강점 초기인 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 시절에는 둥그런 환모(丸帽)로 바뀌었다가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하면서 각모를 되찾았다. 각모 착용은 학력(學歷)의 상징으로 일제 시대에는 전문학교와 대학 학생들에게만 허용되었다. 위치로 보아 앞줄 가운데 검은 양복 입은 사람이 우치다로 생각된다. 그 오른쪽의 연한 색 양복 입은 사람은 한국인 교수 최규익이나 최국현일 가능성이 있다. ⓒ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1911년도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 의하면, 1907년도 입학생들은 입학 당시 45명에서, 1학년말 36명, 2학년말 33명, 3학년말 29명으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조금씩 줄어들었다. <황성신문> 1908년 7월 9일자 보도로는 1학년 수료자가 우등생 류진영(柳鎭永), 구자흥(具滋興), 김용문(金龍文, 다음 회에서 상세히 언급할 것이다)을 비롯하여 37명이었다.

학생들이 학교를 중도에 그만 둔 사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다음과 같은 경우도 있었다.

"대한의원 의육부 학도 이동상, 송영근 양 씨가 금년 하기방학을 승(乘)하야 함흥 향제(鄕第)에 하거(下去)하야 대한협회 지회를 설(設)함을 내부(內部)에셔 지(知)하고 대한의원에 통지하되 학생 자격으로 회를 설함은 이외(理外)의 사(事)니 해(該) 학도를 상당 조처하라 하얏다더라" (<황성신문>, 1908년 9월 27일)

이처럼 대한협회 지회를 설립한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동상(李東相)은 학교를 그만 두었다. 이들 외에도 많은 학생이 서북학회, 기호흥학회, 천도교 청년단체, 황성신문 신진부 등 애국계몽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 <대한매일> 1910년 11월 5일자. 11월 2일, 전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졸업증서 수여식이 있었음을 보도했다. 이때는 대한의원은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부속의학교는 "부속의학강습소"로 명칭이 바뀌었다. ⓒ프레시안
학년이 올라감에 따라 약간의 학생 손실은 있었지만 결국 1910년 11월 2일 졸업식을 갖고 27명이 졸업했다. 졸업생 27명은 입학생 45명의 꼭 60%로 당시의 격동적인 상황을 생각하면 결코 적은 수나 비율은 아니었다. <신한민보> 1910년 2월 9일자 기사 제목처럼 "그래도 배워야" 했던 세월이었다.

대한의원 학생들의 성향을 짐작케 하는 한 가지 "사건"이 있다. 이 무렵 대한제국 황제나 통감이 원행(遠行)을 하는 경우, 대개 관립학교 학생들이 환영·환송 행사에 동원되곤 했다. 1908년 4월 16일, 영친왕 이은(李垠, 1897-1970)의 일본 유학(사실상 볼모로 끌려간 것)에 동행했다 돌아오는 영친왕의 "사부(師傅, 太子太師)" 이토 히로부미를 환영하기 위해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관립학교 학생들이 남문 밖 정거장(지금의 서울역) 근처에 동원되었다.

당시 신문 보도에는 관립 사범학교, 고등학교, 외국어학교, 보통학교 학생들과는 달리 대한의원 학생들이 행사에 참석했다는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어떻게 된 것일까?

▲ (왼쪽) <대한매일신보> 1908년 4월 16일자. 학부에서 관사립학교(관립학교의 오식으로 보인다) 학생들을 이토 히로부미 환영 행사에 동원할 것을 지시했다는 기사이다. (오른쪽) <황성신문> 4월 17일자. 다른 관립학교 학생들과는 달리 대한의원 학생들이 실제 행사에 참석했다는 언급이 없다. 단지 참석 사실이 누락된 것일까? ⓒ프레시안
▲ 대한제국 황태자 영친왕과 태자 태사(太子太師, 황태자의 師傅라는 대한제국의 관직) 이토 히로부미(1907년). ⓒ프레시안
당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던 교민들이 발간하던 <해조신문(海潮新聞)>이 그렇게 된 사정을 전하고 있다. 즉 학부의 지시를 받은 대한의원 의육부의 학생감(이 기사에는 예전의 호칭인 "의학교장") 지석영이 학생들에게 행사에 나갈 것을 호소했지만 학생들이 그것을 묵살했다는 것이다. 기사의 제목이 "학생이 통감과 무슨 상관(學徒何關於統監)"이라고 되어 있다. 학생들의 기개와 지석영의 초라한 모습이 뚜렷이 대비된다. 지석영도 속마음이야 어떠했으랴?

대한의원 학생들의 행사 불참이 망국을 막는 데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학생들의 그런 패기조차 없었다면 가혹한 식민지 시대를 어떻게 이겨내고 또 해방을 맞을 수 있었겠는가? 삼일운동 당시 의학생들의 활동도 살펴보았지만(제1회),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의지와 기개는 다른 분야 학생들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 <해조신문(海潮新聞)> 1908년 5월 6일자. "일전 일본 통감 이등 씨 입성할 시에 학부 지휘로 각 관립학교 생도들을 일제히 나가 영접하라 하는데 의학교장 지석영 씨가 해 학도더러 영접하자 하매 일반 학생들이 다 불가라 하는지라. 지 씨가 다시 권하기를 구경차로 가자 하매 학생들이 그러면 점심 후에 다시 회집한다 하고 각각 흩어졌는데 날이 저물도록 회집치 않는지라 지 씨가 종일토록 독좌공방 하였다더라."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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