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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홀대하고 일본인만 우대한 '한국'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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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인 홀대하고 일본인만 우대한 '한국' 병원?

[근대 의료의 풍경·55] 대한의원

1906년 10월 25일 대한의원 창설위원회는 14조로 구성된 <대한의원 관제>를 의정부에 제출했다. 이 관제에는 대한의원의 소속, 직원, 부서, 활동 등이 규정되어 있었다.

관제의 여러 조항 중에서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대한의원이 내부(內部)와 같은 한 부처가 아니라 의정부 직속 기관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대한의원이 질병 치료와 빈민 시료(施療) 등 병원 업무(치료부 담당)뿐만 아니라 의사, 약제사, 산파와 간호부 양성, 교과서 편찬 등 의학 교육 기능(교육부 담당)을 겸하며, 나아가 의료인의 관리와 약품·매약 통제 등 보건위생 행정(위생부 담당)까지 관할하는 기관으로 역할이 규정된 것과 관련이 있다.

즉 대한의원은 그 동안 내부가 관장하던 병원 업무와 학부 소관이던 의학 교육, 그리고 위생국이 담당하던 보건위생 관련 행정을 모두 포괄하는 기구였으므로 최고위 정부 기구인 의정부 직속으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병원의 총책임자인 원장도 내부대신이 겸임하는 것으로 격상시켰다.

일제가 대한의원의 성격과 위상을 이렇게 설정한 것은 무엇보다도 보건의료와 관련되는 모든 사항을 대한의원에 집중시킴으로써, 대한의원만 손아귀에 넣으면 대한제국의 보건의료를 사실상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한 뒤인 1907년 12월 27일 <대한의원 관제>를 개정하여 대한의원을 내부 관할로 만들었다. "엿장수 마음대로"였다.)

그리고 일제의 그러한 의도는 대한의원의 실제 운영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흔히 통감부 초반기를 "고문 통치 시대"라고 하는데, 보건의료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일제의 책략은 무엇보다도 "원장은 고문과 협의한 후에 원무를 정리(整理)한다"(제4조)라는 조항으로 뒷받침된다. 병원 업무와 보건위생 사무 등에 전문적인 식견이 없는 명목상의 원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실세" 일본인 고문을 둔 것이다.

일제의 침략 의도가 명시적·암시적으로 담긴 이 관제는 의정부의 의결을 거쳐 1907년 3월 10일자로 공포되어 3월 15일자로 발효했다. 대신 8년 동안 국가병원 역할을 하던 광제원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학 교육 기관인 의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의학교와 광제원은 제58회부터 상술할 것이다.)

▲ 칙령 제9호로 제정, 반포된 <대한의원 관제>. 맨 끝에 참정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탁지부대신 민영기, 학부대신 이완용의 서명이 있다. ⓒ프레시안

대한의원 관제가 공포된 직후 행해진 인사를 통해 병원의 실무 책임자는 예정대로 모두 일본인으로 채워졌다. 즉 통합 전의 광제원장에 해당하는 치료부장에는 이토 히로부미의 주치의로 통감부 기사였던 고야마(小山善), 의학교장 격인 교육부장에는 일본군 예비역 군의관이자 의학교 교사를 지낸 고다케(小竹武次), 종래의 내부 위생국장의 역할을 담당하는 위생부장에는 광제원 의장(醫長)이었던 사사키(佐佐木四方志)가 임명되었다. 이들은 모두 대한의원 창설위원으로, 그들의 작업의 결과로 대한의원이 창설되자마자 스스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논공행상의 의미도 띤 인사였다.

내부대신 이지용(1907년 3월~5월, 을사 5적)과 임선준(1907년 5월~12월, 정미 7적)이 당연직 원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이들은 의료에 문외한이었으며, 또 실권은 이미 고문과 3부 부장에 넘겨져 있었으므로 별다른 역할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들은 대표적인 친일파였지만 일제는 이들에게 실제 권한을 맡기지 않았다.

더욱이 1907년 12월 27일자로 대한의원 관제를 개정하여 사토 스스무를 원장에 임명함으로써 명목상의 책임자 자리마저도 일본인에게 넘어갔다. "정미 7조약" 체결(1907년 7월 24일)로 일본인들이 직접 고위직에 임명될 수 있었기 때문에 사토는 "고문" 대신 원장직을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대한의원 원장의 직급은 칙임관(勅任官) 1등으로 차관급이었다.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윤은 칙임관 2등이었다.)

▲ <조선귀족열전> 속의 그때 그 사람들. 왼쪽부터 백작 이지용(1870~1928년), 자작 임선준(1860~1919년), 자작 윤덕용(1873~1940년)이다. ⓒ프레시안

병원의 실무를 담당하는 교관, 의원, 약제사, 통역관, 사무원 등으로 통합 이전 각기 해당 기관에 근무하던 한국인들이 다음과 같이 임명되었지만, 이전에 비해 직위가 강등되거나 역할이 축소되었다. 물론 숫자도 줄어들었다. 교관으로는 의학교 교장을 지낸 지석영과 유세환, 유병필, 최규익 등 4명, 의원(醫員)으로 이규선과 피병준 등 2명, 약제사로 권태완, 이응원, 김상섭 등 3명, 통역관보로 이은집 1명, 사무원으로 박형래, 김철주, 유일환 등 3명, 모두 합해 13명이 임명되었다. 이것은 전체 직원 54명 중 4분의 1도 안 되는 인원이었다.

특히 교육부장이 "보직"이 아닌 "직급"임을 생각할 때, 의학교 8년 내내 교장 직을 맡았던 지석영이 교관으로 강등된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러한 점은 대한의원뿐만 아니라 당시 통감부가 주도한 다른 교육기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석영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뒤늦게 학감(학생감) 직을 새로 만들어 그 자리에 임명했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심지어 1910년에 작성된 <내부 및 부속 관청 직원록>에는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 교수 명단 중 학생감 지석영은 맨 끝에 적혀 있다.

요컨대 첫 번째 대한의원 인사를 통해 한국인은 진료, 교육, 위생 업무 등에서 아웃사이더로 전락했고, 그러한 점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뚜렷해져 갔다. 비록 병원의 이름은 "대한"이었지만, 실제 내용은 이름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 1910년에 작성된 <내부(內部) 및 부속 관청 직원록>. 지석영은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 교수 명단 중 의학교 제2회 졸업생 최국현(崔國鉉), 미국인 스크랜튼에 이어 맨 끝에 적혀 있다. 유병필(劉秉珌)은 교수직에서 물러나 월봉 70원의 비정규직(雇)으로 있었다. ⓒ프레시안

병원의 실제 이용 양상은 대한의원의 성격을 더욱 뚜렷이 보여준다.

1908년 대한의원 입원 환자는 한국인 159명(27%), 일본인 428명(73%)이었으며, 외래 환자는 한국인 4913명(48%), 일본인 5253명(52%)이었다. 1909년에는 입원 환자가 한국인 208명(23%), 일본인 699명(77%)이었으며, 외래 환자는 한국인 6474명(43%), 일본인 8412명(57%)이었다. 병원을 이용한 환자의 절대수도 일본인이 단연 많지만, 당시 한국에 거주하던 한국인과 일본인의 인구를 감안하면(당시 한성과 경기도의 한국인은 약 136만 명, 일본인은 5만여 명이었다) 대한의원 이용이 엄청나게 불균형적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의 대한의원 이용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것은 몇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대한의원에 대한 일본인과 한국인의 입장과 시각 차이이다. 일본인들은 주로 일본인 의사들로 구성되어 있어 낯설지 않고 진료 수준도 상당한 대한의원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반면에 한국인들에게는 일본인 의사들이 진료한다는 바로 그 점이 대한의원을 멀리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배타적 민족 감정과 대한의원이 일제의 침략 도구라는 인식 이외에 또 중요한 요인은 경제적인 것이었다. 즉 대한의원의 치료비와 입원료는 당시 한국인의 처지에서 엄청나게 비쌌다. 한국인 환자는 생활 정도를 감안하여 비용을 감해 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대한의원은 일반적인 한국인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병원은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대한의원을 이용한 한국인은 진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있으며 일본인 의사들의 진료를 꺼려하지 않는 극소수 특권 계층과 무료로 진료 받는 시료환자(施療患者)가 대부분이었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는 이재명에게 응징 습격을 받은 이완용과 그 형인 이윤용의 가족 등을 들 수 있다.

일제는 "한국의 의술을 발달시킨다"는 명목으로 1907년 대한의원을 설립한 데 이어, 1909년부터 전국 각 지역에 자혜의원을 세웠다. 그러나 일제가 생각한 "한국의 의술 발달"이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을 주체로 설정한 것이었다. 또 일제는 그것을 과도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일제는 애초부터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의료 부문도 일본인이 영구히 장악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인 의료인 양성 제한" 정책도 처음부터 뚜렷했다.

이렇듯 일제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의학 교육의 발전을 의도하지 않았다. 1899년 이래 8년 동안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의학교는 대한의원의 한 부서로 격하되었다. 일제가 대한의원을 통해 한국의 관립 의학 교육을 주도한 1907년부터 1910년 사이, 그곳에서 의학 교육 과정을 마치고 의사가 된 사람의 수는 1908년에 13명, 1909년에 5명(이상 18명은 의학교 시절 입학), 1910년에 27명 등 45명이었다. 또 1907년에 45명, 1909년에 50명, 1910년에 50명 등 145명의 학생을 선발했지만(1908년에는 선발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한 교육은 한국의 의술을 발달시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을 식민지로 통치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일제는 한국 내의 최고 교육 기관 중의 하나인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의 교육 내용을 더욱 "식민지 교육 시책"에 맞도록 바꾸었다. 1909년부터 다른 고등 교육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통역 없이 일본어로만 교육하도록 했으며, 충직한 "천황 폐하의 신민(臣民)"을 양성하기 위해 수신(修身) 과목을 필수 과목으로 두었다.

이에 따라 일본어로 강의할 수 없는 한국인 교관과 서양인 교수(스크랜튼)의 입지는 더 줄어들었으며, 한국인 학생은 교육을 받기 위해서 상당한 수준의 일본어 학습을 해야만 하게 되었다. 그리고 1909년부터는 입학 시험에서도 일어 과목이 추가되었으며, 1910년에는 일어 시험에 합격치 못할 때에는 아예 다른 학과 시험을 보지 못한다는 조건까지 붙게 되었다.

▲ <관보>에 게재된 대한의원 입학 시험 요강. 1909년(왼쪽)부터 입학 시험 과목에 일어가 추가되었으며, 1910년(오른쪽)에는 일어 시험의 기준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일어 시험에 불합격하는 경우에는 아예 다른 시험은 볼 수도 없는 조건이 추가되었다. 원어민 일본어 교사가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프레시안

대한의원 말기인 1910년 2월 1일자로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 규칙>이 반포되면서 교육 연한이 3년에서 4년으로 연장되었지만, 식민지 통치의 편의를 위한 교육이라는 큰 틀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외관은 "근대적"인 모습을 띠었지만, 내용은 "식민화" 일변도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의학교 시절에 보이던 자주적인 특성도 사라지고, 지석영 등 의학교를 주도하던 인사들의 역할과 이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국가가 날로 소멸해 가고 의료도 일제의 손아귀에 장악되어 가고 있었지만,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열정과 패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회에서는 대한의원 당시 의학생들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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