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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에 주목해야 한다"

[해방일기] 1945년 9월 4일

1945년 9월 4일

"지난 1일 종로 영보빌딩에서 결성된 朝鮮國民黨에 관하여 내가 그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므로 나의 公人으로서의 성명을 하여 두기로 한다. 나는 방금 朝鮮建國準備委員會의 한 사람이면서 그 직책을 다하지 못하므로 거기에 대하여서도 즉시 태도를 표명할 필요가 있거니와 나로서의 政見은 정치적 현 단계에서 가장 긴급한 사항은 민족주의, 공산주의 하는 사상문제를 정치공작의 최상층에 올려놓고 마찰을 일으킴과 같은 것은 절대로 배제하여야 할 것이다.

이 양대 주의가 대중사이에 병립 쌍행할 것은 필연한 형세라 하고 목하 건국준비의 처음에서는 절대로 공고한 협동정신을 맺어 통일민족국가를 완성하는 데에 전 민족의 총 역량을 집결하는 것이 결정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통일민족국가를 하루 바삐 완성한다는 것은 통일된 중앙정부로서 하루 바삐 조선국가 내부에서의 그 통치력을 발휘하는데 있고 그리하여야 조선에 막대한 호의를 가지는 연합국에 대한 의리상 문제로도 만사가 파란 없이 결말될 것이라고 본다.

정당결성문제에 있어서도 이상으로서는 전 민족 단일당에 있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민족주의 진영은 반드시 대동단결하여 그 방면의 총 역량을 집결하는 것이 절대 필요한 것은 두말할 바 아니다. 나와 평시부터 신뢰 깊은 동지들이 국민당 결성문제로써 가끔 모이어 토의하는 중인데 그도 멀지 않어 구현될 줄 믿거니와 서로 연락하면서 신민족주의에 의한 결당을 협의하고 나에게 그 지도자가 되라고 하는데 나는 워낙 지도자의 자격도 없고 그 의사도 없으나 상당한 다수의 인사들이 모처럼 일심을 가지고 움직이는 그 주장과 태도인즉 나의 그것과 잘 합치되는 터이므로 그대로 중지할 바도 아니고 또 나의 말로 지금 각 방면의 유력한 분들이 국민당을 결성하려고 모두 노력하고 있는 중이니 그들과 합류하여 민족주의 정당으로서 대동단결할 용의를 하자고 하였더니 그편의 여러분도 전원 일치로 그 용의 있음을 표명하므로 나도 우선 그 위원장의 자리를 맡어두게 된 것이다.

한동안 小黨分立은 필연한 현세이나 하루 바삐 집중통일함을 요하는 터이오 통일도정에서 상호의 지장이 안 되도록 각각 선입적인 주견은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동단결을 완성하는 날에는 나는 한 개의 卒伍로 나가겠고 협동통일을 항상 신조로 삼아 나가려고 한다."

(<매일신보> 1945년 09월 04일)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앞서 한 차례 얘기한 적 있지만, 나는 이번 작업에서 안재홍의 모습을 밝히는 데 상당한 역점을 두고자 한다. 첫째로 나 자신 그의 당시 생각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그의 눈을 빌리는 것이 지금 독자들에게도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배우고자 하는 것은 '신민족주의'다.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펴냄)에서 밝힌 것처럼 나는 우리 민족주의의 거품을 걷어내는 구조 조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해방 시점에서 안재홍이 제안한 신민족주의는 식민지 시대의 민족주의와 독립국가의 민족주의는 달라야 한다는 전제 아래 구조 조정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구조 조정이라는 틀에서 신민족주의의 의미를 깊이 검토하고 싶은 것이다.

그의 눈이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에게 야심이나 편견의 색안경이 없기 때문이다. 이 성명에서도 그는 자연스럽게 "나는 워낙 지도자의 자격도 없고 그 의사도 없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다. 급격한 변화의 상황 속에, 지도자의 반열에 드는 사람들은 설령 본인에게 숨겨진 야심이 따로 없더라도, 관계된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라도 뭔가 획책을 해야 하고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기 어려운 사정이 많이 있었다. 안재홍은 이례적으로 그런 부담이 적었던 사람 같다.

해방 시점부터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부위원장으로 위원장 여운형과 함께 건준을 이끌어온 안재홍이 9월 1일 결성된 조선국민당(국민당) 위원장으로 나선 것은 건준에서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전날 건준 부위원장 직을 사퇴했고, 4일 간부회의에서 재신임을 받고도 부위원장 직에 복귀하지 않았다.

건준 자체가 지리멸렬하게 된 이 시점의 상태를 생각하면 안재홍이 한계를 느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겠지만, 결정적인 한계는 여운형과의 관계에서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애초의 건준 참여도 여운형에 대한 신뢰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도자로 나서기 싫어하던 그는 지도자 역할을 여운형이 잘 맡아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 곁에서 자기 역할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여운형에 대한 안재홍의 신뢰가 뒤집혔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약해지고 불안해진 정도였을 것 같다. 신뢰 약화의 원인도 여러 가지 있겠지만,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임시정부(임정)에 대한 태도의 차이다.

안재홍은 임정의 절대 지지를 주장했다. 며칠 후면 한국민주당(한민당)도 임정 절대 지지를 표방하고 나선다. 그러나 같은 '절대 지지'라도 해방 순간부터 밝힌 안재홍의 지지와 9월 들어 들고 나온 한민당의 지지는 의미가 다른 것이었다. 안재홍의 지지는 앞뒤 가릴 것 없이 곧바로 내놓은 지지였고, 한민당의 지지는 자기네 입장과 이리저리 맞춰본 뒤에 선택한 카드였다. 한민당의 지지는 결코 '절대' 지지가 아니었다.

안재홍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양대 주의"로 파악하고 있었다. 해방이 민족 모순 해결과 계급 모순 해결 두 가지 과제를 가져온 것으로 본 것이다. 계급 모순 해결의 과제를 그는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통일 민족국가" 수립을 우선적 과제로 보았기 때문에 스스로 민족주의자를 자임했던 것이다.

통일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우선적 과제 앞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양보해야 하고, 그 과제가 성취된 뒤에 공산주의 주장이 나올 수 있다고 안재홍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임정에 대한 그의 지지도 아주 엄밀한 의미에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임정 측에서 공산주의를 배제하는 것을 그는 반대했다. 공산주의자까지 포괄하는 전 민족을 대표한다는 전제 하에 임정을 '절대 지지'한 것이다.

그런데 여운형은 임정의 의미를 제한해서 보는 견해를 발표하고 있었다. 임정도 여러 독립운동 세력의 하나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임정의 의미를 제한해서 보는 것은 좌익의 일반적 관점이었다. 좌익 인사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밀착되어 있던 임정이 극우로 흐를 개연성이 크다고 보았을 것이다. 8월 30일 임정 요인들이 중경 미국 대사관에 가서 했다는 말을 보면 타당성이 있는 관점이다.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네 지분을 키우기 위해 임정을 깎아내리고 싶은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여운형이 임정에 대한 좌익의 관점을 섣불리 받아들인 것이 건준 몰락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의 좌익 중에서 민족의 입장을 무시하고 소련에 종속해야 한다는 극단적 공산주의자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좌익은 계급 모순 해결의 과제와 함께 민족 모순 해결의 과제도 인정하는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민족주의 진영이 좌익을 원천적으로 배제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면 통일 민족국가 수립 때까지는 민족주의 깃발을 앞세우자는 안재홍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선에서 좌익의 주류가 형성될 수 있었다.

임정의 의미를 제한해서 보는 관점이 불합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임정의 권위나마 세워주지 않는다면 대안이 무엇이었는가? 여운형이 건준의 권위를 임정보다 높여 그를 발판으로 권력을 획득하려는 천박한 야심을 가졌다고는 상상되지 않는다. 총독부도 건준을 박대하고 고학력 실력자 집단도 건준을 외면하는 상황에서 인민의 힘에 의지한 정면 돌파의 의지를 다진 것일까?

안재홍은 여운형과 보조를 맞출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하자 건준을 통한 '공중전'을 포기하고 '지상전'으로 방향을 돌려 정당을 만든 것이었다. 우익에 속하면서 좌익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중도 우파의 길을 안재홍은 택하고 좌익과 함께 하면서 민족주의를 버리지 않겠다는 중도 좌파의 길을 여운형은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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