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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사상가? 김지하는 '미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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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사상가? 김지하는 '미학자'다

[철학자의 서재] 김지하의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

김지하와 미학

사람들은 김지하를 시인으로서, 혁명가로서 그리고 탁월한 사상가로서 기억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간과하는 김지하의 또 다른 면모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탁월한 미학자였다는 것이다. 그의 미학은 그의 시와 삶,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그의 미학적 의식이 그의 모든 활동을 이끄는 원동력이 아닐까 하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삶의 각 단계마다 고유한 미학 이론을 제시해 온 것 같다.

김지하의 초기 미학 이론은 민족 미학의 이념이다. 그리고 1970년대 초 그는 풍자시 이론을 개척했다. 1970년대 그는 행동의 제일선에 나섰다. 1980년대 들어와서 그는 현실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는 더 포괄적인 정신적 혁명을 꿈꾸었다. 그것이 바로 후천개벽의 생명 사상이다. 그의 생명 사상은 새로운 미학적 의식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런 미학적 의식을 정립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지하는 오랜 모색을 거친 끝에 2000년대 초 '흰 그늘'이라는 미학적 개념을 정립했다. '흰 그늘'의 미학에 이르기 위한 힘든 노력들이 그의 책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실천문학사 펴냄)에 모여 있다. 여기서 제시된 '흰 그늘'이라는 미학적 개념은 종으로는 그의 미학적 의식의 발전과 횡으로는 그의 삶 즉 직접적 행동이냐 후천개벽이냐 하는 선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생명 사상

▲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김지하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실천문학사
그의 시의 출발점은 서정시이었다. 그는 우선 리얼리즘의 전통 위에서 자기 시를 확립시키고자 했다. '현실동인 제1선언'(1969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당시 한국 사회가 당면한 민족적 현실을 반영하여 민족 미학의 이념을 정립했다. 이것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한국의 민족적 현실에 맞게 변형시킨 것이었다.

민족 미학의 이념을 통해 그는 탈춤을 비롯한 전통 예술에 흥미를 느꼈다. 그는 전통 형식 속에 표현된 민중적 정신에 주목하면서 새로운 미학에 이르렀다. 이 새로운 미학은 <풍자냐 자살이냐>(1970년)에서 탁월하게 표현되었다. 이 새로운 미학이 곧 풍자시의 개념이다.

시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변혁하는 힘을 지닐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그의 풍자시 이론은 그가 아방가르드적 미학적 의식으로 전환했음을 보여준다. 놀랍게도 전통적인 탈춤의 형식 속에서 이런 아방가르드적 미학의 전거를 찾았다는 점에서 그의 글은 한국 미학사에서 오래 기억될 만한 글이라 하겠다.

1970년대 초까지 그의 시는 현실과의 투쟁의 일환이었다. 그의 투쟁은 양심적 저항에 속하며, 거역할 수 없는 내적인 충동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양심적 저항은 신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그것은 신의 명령이었으며 결과는 신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의 행동을 지탱하는 힘은 당시 그를 지배한 해방신학의 논리로부터 나왔다 생각된다.

그리고 1970년대 말에 이르는 오랜 수감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오랜 세월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 그는 사상적으로 새로운 전환을 맞이했다. 그는 생명 사상에 눈을 떴다. 그 자신은 감옥의 창가에 핀 꽃을 보고 그런 전환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고 혹자는 1970년대 원주 시대부터 지속되었던 동학 사상 및 증산 사상과의 만남이 그런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김지하의 생명 사상은 근대 계몽주의와 휴머니즘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극복한다. 그는 이런 사상들이 인간 중심주의와 물질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계몽주의와 휴머니즘은 인간을 폭압적인 착취로부터 해방시켰지만 그와 더불어 그만큼의 반사적 폐해를 끼쳤다. 계몽주의와 휴머니즘은 자연 생명을 인간에 복종시키면서 자연 생명의 흐름을 차단하고 파괴하여 왔으며 그 결과 죽음의 파도가 인류를 덮쳐오게 되었다. 이 시대는 거대한 전환의 시대이며, 새로운 시대는 자연 생명 자체를 토대로 하는 생명 사상의 시대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생명이란 어떤 의미일까? 생명은 생물학적 의미에서 유기적이며 재생산되고 순환하는 물질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은 생태학적 차원에서 생명체들 사이에서 또는 생명과 환경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전체를 의미하는 것일까? 혹은 그것은 기독교의 영성 개념에 바탕을 두고 셸링이나 베르그송이 철학적으로 제시한 개념 즉 물질과 의식을 포괄하는 존재로서 생명인가? 김지하의 생명 개념은 이 모든 것들을 다 포괄하는 의미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그는 이런 포괄적 개념을 동학 사상에서 지기(至氣 : 지극한 기운) 개념을 빌어 설명한다.

이런 지기의 개념과 더불어 지기의 이중적인 운동이 상정된다. 이 지기는 한편으로는 펼쳐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접혀 들어가는 이중적인 운동이다. 태극의 문양이 상징하는 것처럼, 펼쳐지면서 동시에 접혀 들어가는 운동이 만물을 생성하면서 동시에 해체한다. 이 지기는 개별과 우주 사이에 교류하는 끝없는 흐름을 이어간다. 이 운동은 한편으로는 물질적이기에 기계적이고 맹목적으로 일어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적인 것이기에 자유롭고 창조적인 운동이다.

어떻게 본다면 단순한 이런 생명 사상으로부터 다양한 사상적 가능성들이 던져진다. 그런데 이런 생명 사상은 미학적 차원에서 새로운 숙고를 요구했다.

'흰 그늘'의 미학

김지하의 생명 사상과 더불어 김지하의 사상 내부에 미학적 반성이 제기되었다. 그의 반성은 이미 1980년 중반 '천지 굿'이라는 논문이나 '민중 문학의 형식 문제'에서 발효되기 시작했다. 김지하는 여전히 예술의 힘을 믿는다. 예술은 '천지 굿'으로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힘의 표현이다.

그는 예술이 실천적 행동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 그 자체로서 이런 힘을 지닌다고 본다. 또한 그는 1980년대 문학계의 화두였던 '민중주체'의 개념을 단순히 계급으로서 민중이 아니라 죽어가는 생명으로서 민중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민중 문학은 민중의 생명을 살려내는 힘이 된다.

여기까지는 생명 사상이 그의 미학 의식에 침투하면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미학적 반성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서 하나의 근본적인 의문이 발생한다. 도대체 예술이 어떻게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내는 힘을 지니는 것일까? 어쩌면 예술의 마술적 힘을 믿었던 아방가르드 예술 정신의 한 극단으로 보이는 이런 생각은 어떤 기초를 지니는 것일까? 김지하의 책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에서 필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지녔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한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김지하는 전통적인 미학 개념인 '신명(神明)' 개념에서 그 가능성을 찾았다. 신명이란 예술이 지닌 고유한 활력을 말한다. 다른 모든 존재들도 이런 신명을 지니지만 예술은 그 형식상 이런 신명이 가장 활력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예술은 다른 생명들에게 자신의 생명력을 전달해 줄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죽어가는 생명체를 부활시키는 힘을 지닐 수 있다.

이런 신명의 개념을 김지하는 이 책에서 '활동하는 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활동의 중심은 무이다. 그것은 고요하면서도 비어있으나 그러면서 모든 생명의 활력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그의 '활동하는 무' 개념은 노자 사상의 무 개념을 연상시킨다.

이런 대답으로부터 또 하나의 물음이 발생한다. 그러면 예술이 모든 존재자들 가운데 이처럼 독특한 존재 가능성을 지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지하는 이런 물음에 대해서 예술의 독특한 형식으로서 '율려' 체제라는 개념을 가지고 대답한다. '율(律)'이란 윤율 곧 질서, 코스모스를 말하며 생명의 펼쳐지는 힘을 말한다. '려(呂)'란 혼돈, 카오스를 의미한다. 음악적으로 본다면 2박이 '율'이며, 3박이 '려'이다. '흰 그늘'이라는 개념을 여기에 맞추어 보면, '흰' 곧 밝음은 질서, '율'에 해당되고, '그늘' 곧 어둠은 혼돈, '려'에 해당된다.

여기서 '율'이 '려'를 지배하는 체계가 전통적인 지배 질서를 의미한다. 이것은 생명의 흐름을 차단하고 억압하는 죽임의 질서이다. 그러나 '려'가 '율'을 지배하면서 동시에 '율'을 포괄하는 체제가 곧 예술의 형식이다. 무질서가 질서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엇갈리는 것 즉 '엇'의 체제이다. 이렇게 '려'가 '율'과 엇갈려 결합하면 끝없는 운동, 넘치는 활력이 출현한다. 그것이 바로 예술의 생동성이다. 이런 점에서 '려율'의 체제란 예술의 본질인 신명, 즉 '활동하는 무'라는 개념에 맞닿는다.

예술은 이런 생동하는 형식을 통해 가장 탁월한 생명을 지니면서, 다른 모든 생명을 구원하는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런 활동하는 무가 불러일으키는 다른 생명체에게 야기하는 미학적 효과 그것이 곧 신명나는 '흥겨움'이다.

율려 체제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에서 김지하는 '율려', 아니 '려율'의 체제가 어떻게 다양한 예술의 형식 속에서나 또는 전통적인 예술 형식 속에서 나타나는가를 찾아 분석한다. 특히 그가 그 자신의 초기 서정시를 새로운 '려율'의 체제로 설명하는 대목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이 짧은 글에서 일일이 드러낼 수 없으니 독자가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여기에 김지하 자신이 제시한 한 가지 예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도록 하자.

"가시리 / 가시리 잇고 / 리고 가시리 잇고" (청산별곡)
"간다 / 울지 마라 간다 / … / 몸 팔러 간다." (황토)


김지하는 이렇게 두 시를 비교하면서 두 시에 나타나는 공통점을 지적한다. 그 자신의 설명은 아래 인용문에 제시되어 있다.

"다 똑 같은 말처럼 보입니까? 세 말이 전부 다른 말입니다. 모두가 '간다'는 얘기지만 우리에게 들어오는 느낌은 무엇입니까? 시를 쓰는 저 사람의 마음은 갈등하고 있다, 즉 '엇'의 상태에 들어가 있다, 하는 것이죠. '가시리', 갈 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갈 거냐? 날 두고 정말 갈 거냐?'하고 묻는 거예요. 서로 엇이죠? 이런 갈등, 사회적인 움직임이 있습니다. 엇이 약하면 행갈이의 의미가 없습니다." (203~204쪽)

생명 사상은 생명의 해방을 실천적 투쟁에 의해 해결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닌다. 투쟁 자체가 생명 개념에 대립되기 때문이다. 생명 사상의 이런 약점을 보완하면서 생명 사상을 완성하는 것이 그의 '흰 그늘'의 미학적 개념이다. 이제 예술이 그 자체 세계를 변화시키는 마술적 힘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모든 완성은 동시에 이미 자신을 파괴할 싹을 지닌다는 것이 생명 사상의 가르침이 아닐까? 그렇다면 오랜 사상적 고투에 의해 생명 사상의 완성으로 등장한 그의 미학적 의식은 동시에 그의 사상 전체를 파괴하고, 새로운 발전으로 나아가는 가능성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더 이상 김지하의 몫이 아니고, 우리들 자신의 몫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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