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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은 좌파, 방황하는 '래디컬 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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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은 좌파, 방황하는 '래디컬 시크'

[프레시안 books] 로버트 미지크의 <좌파들의 반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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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사막을 통과하던 모세가 신의 계명을 받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오른다.

모세가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자, 목적을 상실한 이스라엘 백성은 당황하고 만다. 그들은 자신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줄 누군가를 잃어버리자, 금송아지 모습으로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면서 환락의 파티를 벌인다. 돌아온 모세는 그 모습을 보고 진노하여 내려 받은 십계명 석판을 땅에 내동댕이쳐 박살낸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좌파들이 처한 상황을 묘사하고자 이보다 더 좋은 비유를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소련은 붕괴했고, 그 이후 소문으로만 들려오던 스탈린의 독재와 그 폐해가 드러났다.

남아있는 공산주의 국가의 모습도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국가인 중국을 빼고 나면, 3대 세습을 노리는 왕조 국가 북한과 형제 세습이 진행 중인 쿠바가 그나마 사회주의 국가의 명맥을 잇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는 작업은, 현재로서는,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에 올라간 정도가 아니라, 헌금을 떼어먹고 달아난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다. 서구권의 국가들 뿐 아니라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준주변부 국가에서도 현실 사회주의의 가능성 혹은 '혁명'의 가능성은 사회주의 내지 좌파 운동을 버티게 해주었다. 그런 이상이 있기 때문에 현실 속의 어려움을 참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망했고, 중국은 변했고, 쿠바는 초라해졌다. 모세와 아론과 레위인이 모두 사라진 지금, 좌파란 무엇이며 어떻게 좌파로서 살아남고 버텨나갈 수 있을 것인가?

<좌파들의 반항-마르크스에서 마이클 무어에 이르는 비판적 사고>(서경홍 옮김, 들녘 펴냄)의 저자 로버트 미지크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로버트 미지크는 우리가 새로운 모세를 찾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금송아지 앞에서 춤을 잘 추면서 환호받는 이들에게 더 후한 점수를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목과 달리 이 책은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적 저항의 필요성을 강조하거나 역설하는 책이 아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좌파적인 색체를 드러내는 사람들의 가치를 재평가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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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파들의 반항-마르크스에서 마이클 무어에 이르는 비판적 사고>(서경홍 옮김, 들녘 펴냄)>. ⓒ들녘
그는 자신이 수집한 몇 가지 사례들을 검토하며 좌파적 움직임의 현주소를 포착하고, 그 가치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한다. 동시에 지난 시대 좌파적 행동들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 이유를 비판한다. 전자는 책의 전반부, 후자는 후반부를 이루고 있으며 그 연결은 그다지 매끄럽거나 논리적으로 완결되어 있지 않다.

우선 책의 전반부를 검토해보자. 체제 비판적인 발언을 하는 유명인들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본다면, 저자가 손에 꼽는 '래디컬 시크'들의 공통점은 사실 그리 크지 않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슬라보예 지젝은 한국에도 잘 알려진 좌파 학자들이고, 나오미 클라인은 저술가 겸 운동가이며, 마이클 무어는 아카데미 및 칸 영화제 수상에 빛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그런데 이 목록에 독일 밴드 '우리는 영웅'의 보컬리스트인 유디트 홀로페르네스가, 혹은 독일의 희곡 작가 르네 폴레쉬가 끼어들어갈 때, 그들을 알 턱이 없는 한국인 독자는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대체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혹은, 저자가 이 사람들을 한데 묶어 새로운 시대의 좌파로 손꼽는 이유는 무엇인가? 불행하게도 저자는 독자들이 대체로 이 사람들의 이름에 친숙하거나, 적어도 낯설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등장인물의 활약에 대한 묘사는 크로키에 가까우며, 속도감 있게 치고 나가는 문체 역시 이 경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본인이 공산주의자라고 떠벌이는 덩치 큰 슬로베니아 출신 정신분석가와 '팝의 작은 기적'이라고 불리 우는 독일 밴드의 여성 보컬 사이에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저자의 설명만으로는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저자가 스스로 설명한 집필 의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러한 '반항아'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본인이 좌파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혹은 '좌파입네' 하면서 인기를 끌고 돈을 버는 유명인들이 이 세상을 바꾸는 데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미지크 역시 이와 같은 비판을 잘 알고 있다. 이 책의 전반부는 그러한 비판에 대한 스타카토식 답변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이 이러한 유명 인사들을 소개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반항아들과 함께 사는 법을 분명히 배웠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자본주의를 변화시키는 반항적인 자극이다. 자본주의는 이의를 제기할 때 설득하는 법을 배웠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위대한 힘이다. 하지만 지배 질서의 모순된 공간이 그 위험성을 제거하지 못하는 파괴적인 에너지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20~21쪽)

이 책에서는 '실패 사례'중 하나로 다루어졌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의 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왜 당신들은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당신들의 음악을 거대 유통사를 통해 판매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그들은 '마르크스가 살아있었다면 본인의 책이 '반스 앤 노블스'에서 팔리는 것을 보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목소리마저도 자본주의적으로 유통된다. 그리고 '래디컬 시크'들은 바로 그런 구조 속에서 명성과 부를 획득한 사람들이다. 저자는 좌파라는 이름을 걸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명인사가 된 그들이 "지배 질서의 모순된 공간"에 살고 있지만, 그들에게 파괴적인 에너지가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작은 물방울이 수십만 번 떨어지면 두꺼운 바위를 뚫을 수도 있다. 혹은 이러한 목소리와 움직임들이 우리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화학 변화를 일으켜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원동력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자의 이러한 판단과 변명은 다소 궁색하다는 인상을 준다.

왜 하필 이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어야 하는가? 이런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런 방식이 아니라면 해법은 없는가? 이와 같은 질문을 품고 책의 후반부로 넘어가면, 우리는 저자가 왜 이렇게 '요즘 좌파'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3

1부와 달리 2부에서는 실패 사례를 다룬다. 그 실패 사례들은 현재의 것이 아니다. 과거의 것, 특히 1960~70년대에 시도된 문화적, 폭력적, 전복적 시도들이 실패 사례로 다루어지고 있다. 히피 운동, 체 게바라의 폭력적 게릴라 투쟁, 그 체 게바라에 대한 숭배, 독일의 적군파 테러리스트 안드레아스 바더의 테러 행위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 등. 미지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게바라 신화는 게바라 자신과 마찬가지로 혼란스럽다. 그를 통해 좌파 특유의 폭력에 대한 숭배가 입증된다." (183쪽)

저자는 체 게바라에 대한 숭배가 일종의 키치로 전락한 지 오래라고 판단한다.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뀔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료를 가혹하게 권총으로 처형하는 체 게바라의 이면을 알면서도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과연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안드레아스 바더에 대한 비판도 그렇다. 야성미가 넘치는 남성이었던 그에 대한 숭배는, 적군파의 지적 리더였던 울리케 마인호프가 주장하던 몇몇 테제들에 대한 고찰과는 별개로, 그다지 지적이지도 않고 좌파적이지도 않다. 폭력 그 자체에 대한 열광과 숭배가 과연 지난 시대 좌파들을 지배하고 있었는지와 별개로 그러한 경향성을 옳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왜 저자는 이렇게 히피 문화에 부정적일까? 그는 현재의 래디컬 시크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자율성, 주류의 세계로 잠입한 참여의 분위기와 함께 성장했다는 사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지 못했더라면 "이 모든 저항은 또 다시 히피적인 문화가 되고 말았을 것"(54쪽)이라고 단정한다. '히피적'이라는 단어를 일종의 욕설로 쓰지 않는 한, 이런 어법은 성립할 수가 없다. 히피들에게 돈 빌려줬다가 못 받기라도 했을까?

저자가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시피, 히피 운동을 이끌어낸 원동력은 사실상 지금까지도 (그가 칭송하고 또 인용하는 폴레쉬의 연극에 등장하는 대사처럼)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다. 진짜 삶,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속받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는 그런 요구 말이다. 폴레쉬의 연극도 그렇거니와, '우리는 영웅'의 노래 가사에도 그런 내용은 당연히 등장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히피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만든 가수들과, '래디컬 시크'를 위해 노래하는 사람들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폭력에 대한 저자의 엄격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과거의 좌파들과 달리, 그들을 비판하는 자신은 체 게바라의 폭력적인 행동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에서 도덕적 차별성을 구한다. 하지만 미지크가 래디컬 시크의 대표주자 중 하나로 인용하는 지젝은, <로베스피에르 : 덕치와 공포 정치>(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지음, 슬라보예 지젝 엮음, 배기현 옮김, 프레시안북 펴냄) 및 마오쩌둥의 <마오쩌둥 : 모순론·실천론>(마오쩌둥 지음, 슬라보예 지젝 엮음, 노승영 옮김, 프레시안북 펴냄)에 서문을 쓰기도 한 바로 그 슬라보예 지젝이다.

물론 지젝은 무분별한 폭력을 찬양하지 않지만, 폭력의 사용 그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도 않는다. 세계에 핵전쟁이 발생할 경우 대부분의 지구인들이 목숨을 잃지만, 중국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이 더 많기 때문에 살아남아 승리할 것이라는 마오쩌둥의 주장에 대한 지젝의 최종적인 평가를 들어보자.

"이러한 입장이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수백만을 희생시킨 지도자의 공허한 제스처일 뿐이라며 부정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이러한 부정적 태도의 이면에는 "우리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라는 기본적인 메시지가 깔려 있다. "제1조는 반대하는 것이요, 제2조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은 전쟁에 대한 태도로서는 유일하게 올바른 태도가 아닌가? 이러한 태도에는 분명히 공포스러운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이 공포야말로 자유의 조건인 것이다." (<마오쩌둥 : 모순론·실천론>, 49~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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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변화를 꾀한다는 명분 하에 불필요한 폭력을 행사하고, 서로에게 불친절하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하며, 책임지지 못할 공허한 이상론만을 늘어놓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바로 그러한 기준 하에 저자는 1960~70년대의 좌파들과 그들이 남겨놓은 이미지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특히 체 게바라에 대한 숭배를 넘어 그의 아들을 초청해놓고 지혜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좌파들의 모습은 실소를 자아내게 하며, 충분히 비판받을 만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잣대를 들이댈 때, 저자가 칭송하는 '래디컬 시크'들도 비판의 칼날을 피할 수는 없다. 밥 딜런과 유디트 홀로페르네스의 차이는, 전자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노래가 진정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반면, 후자는 애초부터 그런 완전한 성과 따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일 뿐이다. 밥 딜런을 듣는 히피들을 이상주의적이라고, 자본주의의 시스템 속에서 놀아나고 있을 뿐이라고 비웃는다면, 유디트 홀로페르네스를 듣는 사람들 역시 같은 비아냥거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와 같은 움직임, 후기 자본주의의 산물로서 태어난 문화 생산자들이 내놓는 좌파적인 발언과 태도에서 세상을 전복할 수 있는, 지금처럼 자본주의가 다 품어낼 수 없는 어떤 이야기들이 담겨있을 수 있다는 입장을 펼친다. "지배 질서의 모순된 공간이 그 위험성을 제거하지 못하는 파괴적인 에너지"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우리는 영웅'의 보컬리스트 유디트가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요…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하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대중 앞에 서는 사람치고 이유가 너무 초라하다. 그러나 철저하게 저항하려고 했던 많은 사람들이 초라하게 사라져갔다. 완벽하지 않은 것이 칭찬을 듣는 법이다." (149쪽)

파괴적인 에너지를 기대하지만, 철저하게 저항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초라하게 사라져갔다. 그리고 그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칭송한다. 이와 같은 혼란스러운 입장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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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비유로 돌아가 보자. 좌파는 모세를 잃었다. 약속의 땅, 요단강 너머의 예루살렘의 꿈도 잊힌 지 오래다. 역사 발전의 법칙을 거슬러가며 현실 속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또 다른 예루살렘은 70여 년 만에 허물어졌다.

'정통 좌파'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미지크가 '래디컬 시크'라고 부르는 문화적 저항 행동 중 상당수는, 바로 그러한 현실과의 타협에서 나온 산물일 것이다. 예루살렘에 도달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니, 이곳에서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금송아지를 만들고 춤을 추는 그런 행동일 뿐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물론 미지크는 그와 같은 입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반항아들은 그들이 지금 취하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시대의 정점에 있"(252쪽)다고 생각하며, 국가를 지향하는 거대한 이분법과 결별한 것이 지금의 좌파가 가지고 있는 미덕이라고 본다. 새로운 반역도 자본주의를 넘어서거나 폐지하지는 못할 것이지만,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를 변화시킬 것"(259쪽)이라고 저자는 자신 있게 말한다.

이와 같은 입장이 있는 반면, 한편으로는 이렇게 자본주의를 '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거짓된 약속과 믿음에 대해 모두,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등장하는 바틀비의 말을 빌려, '나는 그렇게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I would prefer not to)'의 정치학을 동원해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도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 속에서 진통제 역할을 수행하는 문화적 생산품들, 정치적 올바름의 탈을 쓴 기존 미디어의 새로운 콘텐츠를 거부하는 것, 그것으로부터 진정한 변화와 혁명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젝의 입장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미지크가 말하는 '래디컬 시크'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나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미덕은 바로 이와 같이, 21세기의 현 시점에서 '좌파'라는 것이 얼마나 길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에서 '우리 편', 혹은 '새로운 좌파'를 찾으려 하고, 과거의 좌파들과 필요 이상으로 대립각을 세우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이는 과거에서 현재를 바꾸기 위한 동력을 끌어내고자 할 수도 있고, 혹은 일체의 과거 뿐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도 거부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어떤 수준의 혼돈에 빠져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어림짐작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래디컬 시크'들을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지금으로서는 '나는 그렇게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라는 답을 들려드릴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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