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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시계탑 건물'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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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울대병원 '시계탑 건물'의 진실은…

[근대 의료의 풍경·54] 대한의원

1906년 9월, 7년 반 동안 대한제국 의료의 중추 역할을 해 온 광제원과 의학교를 폐지하고 대한의원을 창설한다는 계획이 공포되었고, 마등산(馬凳山, 지금의 서울대학교병원 자리)에 병원을 건립하기 위해 주변 가옥과 토지를 매입한다고 고시되었다.

처음부터 마등산 일대가 병원 부지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병원 장소에 관한 최초의 논의가 있었던 1906년 7월의 제8차 '한국 시정 개선에 관한 협의회'에서 통감 이토는 서대문 밖의 화약제조창 땅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대한제국 대신들은 "그곳은 장차 궁전을 건축할 곳이므로, 그곳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황제의 윤허를 받아야 한다"면서 난색을 표명했다.

그러자 이토는 "새 병원의 설립은 대한제국을 위한 가장 충량하고 유익한 일인데, 황제가 궁전을 짓는다는 구실로 진보적인 국가 사업을 막겠다니 대한제국의 장래를 익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조소하며 대안을 제시하라고 했고, 대신들은 공원(지금의 탑골공원)을 제안했다. 이에 이토는 공원 땅은 1000평 밖에 안 되어 너무 좁을 뿐만 아니라 물과 공기도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이밖에 용산의 일본군 병영도 거론되었지만 교통이 나쁘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않는 등 병원 부지 문제는 쉽게 결말을 보지 못했다.

그러고도 여러 차례 난항을 겪은 뒤에, 마침내 마등산 일대 2만 6829평의 땅이 새 병원 부지로 결정되었다. 이곳이 병원 터로 선정된 이유에 대해서 뒤에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을 지낸 사토 코죠는 <조선의육사(朝鮮醫育史)>(1956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다행히 함춘원 남쪽 언덕(마등산)을 부지로 골랐다. 비록 동북쪽에 치우쳐 있다는 점이 흠이었지만, 지대가 높고 건조하며 수목이 울창하고 공기와 물이 깨끗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해서 훨씬 나았다."

▲ 병원 건물이 지어지기 전의 대한의원 터. 뒤에 낙산이 보인다. ⓒ프레시안

마등산 일대가 부지로 확정된 직후 시작된 토목공사는 1906년 말에 대략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1907년 1월 28일, 대한의원 본관 및 부속 건물 신축 공사가 그해 8월 말 준공을 목표로 시작되었다. 설계는 탁지부 건축소와 야바시(矢橋賢吉)에게, 실제 공사는 건축가 오쿠라(大倉粂馬)의 손에 맡겨졌다.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던 공사는 마무리 단계에서 차질을 빚게 되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인한 고종의 강제 양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1907년 7월부터 의병 봉기가 거세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준공이 미루어지다 11월 병원 본관(시계탑 건물)이 완공을 보게 되었다.

그 뒤로도 계속 병원 공사가 진행되어 1908년 10월 부속 학교 교사를 제외한 나머지 건물들이 완공되자 1년 반 이상을 미루었던 개원식이 이토 히로부미의 일정(이토는 통감으로 재임하면서도 본국 정부와의 협의 등을 위해 일본과 한국을 여러 차례 오갔다)에 맞춰 10월 24일에 거행되었다.

순종 황제는 개원식에 즈음하여 시종원경 윤덕영(尹德榮)을 통해 다음과 같이 사실상 이토 히로부미와 일제의 의도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칭송한 <대한의원 개원 칙어>를 발표했다.

"짐이 생각컨대 국운의 융잠(隆潛)은 국민의 건비(健痺)에 인함이 큰지라. 우리나라의 현상을 살피건대, 위생사상이 매우 유치하고 구료기관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므로 짐이 태황제(고종) 폐하의 성지를 소술(紹述)하여 유사(관계 기관)로 하여금 장(長)을 우방(일본)에 취하여 의술의 보급과 진흥함을 꾀하고자 하여 대한의원을 창설함이러니, 유사의 충근진직(忠勤盡職)함을 인하여 이제 공사가 완성되어 개원의 식을 거하니, 대대 원무가 이미 잘 되고 있어 그 효과의 서광이 점차로 가까이 미쳐 사민(四民)이 그 혜택을 욕(浴)함은 짐의 마음에 만족하는 바이나 그 임무는 매우 무겁고 그 도는 오히려 멀도다. 짐은 정부 당국의 협조와 본원 서료(직원)의 분려함을 부탁하나니 (…) 신료들은 짐의 뜻을 잘 깨달을지어다."

▲ <대한의원 개원 칙어>.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

일제의 "보호국" 대한제국의 국가 병원 구실을 할 대한의원의 위용과 개원식의 장려함에 대해 일본인 기자 아사히(旭邦)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0월 24일 모범 병원 대한의원의 개원식이 거행되었다. 한성에 있는 일본, 한국, 청나라, 구미의 귀한 신사숙녀와 명사들이 참석했는데 그 수가 1000명 이상에 달했으며 놀랄 정도로 성대했다. (…) 대한의원의 본관은 2층으로, 진료소, 사무소, 응접소 및 7동의 병실로서 총건평이 1360여 평이며 연와(煉瓦)로 지어졌다. 대규모 둥근 건물의 아름다움은 한성의 전 시가를 압도하기에 충분할 정도이며, 그 규모와 설비가 일본 유수의 병원에 비해서도 조금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빽빽한 소나무가 배경이 되어 한층 미관이 돋보인다. 게다가 지대가 높고 건조하며 물이 맑아서 자연과 인공의 틈이 없어 거의 이상적인 병원이다."

▲ 대한의원 개관식 기념 엽서. 아래의 인물이 대한의원 원장 사토 스스무(佐藤進)이다. ⓒ동은의학박물관

개원식 이후에도 공사가 계속되어 부속의학교 건물이 1년 남짓 뒤인 1909년 11월 16일 준공됨으로써 1906년부터의 대역사(大役事)가 마무리되었다.

이 3년 동안의 대공사로 병원 본관 건축 및 설비비 35만7천여 원과 교사 건축비 5만2천여 원 등 당시의 형편으로는 엄청난 금액인 40여만 원(당시 정부의 1년 총 예산의 2% 가량)이 소요되었다. 물론 이 거액은 고스란히 대한제국의 부담이었으며 그 태반이 일본 차관이었다. 거족적으로 국채 보상 운동(20만 원가량 모금되었다)이 벌어지던 당시에, 빚으로 세운 이러한 최신식 거대 의료기관이, 그것도 일차적으로 일제와 그들의 주구를 위해 세워진 것이 과연 발전이며 근대화일까?

▲ 위정척사파의 거두 최익현(1833~1906년). 차관 문제 등을 거론한 것을 보면 그가 무조건 쇄국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물정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케 된다. 최익현은 을사늑약 체결 뒤, 70세가 넘은 나이임에도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곧 싸움에 패하고 일본군에 의해 쓰시마(對馬島)로 끌려가 그곳에서 별세했다. ⓒ프레시안
일본 차관 도입은 일찍부터 많은 사람이 우려하는 바였다. 최익현(崔益鉉, 1833~1906년)은 이미 1904년에 국왕에게 차관을 들여오지 말 것을 진언했다.

"만일 외국에서 차관을 들여오려 하면 반드시 저당을 잡혀야 할 것이며, 그것은 응당 토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토지는, 폐하께서 그 토지와 인민을 위탁받았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것을 남에게 주려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신은 그 차관을 어디에 쓸 것인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 다소를 막론하고 차관을 들여오는 날이 바로 나라가 없어지는 날입니다. 그리고 요즈음 이 조약이 이미 체결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신은 더욱 애통해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차관을 들여오지 않았으니 신은 즉시 그 문건을 취소하고 국고를 절약하여 국력이 조금이라도 신장된 뒤에 의논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황현의 <매천야록>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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