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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의 병원, '대한의원'을 아십니까?

[근대 의료의 풍경·53] 대한의원

악몽 같던 일제 강점 기간을 하루라도 늘려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이 일제에게 병탄되었던 기간은 흔히 말하는 36년이 아니라 35년, 그것도 13일이 모자라는 35년이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이 온전한 나라 구실을 하지 못한 것은 짧게 잡아도 1905년 말부터이다.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강압과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 을사5적의 부화뇌동, 그리고 국왕의 책임 방기로 을사늑약이 체결됨으로써, 근대 세계에서 군사 작전권과 더불어 대외적 국가 기능의 핵심인 외교권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을사늑약 체결 후 잠시 일본에 돌아갔다가, 1906년 3월 2일 통감 자격으로 다시 한국에 온 이토는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도 속속들이 간섭하기 시작했다. 을사늑약 자체가 불법이거니와 외교권 위임만을 규정한 늑약 내용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토는 1909년 6월 14일까지 3년 남짓 통감으로 재임하면서 행정, 사법, 입법, 재정, 군사, 경찰, 보건의료, 교육 등 한국이라는 국가의 모든 기능을 장악해 갔다. 후임자 소네에게 통감 자리를 물려줄 때에는 이미 대한제국은 이름만 남았을 뿐 완전한 식민지와 다름없었다.

더욱이 1907년 7월 20일,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 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을 새로운 황제로 세움으로써 "황제 위의 통감"임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이토가 한국을 병탄할 의도는 없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병탄에 이르는 길을 모두 닦은 그에 대해 얼토당토않은 평가이다. 이토가 병탄의 시기를 조금 늦추려 했다면, 그것은 한국이라는 식민지에서 자신의 라이벌인 일본 육군 군벌이 득세할 기회를 차단하려는 정략 때문이었을 뿐일 것이다.

▲ 1906년 3월 2일 한국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왼쪽)와 조선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오른쪽). ⓒ프레시안

통감부가 설치되자마자 통감 이토는, 국가는 아랑곳없이 개인 잇속 차리기에만 급급한 한국인 대신들과 구성한 '한국 시정 개선에 관한 협의회'를 통해 통치를 해 나갔다. 의료에 관한 문제가 1906년 4월 9일에 열린 제3차 협의회에서부터 논의된 것을 보면 일제가 의료(계)의 장악을 매우 중요한 과제로 생각했음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제3차 협의회에서 논의된 핵심은 한성에 있는 여러 병원을 통합하자는 것으로, 이토는 다음과 같이 복안을 제시했다.

"경성에는 한성병원(일본 거류민단 병원), 적십자병원, 내부 소속의 광제원, 학부 소관의 의학교 부속병원이 있다고는 하나 전문적인 병원의 체계와 설비를 갖춘 것은 한성병원뿐이다. 다른 세 병원은 어느 것이나 규모가 작고 분립되어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으니 통합해서 적십자병원 하나로 하면 규모가 완전한 것으로 될 것이며, 종두 사업과 같은 것도 신설 기관에서 하는 것이 옳다."

이에 대해 학부대신 이완용이 의학생의 실습을 위해서는 병원이 꼭 필요하므로 아예 의학교를 통합되는 병원에 부속시키자는 수정안을 제시했으며, 이를 이토가 받아들임으로써 통합의 대략적 방침이 정해졌다. 그리고 통합한 이후의 예산은 종두 사업, 광제원, 의학교 및 부속병원의 해당 예산과 적십자병원에 대한 황실 지원금을 합쳐 사용하되 차차 증액해 나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 다음 해에 설립된 병원이 대한의원이다. ("대한의원"이라는 이름도 이토가 작명했다)

이렇듯 일제(이토)가 중심이 되고 한국인 대신들이 부화뇌동하거나 한술 더 뜬 의료 기관 통폐합 계획에 대해 당시 여론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예를 들어 4월 18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협의회의 결정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병원과 의학교는 다다익선인데, 이제 이를 병합코자 하는 숨은 뜻(裏由)이 통감의 권고라 하니 전국에 한 군데 적십자사(병원)만 있으면 허다한 인민의 질병을 능히 다 치료할는지. 만일 자비, 제중하는 마음이면 병원과 의학교는 확장하여 인민의 위생상 사업을 날마다 한 걸음씩 더 나아가게 할 것이어늘 이제 오히려 축소하고 통합하니 (…) 한마디로 소위 정부 대관이란 자들이 말 잘 듣는지(廳從) 여부를 시험코자 함이라. 아! 저 대관이란 자들은 대체 무슨 뜻으로 관립(官立)을 통폐합(廢縮)하여 공립으로 대신하는가? 교육 확장이니, 위생 확장이니 하면서 이와 같이 통폐합하면 이는 자기 권리를 스스로 버리는 것이오"

이렇듯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표출된 여론은 이토가 제시한 통폐합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의료 기관을 유지, 확장함으로써 의료 공급을 더 늘려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여론은 일제의 이런 조치가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책략과 관련이 있다는 점도 제대로 간파하고 있었다.

▲ <대한매일신보> 1906년 4월 18일자 "(의료 기관) 합병은 무슨 뜻(合倂何意)?". ⓒ프레시안

이러한 여론의 거센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통감부는 원래 의도대로 병원 통폐합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1906년 6월에는 일본 육군 군의총감 사토 스스무를 "병원 부지를 선정하여 병원을 건립하는 일은 물론, 병원 조직을 완전하게 하며 의학의 각 전문 분야를 양성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일본왕(天皇)의 명의로 실무 총책에 임명했다.

사토는 7월에 부임하여 일본인으로만 대한의원 창설위원회를 구성하고는 설립 경비 책정, 부지 설정, 관제(법령) 마련 등 일체 업무를 빠르게 진행해나갔다.

여기에서 창설위원장 사토를 비롯하여 창설위원 8명의 면면에 대해 알아보자.

1) 사토 스스무(佐藤進, 1845~1921년)

사토는 1869년 메이지 유신 정부가 제1호로 발급한 공식 여권으로 독일 베를린 대학 의학부에 유학하여 졸업했으며, 1874년에는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의학 박사가 되었다. 그는 또한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서 당대 최고의 외과 의사인 빌로트의 제자가 되었다(제29회).

1875년 일본으로 돌아온 사토는 도쿄의 준텐도(順天堂)병원과 도쿄 제국대학 병원장을 거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는 군의총감(軍醫總監)을 역임하면서 일본 의학, 특히 외과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사토는 1895년 3월 청일전쟁의 강화 교섭 차 일본에 왔다가 일본 극우파의 저격에 부상을 입은 리훙장(李鴻章)을 치료했으며, 러일 전쟁 때의 공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

사토는 조선과 중국의 의학 분야를 장악하기 위해 설립된 동인회(同人會)의 부회장 재임 시 이토 히로부미의 요청으로 한국에 와서 대한의원 창설준비위원장으로 의료계 병탄의 주춧돌을 놓았다.

페스트균을 발견한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理柴三郞, 1852~1931년), 적리균을 발견한 시가 키요시(志賀潔, 1871~1957년), 매독 특효약인 살바르산 606을 개발한 하타 사하치로(秦佐八郞, 1873~1938년) 등 일본 근대 의학 초기의 "영웅"들이 모두 동인회의 중요 멤버였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사토가 핵심이었다.

사토는 1907년에는 고문(의료에 문외한인 내무대신 겸 대한의원장 이지용, 임선준을 대리하여 사실상 원장 역할)으로 대한의원 운영을 좌지우지했으며, 1908년부터 1909년초까지는 명실상부한 원장으로 대한의원의 기틀을 잡았다.

요컨대 일본 의학의 근대화와 대외 팽창에 선봉장 역할을 한 사토 스스무는 의학 분야의 이토 히로부미였다.

▲ 사토 스스무와 그가 1907년 무렵 쓴 휘호 "견인역행(堅忍力行)". 사토는 그 휘호대로 역경을 굳세게 이겨내며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사토의 그러한 삶과 인생관이 누구에게나 긍정적인 것이었을까? ⓒ프레시안

2)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 1862~1921년)

▲ 명필로도 이름을 날린 일본 후작(侯爵) 이완용이 쓴 고쿠분의 묘비명. 고쿠분의 무덤은 쓰시마의 사찰 고쿠분지(國分寺)에 있다. ⓒ프레시안
고쿠분은 어렸을 때부터 부산 초량의 어학소와 도쿄 외국어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으며, 1879년 부산 영사관의 통역 수습을 시작으로 오랫동안 한국에서 통역관 역할을 했다. 그는 잠시 미국에서도 근무했으며,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의 수행원으로 다시 한국에 와서 을사늑약과 경술늑약("일한 병합 조약") 체결 시 통역으로 활약했다.

1906년 통감부 서기관 겸 통감 비서관, 1910년 조선총독부 인사국장 겸 중추원 서기관장 등을 거쳐 1917년 1월에는 이왕직(李王職) 차관에 임명되었다. 말단 공무원에서 시작하여 30여년 만에 차관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1921년 9월 6일 한 연회장에서 급사한 고쿠분은 1년 뒤 고향인 일본 쓰시마(對馬島)에 안장되었으며 이완용이 묘비명을 썼다.

3) 고야마 젠(小山善)

▲ 고야마가 작성한 이토 히로부미의 사체 검안서. 왼쪽 하단에 "이토 공작 총창(伊藤 公爵 銃創)"이라는 설명과 함께, 상처 난 구멍(創口, 사입구)과 총알(銃丸) 위치가 각각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프레시안
고야마는 일본 적십자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던 1905년 11월 이토의 주치의로 한국에 와서 여생을 한국에서 지냈다. 통감부 기사(技師), 대한의원 치료부장, 시종원(侍從院) 전의(典醫)를 지냈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이왕직(李王職) 전의(1911~1919년?)를 지내며 고종과 순종의 건강을 돌보았다.

통감을 그만 두고 일본으로 돌아간 이토가 1909년 10월 중국 하얼빈을 방문했을 때, 한국에서 근무하는 고야마를 주치의로 대동했다. 그만큼 이토의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일 것이다. 고야마는 10월 26일 안중근의 저격 뒤 이토를 치료했으나 목숨을 구하는 데는 실패했고 주군(主君)의 사망을 확인했다. 그 뒤 고야마는 안중근의 재판 과정에서 증인과 감정인으로 이토의 죽음이 안중근의 저격에 의한 것이었음을 거듭 확인했다.

4) 사사키 시호지(佐佐木四方志, 1868~?)

사사키는 1894년 도쿄 제국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곧 육군 3등 군의로 잠시 군대에서 근무하고는 그 뒤 민간 병원에서 활동했다. 1904년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입대했고, 그 무렵 한국에 온 것으로 생각된다.

1906년 2월에는 동인회의 주선으로 광제원 의장(醫長, 진료부장 격)을 맡아 이때부터 한국 의료계의 병탄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1907년 대한의원 위생부장, 1908년 내부 위생국 보건과장 겸 의무과장, 시종원 전의 등을 겸직하며 한국 의료계를 실무적으로 장악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공직에서 물러나 용산 동인의원과 그 후신인 철도병원 원장을 지냈다.

5) 고다케 츠쿠지(小竹武次)

고다케는 1896년부터 한국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했으며, 1900년 5월부터 의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07년 대한의원 설립 뒤에는 교육부장, 의육(醫育)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10년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 1907년 4월 24일 의정부에서 탁지부로 보낸 공문. 대한의원 교육부장 고다케에게 연봉과 주택비(家舍料)를 위생부장 사사키와 같이 지급하라는 내용이다. 고다케는 의학교 시절 상관이던 지석영을 제치고 대한제국 의학교육의 책임자가 된 것이다. ⓒ프레시안

6) 고지마 다카사토(兒島高里, 1859~?)

고지마는 1892년 도쿄 제국대학 약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적십자사병원에서 근무하다 1906년 통감부가 개설되면서 한국에 와서 통감부 기사, 대한의원 약제관으로 활동했다. 강점 뒤에는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위생과에서 기사로 일했다.

7) 구니에타 히로(國枝博, 1879~?)

구니에타는 1905년 도쿄 제국대학 건축과를 졸업하고 1906년 한국으로 와서 한국 정부 촉탁으로 근무하다 1907년 6월에는 통감부 기사로 임명받았다.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토목국 영선과에서 기사로 근무했다.

구니에타는 대한의원 건축을 행정적으로 지원했다. 대한의원의 설계 책임자는 야바시(矢橋賢吉)였고, 건축 책임자는 오쿠라(大倉粂馬)였다.

8) 요시모토 준료(吉本潤亮)

요시모토는 1905년 무렵 한국에 와서 대한국적십자병원 창설에 관여했으며, 그곳에서 주임으로 일했다. 대한의원에서 근무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일제 때는 주자동(壽町)의 경성의원(京城醫院) 원장으로 일했으며, 1915년 9월 고종과 순종으로부터 대한적십자병원과 대한의원 창설에 대한 공로로 하사금 1000원을 받았다(<순종실록 부록> 1915년 9월 18일자). 때늦은 하사금 수여가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이렇듯 대한의원 창설위원회는 단 한 사람의 한국인도 없이 일본인만으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측근, 동인회 관계자, 그리고 통폐합 대상인 광제원, 의학교, 적십자병원에서 일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여생을 한국에서 지내며 일제의 한국 지배에 기여했으며 그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누린 것으로 보인다.

의학교 및 부속병원, 광제원, 적십자병원 등을 통폐합하여 1907년 3월에 세워진 대한의원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또 그 이름 "대한(大韓)"과도 달리, 설립 과정부터 운영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일본제국주의(자)의 것이었다.

그 전신 격인 의학교와 병원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던 한국인들은 대부분 퇴출되거나 정리 해고되었으며, 해임을 면한 경우에도 지위와 역할은 훨씬 축소되었다. 당시 나라 형편에 비추어 볼 때 웅장한 건물, 최신식 설비, 잘 정비된 병원 조직을 자랑하는 대한의원이었지만 운영자나 이용자나 모두 일제와 그 하수인들이 몸통과 팔다리를 이루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막대한 경비를, 그것도 일본 차관을 얻어 부담했지만 실속 없는 물주 노릇이나 하는 깃털에 불과했다.

▲ 착공식과 제막식. (위) 1906년 9월 무렵, 대한의원 착공 때의 사진. 지금의 서울대학교병원 자리이다. A가 이토 히로부미, B가 이완용이다. 사진 속에 대한의원 창설위원들도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잘 식별되지 않는다. (아래) 경술국치 꼭 100년이 되는 어제(8월 29일), 쏟아지는 빗속에서 식민주의 청산과 동아시아 평화를 염원하는 일본과 한국의 시민들이 모여 "통감 관저 터 표석" 제막식을 가졌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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