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30일
1919년 봄 한국 임시정부를 칭하는 조직 7개가 나타났다. 그중에는 전단만 뿌렸을 뿐,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것도 몇 있었지만, 서울에서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와 연해주에서 조직된 노령임시정부, 그리고 상해임시정부는 상당한 수준의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세 조직은 그 해 9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임시 정부 수립에 나선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에 임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널리 선전되면서 독립의 희망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세 운동이 예상 외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이 희망은 더욱 고무되었다.
그 해 초 고종이 죽은 것도 계기가 되었다. 그 얼마 전까지도 상해의 독립운동가 중에는 고종을 조선에서 탈출시켜 '망명 정부'를 만들 구상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임시 정부나 망명 정부나 실제 통치권이 없다는 점은 마찬가지지만, 망명 정부는 호의적인 나라들에게 실체를 인정받기에 훨씬 유리한 조건이다.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촉구하고 지도하는 데도 역시 유리한 조건이다. 명분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임시 정부 없이도 독립운동은 가능하고, 실제로 해외 독립운동의 상당 부분은 상해임시정부와 아무 관계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라는 이름이 있으면 더 많은 독립운동을 이끌어내는 데도, 그리고 독립운동을 더욱 효율적으로 조율하는 데도, 또 독립운동에 대한 다른 나라의 도움을 청하는 데도 좋은 조건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소수의 사람들이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대표성을 갖기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 이념이나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각기 임시 정부를 칭하며 난립한다면 대내적으로도 대외적으로도 간판의 가치가 없다. 그래서 1919년 중에 큰 조직들이 통합해서 단일 임시정부를 만들었고, 1945년까지 단일 임시정부가 유지된 것은 '임시정부'의 한계 내에서는 최대한의 대표성을 일궈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임시정부는 1919년에서 1932년까지 상해에 있었고 1940년에서 1945년까지 중경에 있었다. 1932년에서 1940년 사이에는 항주, 진강, 장사, 광동, 유주, 기강 등지를 옮겨 다녔는데, 그 기간에는 활동이 저조했으므로 임시정부 소재지로 중요한 곳은 상해와 중경이었다. 그중 중경은 중일전쟁의 상황으로 부득이하게 중국 국민당 정부를 따라간 것이고, 임시정부가 선택한 장소로서 의미 있는 것은 상해였다.
상해는 임시정부의 대내적 기능과 대외적 기능이 겹쳐지는 곳이었다. 대외적 기능은 여러 외국과의 교섭인데, 당시 상해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국제화된 도시였다. 대내적 기능은 재외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이끄는 것인데, 중국은 가장 많은 한국인들이 나와 살고 있던 나라였다. 중국 정부의 태도는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외적 요인이었다.
1919년 파리 강화회담 참석 좌절로 임시정부의 대외적 기능이 막히자 임시정부의 기능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한 것은 임시정부의 목적이 외교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었는데,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에 집중하면서는 민족주의에 투철하지 못한 이승만을 축출했다.
무장 투쟁의 현장인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상해에서는 독립운동을 이끄는 데도 제약이 있었고, 중국의 혼란한 상황 때문에 이 제약이 더 심했다. 초기에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를 통해 만주 지역 독립군과 연결을 가졌으나 일본이 만주 지역에 진출하면서 이 연결이 끊어졌다. 임시정부는 국민당 정부의 관할 지역에 있었는데 국민당 정부가 일본의 만주 진출에 순응하는 정책이었기 때문에 협조를 얻을 수 없었다.
독립군 활동이 중국 공산당과 소련을 기대고 펼쳐지는 동안 임시정부는 외교적인 돌파구도 찾지 못하고 독립군 활동에도 연결되지 못하면서 무기력한 상태에 빠졌다. 1932년 윤봉길의 의거가 마침 일본의 만주 침략에 분개하고 있던 중국인들의 관심을 모아 국민당 정부와의 협력이 촉진되었다. 장개석의 예산 지원을 받고 중국 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이 만들어짐으로써 임시정부가 표류 상태를 벗어나 지속적인 사업을 가지게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로는 장개석의 김구에 대한 개인적 지원이 국민당 정부의 임시정부에 대한 공식적 지원으로 바뀌고 외부 연락도 두절되다시피 하면서 임시정부의 국민당 정부에 대한 의존이 예속에 가깝게 되었다. 한편 북중국과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은 공산당과의 연계가 깊어졌고, 이에 따라 임시정부와 북부 독립운동 세력과의 관계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합작 관계에 좌우되는 양상이 펼쳐졌다.
1945년 들어 연합군의 승리가 확실해진 뒤에야 광복군의 작전권을 임시정부가 중국으로부터 넘겨받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서의 역할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해방된 나라의 대접이 전쟁에서의 역할에 비례한다는 국제적 관례를 먼저 해방된 유럽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성과를 보지 못한 채 종전을 맞았다.
1945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연합국들에게 해방된 한국의 관리를 맡길 만큼 믿음직한 존재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뚜렷한 역할도 없었고, 국내에 조직된 지지 세력도 없었다. 임시정부를 지지한 유일한 연합국인 중국은 다른 연합국의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중국마저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연합국들, 특히 미국의 한반도 정책 관계자들이 실상을 더 잘 알았더라면 임시정부의 가치를 알아볼 만한 것이 있었다. 26년 동안 민족주의 입장을 지켜온 임시정부의 일관성은 신뢰의 대상으로서 가치를 가진 한민족의 자산이었다. 반민족적인 짓은 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무슨 뛰어난 일을 할 수 있다는 능력보다도 갑자기 해방된 한국에서는 소중한 자산이었다.
1948년 들어 김규식과 김구가 단정에 반대하며 남북협상에 나섰을 때 국민의 뜨거운 호응이 바로 이 자산의 가치가 드러난 것이다. 그 2년 전, 좌익 진영이 아직 굳어지기 전에, 이승만-한민당의 단정 노선이 형성되기 전에, 극한적인 반탁 대신 그런 협상의 자세를 보여줬다면 얼마나 큰 효과를 일으켰을까.
해방 시점에서 임시정부라는 민족의 자산은 완성된 건축물이 아니었다. 한 덩이 좋은 목재였다. 대들보로 삼을 수도 있고 기둥으로 쓸 수도 있는 목재였다. 해방은 임시정부에게 종착역이 아니라 출발점의 의미가 더 큰 기회였다.
국내의 지도적 인사들 중에 해방을 맞아 임시정부를 받들겠다, 임시정부에 주도권을 맡기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임시정부의 가치를 진심으로 아끼고 그 가치가 잘 살아나기 바란 사람들도 있었지만, 임시정부를 내세워 다른 세력을 견제하려는 정략적 태도도 있었던 것 같다. 9월이 되면 그들이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바로 가기 :필자의 블로그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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