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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문과 파멸로 점철된 소설…한 사람의 '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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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문과 파멸로 점철된 소설…한 사람의 '현인'

[프레시안 books] 필립 로스의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이런 가상을 해보자. 나는 작가다. 문학과 현실, 그리고 역사에 민감한 감수성을 지닌 작품을 발표했다. 일하는 사람들의 땀이 보답 받지 못하는 사회에 분노하고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감싸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해 왔다. 그렇지만 지쳤는지도 모른다. 예순 넘어서까지 여전히 현실 참여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적한 곳에 들어왔다. 의미는 있다. 회고와 성찰의 시기를 보내고 있으니까.

그 때 나를 문학에 발 딛게 하고 현실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이끌었던, 존경하는 문학 선생님이 노구를 이끌고 찾아왔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좋았던 시절을 주제로 삼을 수밖에 없을 터다. 물론 상승의 시기는 오래 걸렸지만, 전락의 시기는 극적으로 짧았다. 그러기에 비장하지도 않았다. "우스운 익살로 가득 찬 험악한 불행"이 주제어가 될 법하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 노스승이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올 때에는 '천일야화'(千一夜話)를 들려주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남자이고 고령이다. '육일'(六日)야화로 만족해야 했다. 스승은 에둘러, 다시 기어들어간 고치에서 나와 제자가 현실에 발언하기를 촉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기억해야 할 것이 많고, 안타까워해야할 일이 수두룩하고, 깨우쳐야 할 것이 즐비하다고 말이다.

▲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필립 로스 지음, 양선아 옮김, 새물결 펴냄). ⓒ새물결
나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순(耳順)을 훌쩍 넘기지 않았던가. 담담하면서도 진지하게 듣고 나서 한편의 장편소설을 썼다. 필립 로스의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양선아 옮김, 새물결 펴냄)가 꼭 그런 작품이라 여기면 된다.

스승과 제자가 화제에 올린 문제적 인물은, 스승의 동생인 아이라다. 그는 '라디오 스타'다. 링컨을 멋들어지게 연기해 대중의 환호를 샀다. 그가 다시 화제에 오른 것은 무성 영화 시대의 스타인 이브 프레임과 결혼하면서다. 도시 빈민의 아들로 한때 공장 노동자였고 부두 근로자였던 사내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사실로 이만한 것은 없으리라.

파국은 둘이 서로를 원했던 이유와 미친 시대 때문에 일어났다. 그리고 두 가지를 묶어주는 거멀못은 아이라가 공산주의자였다는 점에 있다. 이 정도면 예측 가능해진다. 시대 배경이 매카시 광풍을 몰고 온 미국의 1950년대였다는 것을.

아이라는 "양심을 가진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남근을 가진 공산주의자"였다. 형이 회고한 대로 "아름다운 여배우를 마누라로 삼고, 젊은 정부를 두고, 나이든 창녀와 놀아나고, 가족을 갖기를 열망하고, 양녀와 다투고, 쇼 비즈니스의 도시에서는 훌륭한 저택에서 살고, 벽지에서는 프롤레타리아적인 오두막집에서 살면서 한편으론 세상을 바꾸는 혁명을 만들고 싶어 소란 피우는" 모순 덩어리였다. 또한, 그는 "반복과 과장된 수사학적 표현, 공격적인 태도, 무자비한 어투의 연설"로 지칠 줄 모르는 적개심을 표출했고 지성을 모욕했으며 공산당의 공식 정책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선동가였다. 그는 야수였다.

이브 프레임은 왜 아이라와 결혼했을까? 그가 어린 시절 살인을 저질렀던 것도 알았고, 급진적인 사상을 품고 있다는 것도 짐작했으면서 말이다. 그녀는 "짐승을 원했어. 누가 그녀를 더 잘 보호할 수 있겠나? 짐승과 함께라면 그녀는 안전"했다. 그녀는 야수가 있어야 빛나는 미녀였다. 철없는 시절 함께 줄행랑쳤던 남자도, 게이인 당대 최고의 연기자도, 돈과 몸을 다 빼앗겼던 사기꾼도 야수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아이라가 자신과 애증 관계에 놓여 있는 딸도 보호해주길 바랐다는 것이다.

잘못된 만남은 재앙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갖은 갈등과 위기 속에서도 어렵사리 버텨오던 부부 관계는 아이라의 바람기 때문에 깨지고 만다. 나이 많은 마사지 걸과 맺은 부적절한 관계가 드러나고, 이에 자극받은 이브가, 정치적 출세를 노리던 매카시 일파의 선동 속에, 아이라의 사상과 행적을 고발하는 책을 펴낸다. 그 책이 바로 이 소설의 제목이니, 아이라는 당연히 사회적으로 몰락하고 만다. 정신병원에 갇히고, 폐광에서 안내자 역할로 인생을 마감한다. 물론, 아이라도 복수했다. 이브의 숨겨진 과거사를 폭로했던 것이다. 이전투구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필립 로스는 왜 이 이야기를 썼을까? 나는 경청하고 스승은 장광설을 떠벌이는 형식이라 결코 빠르게 읽히는 작품이 아니다. 그럼에도 읽는 이를 흡입하는 힘은 분명히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 작품을 관통하는 열쇳말이 극단이라 그런 듯싶다.

아이라도 허망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한 극단이다. 이브는 화려한 상류층의 삶을 살고 있으나 내상(內傷)이 너무 심해 썩은 내가 물씬 풍기는 또 다른 극단이다. 이들의 불화를 이용해 정치적 이득을 누린 집단은 자유와 민주의 정신을 훼손한 최악의 극단이다. 이 극단의 충돌은 숱한 상처를 안겼다.

아이라의 형도 교사직을 잃고 진공청소기를 파는 영업 사원으로 전전해야 했다. 아이라와 이브도 결국 사회적으로 매장 당했다. 이것에 주목하자는 것일까? 미친 시대가 한 개인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하는가 말이다. 그러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작가는 이들을 이용해 보수주의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한 그랜트 부부를 정성껏 묘사하고 있다. 비록 주변 정치인들이 부침을 겪지만, 이들은 시쳇말로 잘 나갔다. 작품을 읽으며 허망해지는 기분이 들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별히,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을 인용하며 한 시대를 광기로 덧칠했던 이들이 총총히 별이 되어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들도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 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지극히 퇴행적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매카시즘을 열렬하게 비판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라의 이중성을 폭로해 급진주의의 어두운 내부를 까발리기는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필립 로스는 노스승도 스스로 실패한 삶이었던 양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삶을 지지한다. 그는 한시대의 양심을 지키면서도 중용의 길을 가려 무진장 애썼다. "종교, 이념, 공산주의 같은 명백한 망상들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했으며 "교사의 노동에 대한 존경과 적절한 보수, 기타 등등"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나의 정치적인 신념은 학교 제도 안에서 영어 교사가 된 것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며 마녀 사냥꾼들과 싸웠다.

그러면서도 교원노조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을 줄 안다. "그저 돈만 밝히는 조직이 되어 버렸어. 돈, 그거면 다야,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일은 가장 나중 일이 돼 버렸"기 때문이란다. 스스로 원칙을 세우고, 그대로 살아가려 애쓰며, 그 대가로 치러야 하는 희생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이 셰익스피어를 전공한 노교사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열 희망이 아닐까.

추문과 폭로, 그리고 파멸로 점철된 소설 속에서 만난, 내 마음 속의 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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