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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통하는 질문…"혁명가와 수도사의 공통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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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통하는 질문…"혁명가와 수도사의 공통점은?"

[프레시안 books] 테리 이글턴의 <반대자의 초상>

테리 이글턴의 <반대자의 초상(Figures of Dissent)>(김지선 옮김, 이매진 펴냄)은 서평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말하자면 지금 필자는 서평들에 대해 서평을 하는 셈이다. 정말 남는 게 없는 장사다. 서평 모음집에 대한 서평이라면 비평 대상인 그 서평들보다 더 격이 높아야 할 텐데 필자에게는 도무지 그럴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저명한 저자와 글재주를 겨루는 만용은 애당초 접고, 아주 소박한 관점에서 이 책에 접근하고자 한다. 그것은 이역만리 영국 땅의 신문이나 서평지에 실렸던 서평들을 모아놓은 이 책을 한국의 독자가 굳이 읽을 만한 이유가 있는지 따져보는 일이다.

이미 저자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는 이들은 그 이름만 듣고도 이 물음에 "그럼, 물론이지"라고 답할지 모른다. '테리 이글턴', 이 이름은 영문학계, 좀 더 넓게는 문학이론 진영에서는 명성(혹은 악명)이 드높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 70년대 초, 유럽의 대학원은 '68 운동'의 반항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개념들을 전면 재해석한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작업을 나침반 삼아 저마다 자신의 학과에서 센세이셔널한 논문들을 쏟아냈다. 영국의 문학 연구 분야에서는 테리 이글턴의 <비평의 기능 : 현재 문학 이론의 쟁점들>(유희석 옮김, 제3문학사 펴냄, 현재 절판)이 바로 그 역할을 했다.

당시만 해도 새파란 젊은이였던 이글턴은 이 책에서 영문학계의 교황이나 다름없던 프랭크 레이먼드 리비스에게 겁도 없이 도전했고, 심지어는 좌파 선배인 레이먼드 윌리엄스도 한 물 갔다고 준엄한 판결을 내렸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이글턴은 '악동'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많은 인문학도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고, 마르크스주의 열풍의 끝자락에 대학물을 먹은 필자 같은 사람도 어렴풋이 들어서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굳이 이 사람의 서평 모음집까지 찾아 읽어야 할 이유가 될 것 같지는 않다. 이제는 소수의 영문학 연구자들이나 관심 있을 법한 일이 돼버린 이글턴의 과거를 알 리 없는 대다수 독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저자명만으로 읽을 이유 찾기에 부족하다면, 서평집이라는 성격은 어떨까? 서평집이라서 갖는 단점도 뚜렷하지만, 또 나름의 장점도 있지 않을까? 서평집 한 권을 읽음으로써 서평의 대상이 된 책들을 모두 섭렵한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은, 약간 반칙의 느낌은 있지만, 서평집만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반대자의 초상>이 다루는 책들의 목록만 봐도 그렇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자크 데리다까지, 예이츠나 엘리엇 같은 현대 문학 거장에서 축구 선수 베컴의 자서전까지, 이 방대한 주제와 다채로운 저자들을 단 한권의 책으로 만난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하지만 목록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장점도 곧 퇴색하고 만다. 이글턴이 다루는 저자들 중에는 스탠리 피시니 조지 슈타이너니 하는, 영미 문학 전공자가 아닌 다음에는 알기 힘들고 관심 갖기도 힘든 이름들 역시 제법 있다. 미국의 한 독서인이 한국의 국문학 교수나 문학평론가에게 시간을 할애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우리가 이 사람들에 대한 갑론을박에 귀를 기울 이유를 찾기는 힘들다.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의 선봉에 선 만담가

▲ <반대자의 초상>(테리 이글턴 지음, 김지선 옮김, 이매진 펴냄). ⓒ이매진
하지만 저자의 매력에 대해서는 할 말이 더 있다. 이글턴의 저작을 읽어본 사람이면 다들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대단한 문장가다. 우아한 미문을 쓴다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인이 흔히 '입담' 혹은 '구라'라고 부르는 재치와 유머가 보통이 아니다. 특히 남을 쏘아댈 때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학문적으로 해야 할 말은 다 하면서, 마치 지나가듯 불쑥 능청스럽게 내뱉는 농담들로 상대방의 위세와 위선을 무장 해제시킨다.

필자는 예전에 이글턴의 <미학 사상>(방대원 옮김, 한신문화사 펴냄)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보는 내내 배꼽을 잡고 웃었던 흐뭇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 책 내용은 다 잊었지만, 그 때의 유쾌했던 기분만은 잊지 않고 있다. 적어도 그 책에서 이글턴은 천재적인 만담가였다.

<반대자의 초상>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이글턴 특유의 유머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어찌 보면 이게 이 책을 손에 잡을 만한 한 이유가 될 법하다. 필자가 발견한 그런 류의 문장 중 대표적인 것 하나만을 들자면 다음과 같다. 20세기 중반 영미 문학계에서 문학 평론의 최고 권위자였던 노스럽 프라이의 책에 대한 언급이다.

"나 자신도 '리내커 칼리지의 마르크스주의 얼간이'로 이 책에 잠깐 등장하는 만큼, 그 메모들이 아무리 쓸모없는 신비주의를 담고 있더라도 대단히 박식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건 평소 내 너그러움의 한도를 넘어서는 일이다." (162쪽)

엄청 비틀리고 꼬인 문장이다. 프라이에 대해서 아니꼬운 것은 모조리 이야기하면서 그래도 겸손한 쪽은 나라고 생색은 다 내는 식이다. 비평 대상 본인은 발끈하겠지만, 보고 있는 제3자에게는 흥미진진한 일격이 아닐 수 없다. 평소 이런 난타전을 관전하길 즐기는 분들이라면, <반대자의 초상>은 분명 한 번 눈길을 줘볼만한 책이다.

하지만 이글턴은 어디까지나 영어권 문화의 자식이다. 그의 유머 역시도 김치, 고추장에 익숙한 한국인의 웃음보에 정확히 꽂히기에는 버터 냄새가 너무 진하다. 출판사의 선전 문구처럼 이글턴의 책에서 진중권을 찾으려 한다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 도대체 웃음의 포인트가 어디냐고 항변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이글턴의 농담이 전제하는 영미 사회의 맥락들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도 웃음 폭발을 방해하는 요소다. 예를 들어, "제프리 아처가 감옥에 있다고 하는 것하고 똑같은 의미로 아름다움이 시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비평가는 별로 없으리라"(110쪽)라는 문장은 아처가 영국의 스타 작가이면서 대처 시절 보수당 정치인으로서 성 추문 위증 혐의로 감옥에 갇혔었다는 것(왜 이 대목에서 자꾸 한나라당 의원들이 떠오를까)을 읽는 이가 이미 알고 있어야 비로소 그 입가에 미소를 유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런 영미식 농담과는 영 코드가 안 맞는다고 하는 분들에게는 이 책의 추천 근거로 무엇을 꺼내 들어야 할까? 아마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라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글턴이 이 책에서 난도질하는 저자들 중 상당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다. 제법 거장이라 할 수 있는 폴 드 만이나 가야트리 스피박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더구나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별 상관없는 저자들을 다룰 때에도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즘 유행을 희화화하는 농담 하나 정도는 반드시 끼워 넣는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로서는 참으로 당황스러울 법하다.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자신들을 비판하는 자가 정색해서 깃발을 흔들고 구호를 외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그토록 너그러이 대하는 만담으로 싸움을 걸어오니 말이다. 더구나 농담에 관한 한, 농담을 찬양만 하는 그들에 비해 이글턴이 한 수 위다.

따라서 이 서평집은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서로서 뚜렷한 용도를 지닌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대쪽 바리케이드에 소속감을 느끼는 인문학도들이라면 이 책을 적들에 맞설 작지만 날카로운 무기들의 보따리로서 구비해놓을 만하다.

뜻밖에 조우하는 '자기 포기'의 윤리학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이미 한 물 간 사상이다. 관련 분야를 전공하는 인문학도가 아니라면, 굳이 그것을 비판하는 책자에 마음 뺏길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뿐이라면 결국 이 책의 독서 이유에 대해 낮은 평점을 줘야 했으리라. 뭐, 좀 더 웃기는 대목은 없나 책장을 뒤적이다 느닷없이 발견한 뜻밖의 문장들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이탈리아 정치학자 노베르트 보비오의 책을 다룬 '이름 없는 묘비의 무덕'이라는 글에서 저자는 진지하게 윤리학이라는 주제를 꺼내 든다. 그는 좌파에게 부족했던 것 중 하나가 윤리학에 대한 깊은 성찰이었다고 지적한다. 마르크스 사상에 담긴 혹은 채 담기지 못한 윤리적 측면에 대해 논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 사상을 재발견한다. 그러면서 문득 읽는 이의 가슴을 꿰뚫는 문장을 발사한다.

"따라서 자발적으로 자기희생을 하는 혁명가는, 해방된 미래의 이미지를 보여 주기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혁명가는 미래의 표상이 아니라, 미래를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를 보여 주는 표상이다. (…) 유사한 사례로, 수도사나 종교적 금욕주의자는 천국의 심상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불의의 세상에서 천국에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려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기표일 뿐이다." (184쪽)

이글턴은 갑자기 '버림'의 윤리학을 이야기한다. 한국 독자들이 흔히 법정 스님의 책에서 발견하길 기대하는 문장들이 이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혁명가를 수도사에 견주는 언사도 좀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반대자의 초상>과 함께 최근 국내에 소개된 이글턴의 또 다른 책이 놀랍게도 <신을 옹호하다>(강주헌 옮김, 모멘토 펴냄)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 책은 DNA 결정론 식의 속류 유물론을 바탕으로 기독교 전통 전체에 선전포고를 한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에 대한 맹공이다. 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진화론자들에 맞서 '신을 옹호'하는 것이다!

이글턴이 기독교 전통에서 주목하며 또한 '옹호'하고자 하는 게 바로 그 윤리학이다. 조너선 돌리모어라는 국내에는 낯선 저자를 다룬 글('제대로 살아야 제대로 죽을 수 있다')에서 우리는 이러한 윤리학의 사뭇 감동적인 윤곽을 발견한다.

"성 바오로가 우리는 매순간 죽는다고 말할 때 그 뜻은 삶이 곧 죽음이라는 순교자적인 의미였다. 삶에서 자아를 없앤다는 것은 자아가 해체된 상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떤 특정한 양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지를 잃지 않고 자아를 적절히 쾌활한 상태로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진정한 자기 포기는 정치적 순종이나 격렬한 성적 쾌락 같은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을 살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다." (197쪽)

이글턴은 이러한 '자기 포기'의 윤리가 역설적으로 인간 주체에 대한 가장 강력한 긍정이며 이것으로부터 혁명적인 좌파 정치를 복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 문장을 접하고서야 비로소 몇 년 전에 국내에도 번역 소개된 이글턴의 소설 <성자와 학자>(차미례 옮김, 한울 펴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소설에서 이글턴은 1916년 더블린 봉기로 정치적 순교자가 된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 제임스 코널리의 죽음을 강박적으로 돌이킨다. 이글턴에게 이 죽음은 2000년 전의 또 다른 정치적 순교자, 예수의 죽음과 다를 바 없는 것이고, 이 죽음의 의미를 체득하는 것은 곧 삶을 제대로 사는 것, 그래서 지금 여기의 우리 삶을 바꾸는 것의 출발점이 된다. 진심으로 자기를 버리는 자들만이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과거에는 그것을 '하느님 나라'라 했고, 몇 세기 전부터는 그것에 '민주주의', '사회주의', '코뮌주의' 같은 이름을 붙여왔다.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이글턴-지젝-바디우 연합 전선

기독교 사상을 재음미하여 좌파 정치를 재구성할 토대를 찾으려는 시도는 이글턴만의 희한한 행보는 아니다. <반대자의 초상>의 서평 대상들 중 한 명인 슬라보예 지젝도 이 노선의 동반자이고,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도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다.

더구나 이글턴이 이런 입장을 취한 게 최근의 일만도 아니다. 그에게는 까탈스러운 알튀세르 학파 마르크스주의자만도 아니고 포스트모더니즘 비판의 선봉에 선 만담가만도 아닌 또 다른 얼굴이 있다. 그것은 일찍부터 자본주의의 극복은 기독교 윤리 전통과 사회주의 운동의 만남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어온 가톨릭 좌파의 얼굴이다. 그는 이미 1960년대부터 가톨릭 청년 좌파의 길을 모색한 <슬랜트(Slant, '경사'라는 뜻)>라는 잡지를 낸 바 있다.

사실 이러한 추구가 한국인들에게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한국인들은 이미 함석헌을 만났었고 안병무, 서남동을, 민중 신학과 민중 불교를, 동학과 같은 민중 종교의 재해석 시도들을 조우한 바 있다. 하지만 한 동안 사회 변혁 사상과 운동의 이러한 차원은 망각의 대상이 되어왔다. 세속의 사상(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은 자신이 채 갖추지 못한 성스러움에 대해 무감각했고, 성스러움의 담지자들(제도화된 종교들)은 세속에 투항하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저 멀리 영국의 한 문학 이론가의, 신문 문예란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던 글들을 통해 뜻밖에도 함석헌의, 안병무의 말들을 다시 듣는다. 우리의 삶이 더욱 비루해지고 비참해지기 전에, 정말 그 전에, 삶을 더 없이 '진지한' 무엇으로 바라보아 왔던 두 흐름이 서로 합류해야 한다는 요청을 다시 되새기게 된다.

이것이 필자가 <반대자의 초상>의 독서를 독자들께 주저 없이 권하는 가장 확신에 찬 근거다. 이 책이 선사하는 이 뜻밖의 조우는 시의적절하며 뜻 깊다. 위에 소개한 이글턴의 다른 책들(<신을 옹호하다>나 <성자와 학자>)을 이 책과 함께 읽는다면, 더욱 뜻 깊은 독서 체험이 될 것이다.

사족 삼아 덧붙이면, 몇 군데에 낯을 붉히게 하는 오역이 있어서 아쉽다. 루소의 <신(新) 엘로이즈(La Nouvelle Hélois)>를 <단편 소설 엘로이즈>라고 하거나(210쪽) '국가 개입주의자(state interventionist)'를 '주간 개입주의자'라 한 것(267쪽)이 그렇다. 교열만 제대로 봤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오류다. 재판을 낼 때에는 반드시 시정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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