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24일
경성 120만 부민의 치안 유지에 대하여 긴급히 협의하고자 19일 오후 1시부터 대륙극장에서 부내 전 총대대회를 개최한다. 아직 통지를 받지 못했더라도 총대는 반드시 시작 전까지 집합하기를 발기인 측에서는 바라고 있다. (<매일신보>, 1945년 8월 18일)
경성부내 각 정회에서는 자주적으로 연합하고 부민의 자치 강화와 자위를 담당하기로 되어 全京城町總代聯合會를 조직하였다.
이 연합회는 본부와 각 區에 지부 정회의 조직으로 되어 본부는 총무, 경제, 자위, 위생의 4부로 나누었는데 위원장은 蘇完奎로 결정되었다. 본부사무소는 서대문 2정목 皮魚善성경학원이다. (<매일신보>, 1945년 8월 24일)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8월 24일자 기사의 더 상세한 내용이 김영미의 <동원과 저항>(푸른역사 펴냄) 210쪽에 인용되어 있다.
훌륭한 국체는 국민들의 뿔뿔이 흐터진 영웅적인 행동이나 진부한 이론으로 만드러지는 것이 아니라 반석과 가치 확고한 민중의 일상생활을 토대로 하야 싹이 터나는 것이니 백만 경성시민은 일상생활의 질서를 혼란시키는 일이 업시 오직 조선 사람의 하나로서 마껴진 바 직책과 가사에 정진하자고 소완규 외 유지들의 협력으로 결성된 것 (…)
요즘은 "주민센터"란 간판이 붙어 있지만 대개 "동사무소"라 부른다. 그리고 나이든 분들에게는 "동회"란 이름이 더 익숙하다. 1955년 4월 동 설치 조례 시행을 계기로 공식적 명칭으로서 자치 조직 '동회'는 행정기구 '동'에게 자리를 내주고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이다. 일제 시대에는 '정회(町會)'라고도 부르던 것이다.
정회-동회를 중심으로 "해방 전후 서울의 주민 사회사"를 탐구한 <동원과 저항>은 흥미로운 시각을 새로 열어주는 면이 많다. 주민의 일상생활에 접근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진 현상을 추적하는 통상적 연구와 달리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가 가는 사실들을 역사의 맥락에 맞춰 제시해주는 장점이 있다. 읽어 나가면서 서문의 아래 대목에 실감을 느낀다.
해방은 결코 없던 세상이 새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기존 체제 하의 작은 변화들이 뒤엉켜 해방 공간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일상의 반란조차 기존의 시스템을 타고 나타났으며 의외로 형태적인 변화는 적었다. 해방 직후 사회상에 대한 조명은 식민지 사회에 대한 이해 없이는 도달할 수 없음을 절감했다. (22~23쪽)
조선의 백성이 식민지 백성이 된 것이고 식민지 백성이 독립된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 실체의 연속성을 제일 분명히 확인해 주는 제도가 백성들의 생활에 가장 밀착해 있던 동회 제도였다. 조선 후기에 동수(洞首)를 대표로 하는 동이 형성된 것도 주민의 자치 욕구와 국가의 통제 필요가 절충된 결과였다. 식민지 시대의 정회와 총대(總代)도 양쪽 측면이 비슷한 방식으로 합쳐진 것이었다. 그리고 해방된 사회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동회의 역할이 제기된 것이다.
질서 유지를 1차 과제로, 신국가 건설을 궁극적 과제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지방 조직을 갖춰 나가는 데 인프라로서 큰 잠재적 가치를 가진 것이 도시 지역의 동회-총대와 같은 주민 조직이었다. 자경단, 보안대 등 해방 직후의 질서 유지 조직은 이런 인프라로부터 제일 먼저 도출되었다. 전경성정총대연합회는 이런 목적으로 결성된 것이고 9월 27일 부산에서 부산부정총대연합회가 결성된 것도 같은 목적이었다.
그런데 9월 초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출범하고 건준이 물러나자 서울시인민위원회 최원택 위원장은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한 시정 개혁의 일환으로 종래의 정회를 부정하고 정 인민위원회를 새로 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화요파 출신 공산주의자인 최원택은 기존 정회 조직의 성분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위에 옮겨 놓은 8월 24일자 <매일신보> 기사는 전경성정총대연합회의 보도 자료에 따라 작성된 것일 텐데, "뿔뿔이 흩어진 영웅적인 행동이나 진부한 이론"보다 "확고한 민중의 일상생활"을 중시한 자세가 공산주의자에게 만족스럽게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위원장으로 뽑힌 소완규 변호사도 <친일 인명 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소완규(1902~?)는 1932년 변호사 개업 이후 정치범 변호를 많이 맡았고, 조선임전보국단과 국민동원총진회 등을 통한 친일 행위가 밝혀져 있지만 악질 친일파에 해당되지는 않은 것 같다. 해방 후 전경성정총대연합회를 비롯해 몇 가지 민족 사업 조직에서 활동하고 헌법위원으로 있다가 1950년 9월 납북되었다. <친일 인명 사전>의 기록에서 떠오르는 모습은 나름대로 양심적인 개량주의자의 인상이다.
생활과 밀착된 주민 조직인 동회(정회)에서는 비교적 보수적인 인물들이 총대로 뽑히는 경향이 있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소의 편향성을 감안하고 받아들인다면 이런 조직과 인물들이 인민의 실제 취향과 요구를 정책에 반영하는 효과적인 통로가 되었을 것이다. 자치 성격을 띤 이런 밑바닥 조직마저 친일 잔재로 규정해 거부한 것은 지나친 교조주의라고 생각된다.
해방 당시에 일반 인민이 바란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수십 년 이민족 지배에서 벗어나 민족자결의 세상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군국주의의 폭력성을 벗어나 평화를 누리고 싶은 마음, 전쟁 말기의 궁핍에서 벗어나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많은 사람에게 더 절실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행복한 생활을 보장해 주는 장치로 민주주의가 시행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강한 정치적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일반 인민의 이런 소박한 욕망을 일부러 짓밟으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민이 바라는 것보다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모두 "인민의 정치", "인민을 위한 정치"가 어떤 것인지 열심히 궁리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민에 의한 정치"에 대해서는 생각이 아쉽게 느껴진다.
풀뿌리 주민 조직을 활용하려 한 건준의 노력은 적절한 것이었다. 총독부 정무총감의 협조 요청은 건준 활동의 최소한의 근거였고, 여운형, 안재홍 등 건준 인사들의 명망은 인민에게 거부당하지 않을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그 근거와 조건 위에서 건준 소기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지방 주민 조직과의 접촉면을 꾸준히 지키고 키우는 것이 사업의 기반 조건 확충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9월 초 인공 설립을 계기로 그 접촉면이 위축되면서 인민 대중의 모습이 정치 현장에서 흐려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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