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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련이 한 것을 미국은 못했을까?

[해방일기] 1945년 8월 23일

1945년 8월 23일

북한 지역의 일본군 주력인 관동군 제34군의 무장 해제가 함흥에서 이뤄졌다. 서울에서는 15일부터 소련군과 미군이 곧 진주할 것처럼 온갖 소문이 떠돌고, 17일에는 소문에 들뜬 군중이 서울역에 모여들기까지 했다. 실제로 미군은 아직 어느 부대를 한국에 진주시킬지도 결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소련은 연변 방면에 주둔 중이던 적군 제15군을 21일부터 한국에 진주시키기 시작했다.

소련의 점령 방침이 미국과 다른 점 하나가 바로 나타났다. 소련군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함경남도의 행정권을 접수하자 바로 조선민족 함경남도 집행위원회에 넘겨준 것이다. 함흥에서는 16일 함흥 형무소에서 석방된 정치범들을 중심으로 함경남도공산주의자협의회가 결성되고, 또 건국준비위원회(건준) 함경남도 지부도 결성되어 있었다. 소련군이 진주하자 두 단체가 합쳐 조선민족 함경남도 집행위원회를 만들어 도 행정권을 넘겨받은 것이다.

소련군은 이 방침을 계속했다. 26일 평양관구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고 평안남도 행정권을 접수하면서 바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에 넘겨줬다. 15일에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안남도 치안유지회가 결성되었다가 건준 평안남도 지부로 이름을 바꿔놓고 있었다. 공산당 평안남도 지국위원회도 15일부터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26일 저녁 조만식, 현준혁과 후루카와 일본인 지사와 함께 한 자리에서 "오늘 오후 8시를 기해 평안남도의 행정권은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에 인계된다"고 선언하고, 각 도의 정부가 수립된 후 통일 정부가 수립될 것이며 "새 정부의 소재지는 서울에 한정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해방 3년사 I>(송남헌 지음, 까치 펴냄) 108쪽에서 재인용)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는 건준 측 16인과 공산당 측 16인, 32인으로 구성되었다.

8월 31일에 평안북도 임시인민정치위원회가, 9월 13일에 황해도 인민위원회가 도 행정권을 넘겨받고 9월 말 함경북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어 38선 이북 5도 인민위원회 체제의 얼개가 완성되었다. 소련군 사령부에는 로마넹코 소장 휘하의 민정부를 설치했다. 10월 10일 김일성이 입국할 때는 민정부의 지도 아래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대표 대회가 평양에서 열리고 있었다.

약탈, 강간 등 소련군의 횡포에 관한 이야기를 함경도에서 피난 오신 외조부모님께 많이 들으며 자랐다. 소련군의 무질서한 민간인 침해 행태는 당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미국 육군 정보국에서는 1945년 12월 이런 내용의 보고도 있었다고 한다. (<북조선 탄생>(찰스 암스트롱 지음, 김연철·이정우 옮김, 서해문집 펴냄) 78쪽에서 재인용)

소련이 북한에 주둔할 의사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들은 조선 인민의 존경을 받을 일은 거의 하지 않고 그들과 멀어질 일만 일삼고 있다. 그들은 점령 태도에서 무례하다. (…) 약탈, 강간, 그리고 식량 공급과 수송을 위해 주민들의 재산을 빼앗고 징발하는 것은 붉은 군대에 대한 염증만을 가져올 것으로 판단된다.

10월에 이르러 소련군의 폭력적 행태가 많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11월에는 북한 주둔군의 20%가 여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주둔과 점령 방법의 세밀한 면까지 그 사이에 점검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행정을 현지인에게 맡긴다는 기본 방침은 8월 하순 진주할 때 이미 분명하게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미군은 소련군보다 보름 이상 늦게 진주했고, 그 후에도 꽤 오랫동안 총독부 산하 조직에게 행정과 경찰을 맡겨놓았다. 넘겨받은 뒤에도 많은 일본인 간부들을 고문으로 채용해서 역할을 맡겼다. 소련군이라 해서 현지인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아주 풀어놓은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인민위원회가 상당한 책임과 권한을 누리는 상태가 한국 사회의 장래를 모색해 나가기에, 그리고 점령군과 현지인 사이에 신뢰를 쌓아나가기에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왜 소련군은 한 것을 미군은 하지 못했을까? 또는 하지 않았을까?

소련 적군만이 아니라 공산주의 군대가 정치를 중시하는 일반적 특징이 작용한 것일지도 모른다. 공산주의 군대에서는 각급 부대에서 정치장교가 지휘관의 바로 차석이다. 반면 미군이나 한국군에서 민정참모는 참모 서열 5위다. 병사들의 기율은 아무리 엉망이더라도 소련군 지휘부의 정치 개념은 미군에 비하면 프로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휘관의 정치 능력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소련은 현지 사정을 적극적으로 통제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고, 형편 돌아가는 데 따라 최소한의 조정만 하면 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 아닐까? 동유럽에서 소련군은 현지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폴란드와 동독을 제외하고) 현지 공산주의자들이 정권 세우는 것을 도와주며 최소한의 감독만 하면 되었다. 한국에서도 소련에 유리한 조건이 상당히 존재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반면 미국은 신뢰할 만한 세력이 현지에 있을 것을 기대하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일본이 35년간 지배해 온 지역이고, 안정된 영향력을 입증해 온 저항 조직도 없었다. 이 지역 사정이 미국의 이해관계에 거스르는 쪽으로 펼쳐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일본의 통치 체제를 최대한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로 보였을 것이다.

한국 주둔 미군과 군정청은 일본에 주둔한 맥아더 사령부 예하에 있었다. 아직 냉전 체제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을 때였지만, '가이진쇼군(外人將軍)' 맥아더는 공산주의와의 대결 의식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는 일본을 극동의 보루로 키우고 있었고, 남한 경영의 목적은 그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한국을 한국인의 손에 맡겨놓는 것보다 미국의 국익에 더 잘 들어맞는 길을 찾아낼 수 있다고 맥아더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10월에 이승만이 찾아왔을 때 그렇게 반가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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