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식(일명 김교식)은 1899년 8월 함경북도 종두사무위원으로 임명받아 7개월가량 근무하고 나서, 1900년 4월 의학교에 입학하여 3년을 다니고 1903년 7월 제2회로 의학교를 졸업했다. 김달식은 종두의 양성소와 의학교 두 군데 모두를 졸업한 유일한 사람이다.
의학교를 졸업한 김달식은 다시 전라남도(1903년 9월), 강원도(1904년 9월) 종두사무위원으로 임명받아 활동했으며, 1905년 4월부터 1907년 8월~9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될 때까지는 군의관으로 근무했다(김달식의 군의관 해임 날짜는 9월 3일).
김달식이 의학교를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는데도 당분간 종두 의사로 활동한 것은 당시 의학교 출신 의사들이 일할 관직이 별로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1904년부터 대거 군의관으로 입대할 때까지 의학교 출신들은 대개 "임시 위생원 위원", "임시 유행병 예방 위원" 등 말 그대로 임시 관직에만 촉탁되었을 뿐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지 못했다. (의학교와 그 출신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살펴볼 것이다.) 그러니 종두 의사로 활동할 수 있었던 김달식은 상대적으로 처지가 나은 셈이었는지 모른다.
▲ 김달식(金達植)의 이력서. 김달식과 김교식(金敎植)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김교식이 1899년 8월 14일자로 함경북도 종두사무위원으로 발령받았다는 <관보> 기사 덕분이다. 위 이력서에 적혀 있는 김달식의 종두위원 임명 사실과 똑같다. ⓒ프레시안 |
일제에 의해 군대에서 축출되고 나서 김달식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 <황성신문> 1910년 9월 2일자 광고에는 김달식이 화평당(和平堂) 진찰소에서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화평당은 이응선(李應善)이 1909년 무렵 개설한 약방 겸 진찰소로 일제 시대 내내 번창했다. 김달식은 화평당의 고용 의사로 일한 것이었는데, 그 뒤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아 독자적으로 개업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의학교 출신 의사들, 즉 우리나라 초창기 의사들의 처지를 엿볼 수 있는 모습이다.
▲ <황성신문> 1910년 9월 2일자 광고. "본당 진찰소 의사 김달식 씨는 전 육군 군의, 의학교 교관으로 의계의 저명한 선생이니 환자는 내진하시오." <대한매일신보>에 의하면 김달식은 이에 앞서 몇 해 동안 황토현(광화문 네거리 근처) 보생의관에서도 진료의사로 일했다. ⓒ프레시안 |
이번에는 종두의 양성소 2기 졸업생 피병준(皮秉俊)에 대해 알아보자.
피병준의 초·중기 경력은 1907년에 작성된 관원 이력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이겸래(제50회)와 달리 행간을 살필 필요도 없고 빠진 사실을 찾으려고 다른 자료를 애써 뒤질 필요도 없을 것 같다.
▲ <의과방목(醫科榜目)>. 피병준의 집안이 전형적인 의원 가문임을 잘 보여준다. 증조부부터 피병준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전의감, 혜민서, 내의원 등에서 의원으로 활동했다. ⓒ프레시안 |
피병준은 조선 시대 말 대표적인 의원 가문인 홍천(洪川) 피(皮) 씨이다. <의과방목(醫科榜目)>과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아버지 피상건(皮相健)은 혜민서 참봉, 할아버지 피종순(皮宗舜)은 혜민서 주부, 증조부 피재원(皮載元)은 전의감 직장(直長)을 지냈다. 또한 홍천 피 씨는 희성(稀性)인 데도 불구하고 1874년부터 1891년까지 의과 합격자의 6%인 12명을 배출했다.
피병준은 과거에 합격한 지 석 달 뒤인 1885년 12월 약방(藥房, 즉 내의원) 침의(針醫)에 임명되어 9년 동안 근무했다. 그리고 갑오개혁 때인 1894년 7월 군무아문 주사를 지냈고, 1896년 3월 관직에서 물러나 개업(醫業)을 했다.의과(醫科)에 합격하고 내의원에서 근무했던 피병준이 종두 의사가 된 것은 이례적인 일로, 그 동기와 배경에 대해서 연구가 필요하다. 피병준은 1897년 5월 9일 종두의 양성소에 입학하여 11월 24일(이력서에는 12월) 졸업했다. 그리고 1898년 4월 12일 내부대신이 발급하는 "내부 관립 종두 의사" 면허장을 받았다. 같은 2기 졸업생인 이응원과 박형래의 이력서에도 마찬가지로 적혀 있는데, 다만 박형래의 이력서에는 날짜가 4월 11일로 되어 있다.
▲ 종두의 양성소 2기 졸업생 피병준의 이력서. 그의 경력이 잘 드러나 있다. ⓒ프레시안 |
▲ <조선총독부 관보> 1911년 8월 10일자. 피병준에게 8월 4일자로 의술개업인허장(제98호)을 발급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프레시안 |
그 뒤 피병준은 1899년 4월부터 내부 병원과, 내부 병원을 개칭한 광제원에서 계속 근무했으며, 1907년 일제가 의학교, 광제원, 적십자사병원을 통폐합하여 만든 대한의원에서도 의사 생활을 지속했다. 피병준은 대한의원을 승계한 조선총독부의원에서 1915년까지 근무하다가 그 해 4월 창덕궁 앞 와룡동에 "외과 전문" 창덕의원(昌德醫院)을 개업했다.
또 피병준은 1911년 8월 4일 총독부 당국으로부터 "의술개업인허장"을 발급받았다. 의술개업인허장은 통감부(통감 이토 히로부미) 시절인 1908년 6월부터 일제가 정식으로 근대식 의학 교육을 받았다고 인정한 사람들에게 발급한 것(1910년 8월 29일 강제 병탄 때까지는 대한제국 내부 명의로 발급)으로, 일제의 기준에 비추어 자격에 문제가 있는데도 발급받은 사람으로는 피병준(98호) 외에 이규선(李圭璿, 87호)이 있다. 대한의원에 근무했던 이들이 정식으로 근대식 의학 교육을 받은 경력이 없는데도 의술개업인허장을 수여받은 연유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하다. 섣불리 "친일"과 연관을 지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피병준은 1885년 의과에 합격한 이래 30년이 넘게 전통 의술과 근대 의술을 넘나들고 아우르는 의사 생활을 지속했다. 당시로는 예외적일 뿐만 아니라 파격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삶이었다. 또 그는 내부 병원 창립 때부터 조선총독부의원에 이르기까지 16년 동안 내리 근무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겸래와는 참으로 대조적인 생애였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이런저런 사람들이 사는 곳인가 보다.
▲ <매일신보> 1915년 4월 1일자. 피병준이 총독부의원을 그만 두고 외과 전문인 창덕의원을 개원한다고 보도했다. "와룡동 창덕의원을 설시하고 독립으로 진찰과 수술을 행할 터인데 수술 요금도 아무쪼록 병자의 사정을 보아 저렴하게 하고 다년 경험한 술법으로 부스럼, 종기, 기타 외과에 고통하는 병자를 넓게 구제할 터이라더라." 피병준이 "외과 전문 의원"을 개설한 데에는 내의원 침의(針醫) 경력, 대한의원과 총독부의원에서의 진료 경험이 함께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기사는 1910년대에도 여전히 종기 환자가 많았음을 말해 준다. ⓒ프레시안 |
1885년 열네 살 때 의과에 합격한 김성집의 집안은 전형적인 의원 가문이었다. 아버지 김윤(金潤)은 내의원 침의, 할아버지 김낙용(金樂鏞)은 전의감 전함(前銜)과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증조부 김규(金珪)는 내의(內醫)로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의 품계까지 받았다. 장인 한정현(韓鼎鉉)도 의과에 합격하고 첨정(僉正) 벼슬을 지냈다.
열다섯 살 되던 1888년 의과에 합격한 이제규의 집안 역시 의원이 적지 않았는데, 증조부 이진우(李鎭宇)가 의과에 합격했으며, 외조부 김형적(金亨䢰)은 혜민서의 교수를 지냈다. 사실 이제규의 친가보다 처가인 천녕(川寧) 현 씨가 의원 집안으로 더 유명했는데, 이제규의 장인 현행건(玄行健)을 비롯하여 고종 시대에만 10명의 의과 합격자를 배출했다.
김성집과 이제규 모두 의과에 합격한 뒤 내의원에서 근무했고, 1891년에 함께 국왕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피병준은 1887년과 1890년 두 차례에 걸쳐 내의원 근무 공로에 대해 국왕의 치하를 받았다.) 두 사람이 언제까지 내의원에 근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899년 9월 의학교에 제1회로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한 뒤 1902년에 졸업하고 근대식 의사가 되었다.
친가나 처가가 조선 시대 말 대표적인 의원 가문이었던 피병준, 김성집, 이제규가 (종두) 의사가 되어 근대 의술을 시술한 사실을 보면, 이 당시 전통 의학(의사)과 근대 의학(의사)이 적대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규는 의학교를 졸업한 뒤인 1904년 태의원(太醫院, 내의원의 후신) 주사로도 근무했다.
▲ 조선헌병대 산하 경성 제2헌병분대 장교와 하사관들(1910년대). 이제규는 일제 시대에 조선헌병대 사령부(지금 필동 한옥 마을 자리) 등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했다. 조선헌병대 사령부 근무 시의 이제규의 구체적인 행적이 드러난 것은 없지만, 민족문제연구소는 일본군 부대에서 장교로 근무한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친일 행위라고 판단하여 <친일인명사전>(2009년)에 이제규의 이름을 올렸다(제3회). 왼쪽 위의 작은 사진이 이제규이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일제 시대의 것으로 생각된다. ⓒ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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