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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리' 가슴에 품고 원수를 사랑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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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리' 가슴에 품고 원수를 사랑하라니…

[프레시안 books] 주원규의 <망루>

주원규의 <망루>(문학의문학 펴냄)를 읽으면서 어느 순간부터 장세니즘(Jansénisme)을 떠올렸다.

세상이 아무리 타락한들 신은 그저 조용히 관망하기만 할 뿐 개입하는 일이 없다.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었으니 장세니스트들의 현실의 모든 고통은 숙명이라는 비극적인 세계관은 여기서 기원하였다. 타락한 세계에 방치되어 오들오들 떨며 느꼈던 막막함을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팡세>)

그렇다고 주원규가 장세니스트라는 말은 아니다. 비극적인 세계를 한 편에 끌어안고 있으나 이를 타개하려는 의지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세계와 타개하려는 의지가 충돌하는 긴장이 장편소설 <망루>를 이끌어가는 힘이자, <망루>를 읽어나가는 즐거움이다.

▲ <망루>(주원규 지음, 문학의문학 펴냄). ⓒ문학의문학
먼저 비극적인 세계의 저류를 살펴보자. 윤흥길이 추천사에서 밝힌 것처럼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 종교 권력이 의형제를 맺으면 새로운 로마 제국"이 탄생하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의 권세는 바로 이 새로운 로마 제국이 장악하고 있다. 새로운 로마 제국의 특징이라면 도대체 수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하기야 제국의 다른 이름인 "자본주의는 순전히 제의로만 이루어진, 교리도 없는 종교"이고, 그 제의란 "죄를 씻지 않고 오히려 죄를 지우는" 절차이니 당연한 양상이라고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발터 베냐민,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후안무치한 삼각동맹이 철거민을 지상에서 내쫓아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망루를 쌓고 그 위로 올라가도록 만들었다. <망루>의 첫 번째 미덕이라면 그러한 과정을 핍진하게 그려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오래된 리얼리즘 작법의 힘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그렇다면 타락한 세계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방식은 두 가지 갈래로 나뉜다. 먼저 테러와 암살, 봉기 등 분노를 동력으로 삼아 대항하는 방식이 있다. 다른 한 가지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네 왼편도" 내밀라는 사랑으로 감싸는 방식이다(마태복음 5:39).

기실 이 두 가지 방식을 두고 벌어진 갈등의 역사는 퍽 깊다. 가령 서기 1세기 초반에는 전자의 방식을 취했던 열심당(熱心黨, Zealot) 당원 몇 명이 후자의 방식을 취한 예수의 제자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예수를 통하여 민족 해방의 꿈을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서양 문학에서 소재로 더러 활용되었는데, 한국 문학에서는 김동리의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가 여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망루> 또한 이러한 계보를 잇고 있다. 저항 방식의 갈등을 도입한 것은 <망루>의 두 번째 미덕이다. 이로써 작가는 현실을 고발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있었고, 장편 분량을 감당할 수 있는 서사 확보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망루>의 세 번째 미덕은 '재림 예수'를 불러내는 방식에 있다. 데리다 식으로 얘기하자면, 재림 예수는 체제의 모순 위에서 출몰하여 체제 너머를 환기시키는 존재다(<마르크스의 유령들>). 그러므로 체제가 균열하며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라면 예수는 언제고 귀환할 터이다.

하지만 <햄릿>의 유령이 갑주(甲冑) 즉 갑옷과 투구를 쓴 까닭에 정체를 확실히 파악하기 곤란한 것처럼, 재림 예수의 정체를 그 누구도 증명할 수는 없다. 다만 누군가는 그렇게 믿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재림 예수는 시간 위를 미끄러지는 하나의 상징으로 남을 뿐 실체는 언제나 유보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망루>에 등장하는 재림 예수 역시 마지막까지 그 정체가 규정되지 않는다. 다만 가능성으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작품에서는 그 가능성에 절박하게 매달려 "재림 예수는 누구의 것"인가 묻는 사람들이 재림 예수의 형상을 만들어 낸 양상으로 전개되어 있다(230쪽). 이로써 얻게 되는 효과는 분명하다. 침묵하는 신을 향해 절규하는 그 절절한 호소가 인물들을 둘러싼 상황의 처절함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게 되는 것이다. 다음 단락은 비장한 결의로 스스로를 무장하고 망루에 오른 인물의 내면에서 울리는 발언이다.

당신이 정녕 신의 아들이라면, 만물의 창조자라면 이 땅에 일어나는 당신의 피조물들이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으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짓밟는 이 잔혹한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지 마라. 거침없이 생생한 분노의 응어리를 한 줌도 없이 죄다 쏟아 내어라. 당신이 지은 피조물들의 이 가혹한 잔인함을 저주하고 침을 뱉어라.

내가 왜 이들을 만들었는지, 그 돌이킬 수 없는 창조 행위를 향한 끝없는 후회와 번민의 탄식을 게워 내어라. 그 분노의 화마에 내 한 몸 휘감겨도 상관없다. 이 악의 구조를 갈기갈기 찢어낼 수만 있다면 창조주의 심판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지옥 불구덩이라도 두렵지 않다. 그러니…… 그러니…… 제발 쏟아 부어라. 단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282쪽)


이러한 세 가지 미덕을 근거로 하여 나는 <망루>가 잘 된 소설이라고 판단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소설이 너무 술술 잘 읽힌다는 사실이다. 추천사에서 손석춘이 "첫 장을 펼치면 단숨에 끝까지 읽을 수 있는 문제작"이라고 긍정하고, 장석주가 "빠른 장면 전환"을 덕성으로 꼽는 관점과는 다소 입장이 다른 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부류의 소설은 구원에 관한 묵직한 성찰을 독자에게 남겨둘 수 있을 때 완성도가 더욱 높아지는 듯하다. 그런데 빠른 전개가 성찰의 여지를 제공하는 데 방해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다른 소설에서라면 장점으로 꼽아야 할 사항을 오히려 아쉽다고 판단하는 까닭이다.

사카리(단검의 헬라어 어원. 열심당원을 상징하는 상징물) 한 자루를 가슴에 품고 새로운 제국과 적극적으로 맞서되, 새로운 로마 제국의 노예들에 대해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는 경지로까지 인간은 어떻게 올라설 수 있을까(누가복음 6:35).

소설의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에도 이러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길을 만들어 나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벌써 그 길을 나선 독자들이 있다면 내가 느낀 아쉬움은 한낱 기우로 굴러 떨어져야 마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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