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아무리 타락한들 신은 그저 조용히 관망하기만 할 뿐 개입하는 일이 없다.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는 없었으니 장세니스트들의 현실의 모든 고통은 숙명이라는 비극적인 세계관은 여기서 기원하였다. 타락한 세계에 방치되어 오들오들 떨며 느꼈던 막막함을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팡세>)
그렇다고 주원규가 장세니스트라는 말은 아니다. 비극적인 세계를 한 편에 끌어안고 있으나 이를 타개하려는 의지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세계와 타개하려는 의지가 충돌하는 긴장이 장편소설 <망루>를 이끌어가는 힘이자, <망루>를 읽어나가는 즐거움이다.
▲ <망루>(주원규 지음, 문학의문학 펴냄). ⓒ문학의문학 |
하기야 제국의 다른 이름인 "자본주의는 순전히 제의로만 이루어진, 교리도 없는 종교"이고, 그 제의란 "죄를 씻지 않고 오히려 죄를 지우는" 절차이니 당연한 양상이라고 해야 옳을지 모르겠다(발터 베냐민,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후안무치한 삼각동맹이 철거민을 지상에서 내쫓아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망루를 쌓고 그 위로 올라가도록 만들었다. <망루>의 첫 번째 미덕이라면 그러한 과정을 핍진하게 그려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오래된 리얼리즘 작법의 힘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그렇다면 타락한 세계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방식은 두 가지 갈래로 나뉜다. 먼저 테러와 암살, 봉기 등 분노를 동력으로 삼아 대항하는 방식이 있다. 다른 한 가지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네 왼편도" 내밀라는 사랑으로 감싸는 방식이다(마태복음 5:39).
기실 이 두 가지 방식을 두고 벌어진 갈등의 역사는 퍽 깊다. 가령 서기 1세기 초반에는 전자의 방식을 취했던 열심당(熱心黨, Zealot) 당원 몇 명이 후자의 방식을 취한 예수의 제자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예수를 통하여 민족 해방의 꿈을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서양 문학에서 소재로 더러 활용되었는데, 한국 문학에서는 김동리의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가 여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망루> 또한 이러한 계보를 잇고 있다. 저항 방식의 갈등을 도입한 것은 <망루>의 두 번째 미덕이다. 이로써 작가는 현실을 고발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있었고, 장편 분량을 감당할 수 있는 서사 확보에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망루>의 세 번째 미덕은 '재림 예수'를 불러내는 방식에 있다. 데리다 식으로 얘기하자면, 재림 예수는 체제의 모순 위에서 출몰하여 체제 너머를 환기시키는 존재다(<마르크스의 유령들>). 그러므로 체제가 균열하며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라면 예수는 언제고 귀환할 터이다.
하지만 <햄릿>의 유령이 갑주(甲冑) 즉 갑옷과 투구를 쓴 까닭에 정체를 확실히 파악하기 곤란한 것처럼, 재림 예수의 정체를 그 누구도 증명할 수는 없다. 다만 누군가는 그렇게 믿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재림 예수는 시간 위를 미끄러지는 하나의 상징으로 남을 뿐 실체는 언제나 유보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망루>에 등장하는 재림 예수 역시 마지막까지 그 정체가 규정되지 않는다. 다만 가능성으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작품에서는 그 가능성에 절박하게 매달려 "재림 예수는 누구의 것"인가 묻는 사람들이 재림 예수의 형상을 만들어 낸 양상으로 전개되어 있다(230쪽). 이로써 얻게 되는 효과는 분명하다. 침묵하는 신을 향해 절규하는 그 절절한 호소가 인물들을 둘러싼 상황의 처절함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게 되는 것이다. 다음 단락은 비장한 결의로 스스로를 무장하고 망루에 오른 인물의 내면에서 울리는 발언이다.
당신이 정녕 신의 아들이라면, 만물의 창조자라면 이 땅에 일어나는 당신의 피조물들이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으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짓밟는 이 잔혹한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지 마라. 거침없이 생생한 분노의 응어리를 한 줌도 없이 죄다 쏟아 내어라. 당신이 지은 피조물들의 이 가혹한 잔인함을 저주하고 침을 뱉어라.
내가 왜 이들을 만들었는지, 그 돌이킬 수 없는 창조 행위를 향한 끝없는 후회와 번민의 탄식을 게워 내어라. 그 분노의 화마에 내 한 몸 휘감겨도 상관없다. 이 악의 구조를 갈기갈기 찢어낼 수만 있다면 창조주의 심판쯤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지옥 불구덩이라도 두렵지 않다. 그러니…… 그러니…… 제발 쏟아 부어라. 단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282쪽)
이러한 세 가지 미덕을 근거로 하여 나는 <망루>가 잘 된 소설이라고 판단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소설이 너무 술술 잘 읽힌다는 사실이다. 추천사에서 손석춘이 "첫 장을 펼치면 단숨에 끝까지 읽을 수 있는 문제작"이라고 긍정하고, 장석주가 "빠른 장면 전환"을 덕성으로 꼽는 관점과는 다소 입장이 다른 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부류의 소설은 구원에 관한 묵직한 성찰을 독자에게 남겨둘 수 있을 때 완성도가 더욱 높아지는 듯하다. 그런데 빠른 전개가 성찰의 여지를 제공하는 데 방해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다른 소설에서라면 장점으로 꼽아야 할 사항을 오히려 아쉽다고 판단하는 까닭이다.
사카리(단검의 헬라어 어원. 열심당원을 상징하는 상징물) 한 자루를 가슴에 품고 새로운 제국과 적극적으로 맞서되, 새로운 로마 제국의 노예들에 대해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는 경지로까지 인간은 어떻게 올라설 수 있을까(누가복음 6:35).
소설의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에도 이러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길을 만들어 나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벌써 그 길을 나선 독자들이 있다면 내가 느낀 아쉬움은 한낱 기우로 굴러 떨어져야 마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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