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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개신교의 전통은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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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개신교의 전통은 어디로 갔는가?

[해방일기] 1945년 8월 19일

2010년 8월 19일

해방 시점에서 지존의 자리를 차지한 이념은 민족주의였다. 일본 지배에서 벗어나는 상황에서 어떤 다른 이념도 민족주의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이념들이 모두 사라져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민족주의의 그늘 밑에서 나름대로 진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와 종교가 있었다. 큰 종교 중에서 불교와 천주교는 식민지 시대 동안 민족주의와의 큰 교섭이 없었기 때문에 개신교와 천도교가 해방 시점에서 눈에 띄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천도교는 민족주의와 단순한 결합을 이루고 있었던 데 반해 개신교는 민족주의와 복잡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한국 사회의 진로에 특히 큰 의미를 가진 변수였다.

개신교의 한국 선교는 1880년대에 시작하면서부터 정치적 의미를 강하게 띠었다. 미국의 선교 의사 알렌이 갑신정변 때(1884) 민영익 치료를 잘해 준 덕분에 왕실의 신임과 총애를 받아 병원도 열고, 각종 이권도 얻고, 외교 무대에서 활약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치료 잘한 데 대한 사례를 한참 넘어서는 일이다. 일본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서양 세력을 끌어들이는 방편으로 기독교를 우대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 중 천주교회는 여러 차례 박해로 조선 왕조와 원한이 쌓인 사이였고, 특히 이 원한에 깊이 얽매인 뮈텔 주교가 오랫동안(1891~1933년) 교구장으로 있어서 왕실과 협력 관계를 맺기 힘들었다. 따라서 서양을 대표하는 종교로서 개신교가 왕실의 특별한 우대를 받게 된 것이다. 그 후 많은 정치인들이 서양 세력을 가까이 하고 싶은 동기에서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15세기 말부터 대항해 시대 유럽인의 항로 개척 단계에서는 교황과 결탁한 가톨릭 국가들이 항해 활동을 장악하고 있었고 가톨릭 선교사들이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18세기 들어 항해 활동의 주도권을 넘겨받은 개신교 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산업혁명의 결과로 경제력이 늘어나자 개신교 선교 활동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에는 미국에서도 많은 선교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아편전쟁 후 1840년대부터, 일본에서는 개항 후 1850년대부터 개신교 선교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880년대에 조선에서 선교 사업이 시작될 때는 상당한 경험을 활용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장로회의 네비우스 노선(Nevius Plan)이다. 존 네비우스(1829~9년3)가 다년간의 중국 활동을 통해 빚어낸 교회 토착화 정책을 조선 선교에 채택해 큰 성과를 거둔 것이다.

1890년대 들어 동아시아 선교 사업에서 미국의 비중이 크게 늘어나고, 선교 노선도 개인 구원에 목적을 둔 복음주의로부터 문명 전파 쪽으로 넓혀지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교육, 의료 등 문화 활동에 비중을 둔 선교 사업이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개신교가 한국에서 융성하게 된 데는 선교 초기의 식민지 상황이 큰 몫을 했다. 이민족의 폭압적 통치라는 현실에 불만을 가진 식민지인은 기독교에서 위안을 찾기도 하고 희망을 찾기도 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으로 조선인의 정체성을 대신함으로써 피지배 민족의 질곡으로부터 도피하기도 하고 서양인들과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일본의 폭압을 제거해 줄 도움을 바라기도 했다. 국가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종교로부터 그 대신의 역할을 기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크다.

3·1 운동의 대표 33인 중 개신교계가 16인이었다. 당시의 억압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조직 활동이 가능하던 종교계가 앞장선 운동이기는 했지만 개신교의 비중이 참으로 컸다. 그해 6월까지 투옥된 사람 중 기독교인이 2190인으로 천도교, 불교, 유교계를 합한 1556인보다 훨씬 더 많았다고 한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독교 II" 조) 이때까지는 기독교인과 조선인의 정체성이 상당히 안정된 결합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20년대를 지나면서 조선 기독교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기독교계에 대해 관용적인 일제의 '문화 정책'으로 억압에 대한 반감이 줄어드는 한편 서양 출신의 다른 이념인 공산주의가 새로 들어와 기독교와 충돌을 일으켰다. 농촌의 황폐가 심해짐에 따라 초기 교회 조직의 기반이 위축되면서 다양한 종교 현상이 도시를 무대로 펼쳐지게 되었다.

1930년대의 조선 기독교계는 하나의 실체로 묶어서 고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하나의 큰 흐름을 1925년 결성되었다가 1938년 일제의 단속으로 해소된 흥업구락부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YMCA와 감리교회의 요인들이 대거 참여했던 이 움직임이 해방 후 남한의 기독교 발전뿐 아니라 정치 상황의 전개 방향에도 많은 시사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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