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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남산 '노인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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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남산 '노인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근대 의료의 풍경·49] 종두의 양성소

1899년 4월 14일, <제국신문>은 4월 9일 남산 노인정(老人亭)에서 열린 종두의 양성소 3회 졸업식에 대해 제법 상세하게 보도했다. 기사는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에서는, 일본 공사 가토 마쓰오(加藤增雄)와 공사관 직원, 수비대 장교, 상인 등 일본인이 졸업식에 많이 참석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어서 대한제국 궁내부 대신 이재순(李載純, 1851~1904년), 탁지부 대신 조병직(趙秉稷, 1833~1901년), 학부 협판(기사에는 탁지부 협판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민영찬(閔泳瓚, 민영환의 동생), 학무국장 김각현(金珏鉉, 1866~1921년), 위생국장 최훈주(崔勳柱), 의학교장 지석영 등 대한제국 관리 100여명(이 숫자는 조금 의심스럽다)도 참석했다고 알렸다.

마지막으로 오후 1시 반부터 졸업생 53명에게 졸업장을 주었고, 궁내부와 학부에서는 1000냥씩의 격려금을, 내부에서는 <위생신론> 53권, 종두 기계 9벌, 종두 침 및 종두반(種痘盤) 44개를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격려금은 종두의 양성소, 곧 후루시로에게, <위생신론>(후루시로 지음)은 모든 졸업생에게, 종두 기계는 우등 졸업생에게, 종두 침 및 종두반은 일반 졸업생에게 지급되었을 것이다.

▲ 남산 노인정(老人亭)에서 열린 종두의 양성소 3회 졸업식을 보도한 <제국신문> 1899년 4월 14일자. ⓒ프레시안

언뜻 평범하게 졸업식을 보도한 것으로 보이지만, 일본인 하객에 관한 보도로 시작하는 이 기사는 종두의 양성소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기사는 조선인 종두 의사의 졸업을 축하하기에 앞서 일본인들이 찬화병원장 후루시로(古城梅溪)와 일본의 공적을 찬양, 자축하는 분위기를 잘 전달하고 있다.

당시 <제국신문>은 아직 반일 성향을 뚜렷이 드러낸 상태는 아니었지만, 친일적인 매체는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일본인 하객부터 보도한 것은 신문이 친일적인 성향을 띠었기 때문이 아니라 종두의 양성소의 성격과 졸업식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실 졸업식이 열린 남산 기슭의 "노인정"의 성격도 그렇다. 노인정은 1894년 7월 15일, 일본 공사 오토리(大鳥圭介)가 이른바 "5개조 개혁안"을 제시하며 조선의 내정에 본격적으로 개입할 의도를 보였던 "노인정 회담"이 열렸던 장소이다. 그때부터 노인정은 일본인들에게 긍지와 영광의 장소로 여겨졌다.

이런 일본의 새로운 부상은 실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불과 1년 전인 1898년 초 공사 가토는 본국 외무성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었다.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상하 관민은 모두 배일 열기에 가득 차 있어 일본을 나라의 원수로 여깁니다. 이로 인해 내륙 행상자는 도처에서 폭도에게 살상당하고 개항장에 있는 자도 항상 박해를 받습니다. 일본인의 언동은 모두 의심과 불쾌감만 사기 때문에 권리의 확장은 고사하고 단지 세력 범위의 유지에도 여력이 없는 상황입니다." (<한국 근대사>(강재언 지음, 한울 펴냄)에서 재인용)

▲ 남산 북쪽 기슭의 노인정. 당시 한성의 대표적인 상춘(賞春) 장소이자, 1894년 이래 일본인들이 특별한 의미를 두는 곳이기도 했다. ⓒ프레시안

하지만 졸업식에는 그런 의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근대 의술을 배운 종두 의사들에 대한 대한제국 정부와 사람들의 기대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종두의 양성소, 종두 의사와 직접 관련되는 학부와 내부의 관리들뿐만 아니라 궁내부 대신과 탁지부 대신 등 고위 관료들이 참석했을 것이다.

▲ <관보> 1899년 5월 1일자. 1899년 4월 26일자로 내부 병원 의사로 임명받은 사람의 대부분이 종두의 양성소 출신이었다. 하루 뒤에 임명받은 피병준 역시 양성소 출신이었다. ⓒ프레시안
정부의 기대는 4월말 내부 관할로 신설된 국립병원("내부 병원")의 인사에 반영되었다. 4월 26일자로 임명받은 의사 12명 가운데 이호형(李鎬瀅), 한우(韓宇), 노상일(盧尙一) 세 사람을 제외하고, 김교각, 임준상, 김성배, 이호경(이상 1기), 이만식, 이응원, 이인식, 이세용, 박형래(이상 2기)가 종두의 양성소 출신이었다. 또 병원의 서기로 임명된 조동현과 하루 뒤에 의사로 발령받은 피병준도 양성소 2회 졸업생이었다.

1899년 4월 24일, 칙령 제14호로 반포, 시행된 <병원 관제>에는 의사 정원이 15명 이하로 규정되었으며, 그 가운데 3분의 2인 10명이 종두 의사로 배정되었다. (오늘날 내부 병원을 한방 위주의 병원이었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적어도 초기에는 종두술이라는 근대 의술을 시술하는 것을 주된 활동으로 하는 병원이었다.) 그리고 종두의 양성소 출신이 종두의 정원 모두를 채웠으며, 이로써 그들이 병원을 주도해 나갔을 것이다.

그러면 종두의 양성소를 졸업한 이 종두 의사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종두의 양성소 제1회(1897년 7월 10일) 우등 졸업생 이겸래(李謙來)와 고희준(高羲駿) 두 사람에게 첫 번째 눈길이 가지만 그에 앞서 종두의 양성소 재학 사실과 학력, 경력 등이 이력서로 확인되는 사람들부터 알아보자.

<관원 이력서> 상에 종두의 양성소 졸업 사실이 명기되어 있는 사람은 박형래, 심승덕, 유철상, 이응원, 피병준(이상 2기), 고원식, 고준식, 유일환, 이공우(이상 3기) 등 9명이다. (이밖에 이력서에 졸업 사실이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졸업생으로 추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박우용, 이철우 등 몇 명이 더 있다.)

▲ <관원 이력서> 상에 종두의 양성소 졸업 사실이 명기되어 있는 사람들의 학력과 경력 등. 이들이 양성소를 졸업할 때의 나이는 평균 24.4세였다. ⓒ프레시안

이 9명은 전체 81명의 10% 남짓에 불과하며, 또 정식 관원(官員)으로 임용되었다는 점에서(졸업생 다수가 역임한 종두사무위원은 촉탁 성격이었던 것 같다) 종두의 양성소를 졸업한 종두 의사들의 일반적인 특성을 그대로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통해 당시 종두 의사들의 일면을 파악할 수는 있을 것이다.

1890년대 후반에도 종두술을 공부하여 종두 의사가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손쉬운 일은 아니었다. 집안 분위기가 "개화적"이거나 자기 자신이 매우 진취적이지 않으면 엄두를 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의 경력에는 대부분 그러한 점이 잘 드러나 있다.

먼저 종두 의사 자격 취득 이전의 경력을 살펴보자. 박형래(1861년생), 피병준(1864년생), 유일환(1871년생) 등 나이가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6명은 종두의 양성소 입학 이전에 근대식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특히 고원식은 일본인이 운영하던 경성학당에서 1896년 4월부터 2년 동안 일본어를 공부했는데, 그가 종두의 양성소에 입학하자마자 학생이면서도 부교사 직을 맡았던 것도 일본어 수학 경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피병준은 1885년에 과거시험 의과(醫科)에 합격하고 왕실 의료를 담당하는 내의원에서 10년가량 침의(針醫)로 일한 경력이 있었다(피병준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언급할 것이다). 박형래와 유일환은 입학 전의 경력이 알려져 있지 않고, 나머지 사람들은 나이로 보아 아마 생업보다는 수학(修學)의 경험만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한편, 종두 의사 자격을 얻은 뒤의 경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의업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한 경우이다. 심승덕은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경력을 살려, 후동소학교 교사와 경교보통학교 교원을 지냈다. 고준식은 우체사(郵遞司) 주사와 농상공부 서기로 일했다. 유철상은 잠시 종두사무위원을 지냈지만, 새로운 기술과 직업을 찾아 편력의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인들과 교제하기 위해, 또는 당시의 스펙을 쌓기 위해 종두의 양성소에 다녔을지 모른다.

두 번째는 의업 활동을 하다 일반직 관료로 전직한 경우이다. 이공우는 내부 병원 의사 등 의업에 종사하다 1906년에 한성부 주사가 되었는데, 한성부 주사 업무의 구체적 내용을 알 수 없어 그가 의업을 그만 두었는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고원식은 1905년부터 성진 군수, 의정부 참서관을 지낸 것으로 보아 의업 활동은 중단한 것으로 생각된다.

세 번째는 박형래, 피병준, 유일환, 이응원 등과 같이 이력서를 작성한 시점(대체로 1907년)까지 계속 의업에 종사한 경우이다. 이응원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직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 의업을 계속했던 것일까, 아니면 의업을 천직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을까? 또는 종두 의사 중에서는 내부 병원, 광제원, 대한의원 등 가장 안정된 직장을 가졌기 때문이었을까?

다음 회에서는 종두의 양성소 졸업생 전체와, 특히 관심을 끄는 이겸래와 피병준 등에 대해 알아보자.

▲ 종두의 양성소 2기 졸업생 유철상(1878년생)의 이력서. 종두, 양잠, 철도, 교원 등 근대적 기술과 직업을 편력한 모습이 잘 나와 있다. 공교롭게도 각각의 직책에 1년 남짓 근무한 뒤 그만 둔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편력 기질 때문인지, 직장이 불안정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프레시안

▲ 종두의 양성소 2기 졸업생 박형래(1861년생)의 이력서. 종두의 양성소에서 수학하기 전의 경력은 알려진 것이 없다. 만 36세에 종두 의사가 된 이래 (종두)의사로서 의업에만 종사했다. 대한의원 이후의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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