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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의사, 후로시로는 누구인가?

[근대 의료의 풍경·48] 후루시로 바이케이

"사립" 종두의 양성소를 세운 후루시로 바이케이(古城梅溪·1860-1931)는 누구인가?

1860년 3월 2일, 일본 큐슈(九州) 동북부의 오이타(大分縣, 벳부 온천으로 유명하다) 현에서 태어난 후루시로는 1880년 3월 오이타 현립(縣立) 의학교에 입학하여 3년 반을 공부하고 1883년 10월에 졸업했다. 졸업 직후인 1884년 2월 내무성에서 실시한 시험에 합격하여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았다. 후루시로가 의사가 된 데에는 1880년에 도쿄 의대를 졸업한 형 후루시로 강도우(古城菅堂)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 후루시로가 태어나 생장한 오이타 현의 위치(빨간색 네모). 일제 강점 기간 동안, 조선에 온 일본인 가운데 오이타 현 출신은 대체로 야마구치(山口), 후쿠오카(福岡), 나가사키(長崎), 히로시마(廣島), 구마모토(熊本)에 이어 부현(府縣)별 순위 6위를 차지했다. ⓒ프레시안

후루시로는 1884년 11월에서 1886년 4월까지 1년 반 동안 도쿄의 준텐도(順天堂) 병원에서 근무한 뒤, 1886년 5월 조선 주재 일본 공사관의 의사로 조선에 왔다. 카이로세(제9회)의 후임인 셈이었다. 후루시로는 이때부터 1931년 1월 사망할 때까지, 약 6년을 제외하고는 조선에서 생활했다.

40년 가까운 조선 생활은 일본인 의사로는 아마 가장 오래일 것이다. (1907년 6월 조선에 와서 1945년 12월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장 등을 지낸 사토 고죠(佐藤剛藏·1880~1957)보다도 더 오래 조선에서 살았다.)

▲ <경성시민명감>(1922년). 후루시로(古城梅溪)와 그의 양아들(古城憲治)의 이력이 나와 있다. 후루시로 집안은 진고개에서 30년이 넘게 찬화병원을 운영했다. 후루시로의 동생(古城龜之助)은 의사나 약사는 아니었지만 역시 1904년 조선에 와서 찬화당약국을 경영했다. ⓒ프레시안
1891년 5월 공사관 의사를 사직한 후루시로는 찬화병원(贊化病院)을 설립하는 한편 일본인 거류지 공의(居留地公醫)로도 활동했다. 1896년에는 조선 궁내부 전의로도 촉탁되었지만 아관파천 때문에 실제로 활동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지난 회에서 살펴보았듯이 1897년(또는 1896년) 찬화병원 부설로 종두의 양성소를 설치하고 81명의 조선인 종두 의사를 양성, 배출했다.

후루시로는 종두의 양성소의 운영으로 얻은 명성과 조선 정부의 신임에 힘입어 1899년 5월부터 1년 동안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사 교육 기관인 "의학교"의 교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1900년 4월 의학교 학생들이 그의 해부학 강의를 문제 삼아 스트라이크를 벌이게 되자(나중에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의학교 교사를 그만 두고 피신하듯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한 달 뒤 조선으로 다시 와서 찬화병원 원장으로 재차 근무했다. (<경성시민명감>, <내지인 실업가인명사전>(1913년) 등 후루시로의 이력을 다룬 책자들에는 의학교에서의 스트라이크 사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1903년 6월, 후루시로는 위안스카이(遠世凱)가 1902년에 텐진(天津)에 세운 북양군의학당(北洋軍醫學堂)에 고빙되어 중국에 갔으며, 1904년 5월부터는 군의학당에 새로 부설된 북양방역의원(北洋防疫醫院)의 원장직을 맡아 1908년 10월 조선으로 돌아올 때까지 근무했다. 방역의원에서 후루시로가 특히 힘을 쏟았던 것은 종두 시술 및 교육과 광견병의 예방, 치료였다.

▲ <황성신문> 1903년 6월 5일자 광고. 찬화병원 원장 후루시로 바이케이의 후임으로 후루시로 강도우가 근무한다는 내용이다. 부원장 후루시로 리요시(古城俐吉)는 이들의 친형제나 자식은 아니다. ⓒ프레시안
후루시로가 중국에 가 있던 5년 남짓 찬화병원을 맡았던 사람은 바로 친형인 후루시로 강도우였다. 1880년 도쿄 의대를 졸업한 강도우는 1887년 인천공립병원 원장으로 조선에 와서 1893년까지 근무하다 일본으로 돌아갔다. 강도우는 동생이 북양군의학당에 근무하는 동안 다시 조선으로 와서 찬화병원 원장으로 일하다 동생이 돌아온 뒤로는 의사 생활 대신 주로 사업가로 활동했다.

형 후루시로 강도우는 1907년 3월부터 1909년 3월까지, 동생 후루시로 바이케이는 1909년 3월부터 1913년 3월까지 경성의사회 회장을 맡아 경성에서 개업한 일본인 의사들의 대표로 활약했다. 후루시로 바이케이의 양아들로 찬화병원의 3대 원장인 후루시로 겐지(古城憲治) 또한 1918년 4월부터 1919년 4월까지 경성의사회 회장을 지냈다. 후루시로 겐지는 1906년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1909년 독일 베를린 대학에 유학하여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후루시로 강도우의 양아들 후루시로 데이(古城貞)는 전주 자혜의원의 의관(醫官)으로 근무했다.

▲ <조선총독부 관보> 1931년 1월 21일자. 후루시로가 1월 4일 정7위(正七位)로 서임받았을 때는 살아 있었으나 1월 13일에는 사망한 것("故")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1월 4일부터 13일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생각된다. ⓒ프레시안
종두의양성소를 세웠던 후루시로는 1931년 1월 사망했으며, 사망 직후 일본 궁내성으로부터 정6위(正六位)를 추서(追敍)받았다.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데 공을 세운 것에 대한 보상이었을 것이다.

후루시로가 찬화병원 부설로 세운 종두의 양성소는 어디에 있었는가? 찬화병원의 위치를 확인하면 될 것이다. 당시 기록에 가장 많이 나오는 표현은 "진고개(泥峴) 찬화병원"이다.

진고개는 지금의 명동 중국 대사관(당시는 청나라 공사관) 터 남쪽 길에서 세종호텔 뒷편에 이르는 지역을 지칭했다. 그리 높지 않은 이 고개는 비만 오면 사람의 왕래가 끊어질 정도로 땅이 질었기 때문에 진고개라고 불렸다. 1906년 한성의 도시 환경 개선의 일환으로 진고개 일대를 깊이 2.4m 가량 파내고 길을 닦아 포장도로로 만들었다. 또 지름 1.5m의 하수관을 묻었는데, 한성 시내 근대식 하수 시설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주된 거주 지역이었기 때문에 통감부와 대한제국 정부가 특별히 신경을 썼을 것이다.

<경성과 내지인(京城と內地人)>(1910년)에는 찬화병원의 주소가 구체적으로 "본정 4정목"(本町四丁目)이라고 나와 있다.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본정 4정목은 지금의 세종호텔 일대이다. 즉 찬화병원과 종두의 양성소는 진고개 중에서도 세종호텔 가까이에 있었다.

▲ "경성 시가 전도"(1910년 제작). 찬화병원과 종두의양성소는 A(지금의 세종호텔 근처), 한성병원은 B(지금의 씨너스 영화관 명동점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경성학당은 지금의 중국 대사관 근처(C)에 있었다. ⓒ프레시안

그러면 후루시로는 왜 종두의 양성소를 세웠을까? 물론 두창을 퇴치하려는 의사로서의 책임감, 명성을 얻으려는 욕구가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개인적인 소망과 의욕 외에 일본의 대조선 전략도 함께 작용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일본은 갑오농민전쟁에 개입하면서 조선 내정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고,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뒤에는 더욱 노골적으로 내정 간섭을 했다. 하지만 그만큼 러시아, 미국 등 다른 열강들의 견제도 심해졌고 마침내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으로 일본의 영향력은 일거에 퇴조했다. 그뿐만 아니라 방약 무도한 "왕비 암살 사건"(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으로 조선인들의 신뢰마저 크게 잃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에게는 조선 정부에 대한 영향력과 조선인들의 민심을 되찾기 위한 새로운 전략, 즉 문화적인 접근법이 무엇보다도 필요했다. 1896년 4월 "대일본 해외교육회"가 경성학당(京城學堂)을 세워 조선인들에게 일본어와 근대식 학문을 교육하고, 1895년에 해군 군의 야스다(安田穰)가 설립한 한성병원(漢城病院)에서 조선인 구료 기능을 확대한 것은 우발적인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한성병원에서는 조선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의사 양성 교육을 시행할 계획(정원 20명, 수업 기간 16개월)도 가지고 있었다. 후루시로가 종두의 양성소를 세운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또한 "경성 일본인 부인회"에서 모은 기금을 경성학당, 한성병원, 종두의 양성소 세 곳에 균등하게 지원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일본 공사관도 본국 정부에 위의 기관들을 지원해 줄 것을 꾸준히 요청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898년 12월 대한제국 학부(學部)는 경성학당에 정부 인가학교 인허장을 교부했고 1899년부터 1년에 360원을 보조하겠다고 통지했다.

한성병원 또한 일본 정부와 민간의 후원을 받아 1900년에 규모를 확대, 현대화하고 조선인 진료에 더욱 힘을 기울임으로써 대한제국 정부와 민중들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국왕 고종은 1901년 한성병원에 300원을 "하사"했다.

조선 정부가 계획은 했지만 설립하지 못했던 종두의 양성소도 비슷한 효과를 나타내었다. 종두의 양성소를 설립, 운영하고 실제로 교육까지 담당했던 후루시로와 그의 조국 일본에 대한 신뢰와 지지가 올라갔던 것이다.

▲ 개축(1900년)한 뒤의 한성병원(<경성부사> 제2권). 1905년에 부임한 부원장 아메큐(雨宮量七郞)가 사진에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1905년 이후에 찍은 사진으로 생각된다. 한성병원은 1908년 대한의원이 준공될 때까지 세브란스 병원과 더불어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현대식 병원이었다. 1901년 국왕은 한성병원에 300원을 "하사"했다. 1906년 대한제국 정부가 세브란스병원에 "제중원 찬성금"(제39회)을 보낸 것과 비슷한 성격의 지원이었다. ⓒ프레시안

후루시로는 거의 평생을 바쳐 조선인 진료에도 헌신했고, 조선의 의학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했다. 적어도 후루시로의 입장에서는 그러할 것이다. 종두의 양성소에 일제의 대조선 전략이 깃들어 있었을지라도 후루시로의 종두 의사 양성 사업의 가치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후루시로의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일제의 조선 강점은 일본인 개개인의 긍정적 활동마저 모두 역사 밖으로 쫓아내었다.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오늘의 세상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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