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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독부 2인자가 여운형을 찾은 이유는?

[해방일기] 1945년 8월 12일

1945년 8월 12일

일본 항복 직후의 한국에서 가장 크고 눈에 띄는 역할을 맡은 것이 여운형(1886~1947)이었다. 8월 15일 아침 총독부의 2인자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이 관저로 그를 불러 한 시간가량 회담하며 일본의 항복 방침을 알려주고 치안 유지의 협조를 부탁하면서 그의 특이한 역할이 시작되었다. 그는 그날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조직했고, 건준은 20여 일 후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을 만들어냈다.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을 만난 것이 치안 유지의 협조 부탁을 위한 것이지, 총독부의 권한을 넘겨준 것이 아니라고 후에 강조해서 밝힌다. 굳이 밝히지 않아도 당연한 사실이다. 권한을 넘겨줄 상황도 아니었고, 만약 넘겨준다면 정무총감이 아니라 총독이 만나야 할 일이었다.

치안 유지 협조 부탁만 해도 작은 일이 아니었다. 부탁을 받는 입장에서는 불확실한 상황 전개를 앞에 놓고 정국 주도권의 큰 칼자루 하나를 쥐게 되는 것이다. 부탁을 하는 입장에서는 엄청난 파국 앞에서 최악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맡길 상대를 고르는 것과 같은 일이다.

부탁하는 쪽에서 협력 상대를 고르는 데 어떤 기준에 따랐을까? 일본과 총독부의 입장을 존중해 줄 만한 사람이되, 친일파로 몰리지 않을 사람이어야 했다. 그런 사람이 참 드문 상황이었다. 전쟁 막바지에 총력 동원을 위해 억지로라도 끌어들일 만한 사람은 남김없이 친일파로 끌어들여 놓았기 때문이다.

여운형 외에 총독부에서 접촉했던 사람으로 송진우(1890~1945)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엔도 정무총감은 후에(1957) 한 인터뷰에서 그 사실을 부인했지만, 두 사람 다 언론계의 거물로 일제에 휘말려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럴싸하게 들리는 이야기다. 여운형이 건준에 송진우를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운형이 건준의 주역이 되고 송진우가 끝내 건준 참여를 거부한 것은 여운형이 송진우보다 좌익 인물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일본 세력이 물러가는 상황에서 좌익은 잠재적 지도력과 조직력을 가진 큰 변수였다. 총독부 입장에서도 좌익의 급격한 득세가 가장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 1945년 8월 16일 서울 계동 희문중학교 운동장에 나타난 여운형. ⓒ프레시안

8월 15일 이후 여운형의 활동은 살펴볼 기회가 여러 차례 있을 텐데, 오늘은 그가 어떤 모습으로 8월 15일을 맞고 있었는지 살펴보겠다.

여운형이 1년 전인 1944년 8월부터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건국동맹)'을 조직해 해방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1만 명의 맹원을 확보해서 외곽 단체 농민동맹도 조직하고 해외 연락 사업을 벌였으며 심지어 국외에서 편성한 병력을 1945년 8월 29일 국치 35주년의 날에 국내로 진공시킬 계획까지 추진했다고 한다. 건국동맹의 인력과 자원이 건준 활동의 발판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는 이야기다. 1944년 8월이면 아직 추축국 진영의 패세가 명확하지 않을 때였다. 그리고 여운형의 주변 인물들이 집중적으로 일경의 단속 대상이 된 것은 1945년 8월에 들어서서의 일이었다. 1만 명은커녕 수백 명의 조직이라도 당시의 엄혹한 여건 속에 1년간 활동하면서 한 번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여운형이 건준과 인공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음에 따라 그 지도력을 강조하기 위해 단편적인 사실들을 모아 하나의 체계적 조직 활동처럼 윤색한 것이 아닐지.

건국동맹 활동의 실체는 차치하고, 여운형은 위기에 처한 총독부가 선후책을 부탁할 만한 거물임에 틀림없었다. 일본 당국이 그에게 강한 매력을 느낀 일은 1919년부터 있었다. 그는 1917년부터 상해에 체류하면서 임시정부 수립에도 참여했지만 임정의 일부 노선에 불만을 가지고 거리를 두고 지냈다. 당시 조선에 '문화 통치'를 시작하고 있던 일본 당국이 그를 포섭할 만한 인물로 보고 안전을 보장하며 일본 방문을 권했다. 이 여행에서의 몇 차례 강연으로 34세의 여운형이 큰 성망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송건호는 <역사에 민족의 길을 묻다>(한길사 펴냄)에 1919년 12월 여운형의 동경 제국호텔 강연 일부를 옮겨놓았다.

"일본에게 생존권이 있다면 똑같이 우리 조선 민족에게도 생존권이 있을 것이다. 일본은 이 같은 천리를 역행하고 있다. 왜 일본은 생존권의 자연적 발로로서 자유와 독립을 갈망하는 조선인들을 총검으로 위협하여 탄압하고 있는가.

한일 합병은 순전히 일본의 이익만을 위해 강제된 치욕적 유물이다. 일본은 자신을 수호하고 상호 안전을 위해서 부득이 합병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지만 러시아가 물러난 오늘날에도 그러한 궤변을 고집할 수 있는가.

오히려 한국의 독립은 일본에 안전과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다. 즉 일본은 조선 독립을 승인하고 조력함으로써만 조선인의 원한에서 풀리어 오히려 친구가 되고 중국과 그밖의 여러 이웃 나라, 나아가 전 세계의 불신과 의구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서 동양의 평화와 세계 평화는 가능하게 될 것이다."


호방한 성품의 소유자인 여운형은 식민 지배를 비판하면서도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감정적 비판보다 가해자의 문제점을 함께 걱정해주는 대범함으로 식민 지배자들의 존중도 받으면서 또한 포섭 내지 협력의 희망을 버리기 힘들게 만든 것 같다. 중일전쟁 내내 일본 당국은 여운형에게 중국으로 가서 중국과 일본의 대립 상황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맡아 달라고 거듭해서 회유했다.

여운형에 대한 중국행 부탁은 일본 본국 정부와 군 고위층의 양해 하에 여운형 본인의 소신에 따라 중일 양국에 모두 이로운 길을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침략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본 입장에서 전략적 이득을 노린 일이었겠지만, 독립운동가의 입장을 공공연히 밝히는 일개 식민지 언론인에게 그런 부탁을 한다는 것은 그 인물을 매우 크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종전에 임해 치안 유지 협조를 부탁한 것도 그런 인식 위에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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