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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예방 접종 '사교육'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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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890년대 예방 접종 '사교육'도 있었다?

[근대 의료의 풍경·47] 근대 보건의료 개혁 : 종두

1895년 11월 26일(음력 10월 10일), 내부령(內部令) 제8호로 <종두 규칙>이 제정되었다. 이것은 1883년부터 정부가 시행해 온 종두(우두) 사업을 한층 더 체계화하기 위한 조치로, 이를 통해 이전까지 대체로 간접적이었던 중앙 정부의 역할이 강화되고 구체화되었다.

이 법령에 따라 모든 어린이는 생후 70일부터 만 한 살 이내에 의무적으로 종두 접종을 받아야 했으며, 종두 접종을 받지 않은 경우에는 나이와 무관하게 접종을 받아야 했다. 또한 접종 효과가 없는 경우에는 다시 접종을 받도록 했다.

▲ 1899년 4월, 종두의양성소를 제3회로 졸업한 고원식(高源植)의 이력서. 내부대신이 발급한 "종두 의술 개업 윤허장"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프레시안
한편, 종두 시술은 "양성소"의 졸업증서를 받고 내부(內部)가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하여 종두 의사 인가를 얻은 사람만 할 수 있도록 했다. 종두 의사 중 관리로 임용된 사람들의 관원(官員) 이력서를 보면 내부대신이 "종두 의술 개업 윤허장(種痘醫術開業允許狀)"을 발급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이미 1880년대부터 우두 의사에 대한 면허 제도가 지방 정부 차원에서 시행되었지만, 이때부터는 중앙 정부가 본격적으로 의료인의 자격을 관리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종두 의사에게는 종두 효과 여부(感不感)를 검사하여 접종받은 사람에게 종두증서를 발급하고, 관청에 종두명세서를 제출하도록 하는 의무를 부과했다. 또한 종두증서 위조, 무자격 시술, 관허(官許) 없는 두묘 판매, 접종 및 수진(受診) 태만, 종두 의사의 업무 태만 등에 대해 벌금형 또는 신체형(구류)으로 처벌할 것을 규정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의 <종두 규칙>이 1895년 12월 16일(음력 11월 1일)부터 시행되었으며, <규칙>에 나와 있는 "종두의양성소"에 관한 법률은 1895년 12월 22일(음력 11월 7일) 칙령(勅令) 제180호로 반포, 시행되었다. (모법(母法)인 <종두 규칙>은 내부령이고 하위법 성격의 <종두의양성소 규정>은 칙령이라는 점은 어색해 보인다.) <종두의양성소 규정>의 각 조항은 다음과 같다. (고어체를 요즈음 표현으로 바꾼 것이다.)

▲ 1895년 7월부터 1896년말까지 제정된 여러 법규를 편록(編錄)한 <법규류편(法規類編)>에 수록되어 있는 <종두 규칙>. <관보> 1895년 11월 26일(음력 10월 10일)자에도 같은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프레시안
제1조 종두의양성소를 한성 내에 설립, 종두 의사를 양성하여 국내에 종두를 널리 시술함으로써 천연두를 예방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제2조 종두의양성소는 내부 관할에 속한다.
제3조 종두의양성소에 다음의 직원을 둔다. 소장 1명, 교수 1명, 서기 1명.
제4조 종두의양성소 관원은 모두 위생국 관원으로 겸임케 한다.
제5조 수학 기한은 1개월로 한다.
제6조 학기가 끝날 때 졸업 시험을 시행하여 합격(登選)한 자에게 졸업증서를 수여하여 종두 의사로 인정한다.
제7조 졸업 시험에 합격한 자는 종두 의적(醫籍)에 등록하여 국내에서 종두술을 시술할 수 있다.
제8조 본소의 생도(生徒)는 연령 20세 이상으로 입학시험에 급제하는 자로 한정한다. 입학 시험 과목은 다음과 같다. 한문 작문, 국문 작문, 사자(寫字).
제9조 입학 시험에 응시하려는 자는 제1호 서식에 의해 품청장(禀請狀)을 작성하여 제출해야 한다.
제10조 입학 허가를 받은 자는 다시 제2호 서식에 의해 보증장(保證狀)을 작성하여 제출해야 한다.
제11조 본 칙령은 반포일부터 시행한다.


▲ <관보> 1895년 12월 24일(음력 11월 9일)자에 게재된 <종두의양성소 규정>. 관할 부서, 수학 기간, 입학 자격뿐만 아니라 입학 시험 과목까지 구체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 <규정>은 당시 근대적 교육 제도가 자리잡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프레시안
이 <규정>에 의하면, 종두의양성소는 내부 관할의 관립(官立)이며 교육 기간은 1개월이었다. 또 학생(생도)은 입학 시험을 통해 선발하며, 교육 과정을 마치고 졸업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종두 의사로 인정했다. 이렇듯 종두 의사가 되기 위한 구체적인 자격과 절차가 법률로 정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은 뒷날 의사를 비롯한 의료인들의 교육에 원용되고 더욱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종두의양성소의 직원을 따로 두지 않고 모두 위생국 직원이 겸임토록 한 것은, 당시 정부의 형편상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교육의 충실성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어 보인다.

법률 제정에 이어 1895년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 1896년도 예산에 종두의양성소비 1368원과 우두종계비 2866원이 책정되었다. 이로써 중앙 정부의 종두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895년 12월 30일의 단발령(斷髮令) 선포와 이에 대한 민중들의 거센 반발로 정국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마침내 1896년 2월 11일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 사건이 일어나고 총리대신 김홍집이 참살됨으로써(제7회) 갑오을미개혁은 순식간에 막을 내렸다. 이에 따라 김홍집 내각이 계획했던 종두의양성소 설립도 일단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면 종두의양성소 설립 문제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관보>에는 종두의양성소 졸업에 관한 기록이 세 차례 나오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1897년 7월 10일 10명, 1897년 11월 24일 18명, 1899년 4월 8일 53명 등 도합 81명이 졸업 시험에 합격하여 종두의양성소를 졸업했다.

따라서 1897년 7월 10일 이전에 종두의양성소가 설립된 것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발견된 기록으로는 정확한 설립 날짜를 알 수 없지만, 2기와 3기 졸업생의 실제 재학 기간이 6개월 내외(<규정>의 1개월과는 차이가 크다)인 것으로 보아 1896년말 또는 1897년초 무렵에 종두 교육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보>에 세 차례 실린 종두의양성소의 졸업 기록과 졸업생 명단은 다음과 같다.

▲ <관보> 1897년 7월 10일자. 내부 위생국이 윤허한 종두의양성소의 졸업 시험을 통과한 10명의 명단이 실려 있다. ⓒ프레시안
(1) 內部衛生局允許 種痘醫養成所 醫生 卒業試驗榜 優等 二人 李謙來 高羲駿 及第 八人 李浩慶 金聖培 林浚相 金敎植 金敎珏 金益泳 李圭弼 李鴻來 (1897년 7월 10일자)

(2) 學部認許 種痘醫養成所 醫生 卒業試驗榜 優等 二人 李晚植 李世容 及第 十六人 申明均 柳春秀 朴馨來 玄東䎘 趙東顯 安世顯 李應遠 劉哲相 李寅植 柳興民 沈承悳 李喆鏞 劉文鍾 鄭海觀 崔相赫 皮秉俊 光武元年十一月二十四日 (1897년 11월 29일자)

(3) 學部認許 種痘醫養成所 第三回 醫士 卒業試驗榜 優等 九人 李潤善 高源植 金德準 李公雨 張鎭祖 池義燦 林天湀 高洪植 李載翊 及第 四十四人 申宗熙 方春煥 崔鎭星 沈承薰 李熙敏 崔鍾萬 李昌烈 李永萬 金寬炯 朴旻秀 柳尙珪 金均明 趙鼎國 朴華鎭 元普常 洪顯相 李東彦 康弼祐 李承祚 李哲宇 朴遇用 方漢式 李東煥 李孝善 朴熙斌 李圭庸 金完培 尹鍾模 呂圭冕 劉觀熙 尹晳鉉 金相驥 全瑋鉉 金諝默 李敏敎 洪星煥 朴泰勳 鄭卨敎 徐邁淳 李鍾爀 宋永鎭 姜文熙 成樂春 金演泰 共 五十三人 光武三年四月八日 (1899년 4월 13일자)


▲ 한성사범학교와 종두의양성소의 졸업생 명단을 게재한 <관보> 1899년 4월 13일자. 정부가 설립한 한성사범학교는 "관립", 사립인 종두의양성소는 "학부 인허"라고 표시되어 있다. 사립인 경우에도 담당 관청인 학부의 인허를 받도록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프레시안
다음으로는 누가 종두의양성소를 설립했을까? 원래 <종두의양성소 규정>에는 내부가 관할하며 위생국 관원이 양성소의 직원을 겸하는 "관립"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위의 <관보>에는 종두의양성소가 관립이 아니라 "내부 위생국 윤허"(1897년 7월 10일자) 또는 "학부 인허"(1897년 11월 29일자, 1899년 4월 13일자)라고 되어 있어 "사립"임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사립이되 정부의 윤허(인허)를 받아야만 했으며, 종두의양성소를 담당하는 정부 부서가 "내부"에서 1897년 11월경부터는 "학부"로 바뀐 사실도 알 수 있다.

요컨대, 원래는 정부가 종두의양성소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정부가 아닌 민간이 설립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설립자는 다음의 몇 가지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한 가지는 <한성신보(漢城新報)> 1896년 11월 22일자의 다음과 같은 광고 기사이다(박윤재. "대한제국기 종두의양성소의 설립과 활동" <정신문화연구> 32권 4호에서 재인용).

금회 본 양성소에서 종두의술을 가르칠터히오니 우두종식술(牛痘種植術)을 전습(傳習)코자 하는 의학학생은 일자(日字) 삼십일간으로써 졸업케 하니 지원자는 내학(來學)하시압. 단 수업료를 요(要)치 아니홈. 경성 이현(泥峴) 찬화의원 내 종두의양성소.

이것은 찬화의원에서 종두의양성소를 개설하고 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이다. 광고 일자는 1896년 11월 22일이지만, 실제로 내부의 윤허를 받아 양성소를 설립한 날짜는 알 수 없다.

▲ 종두의양성소 제2회 졸업생 심승덕의 이력서. 찬화병원의 종두의양성소에서 실제로 종두 교육을 했음을 시사한다. ⓒ프레시안
또 한 가지 기록은 1897년 11월 24일 종두의양성소를 졸업한 심승덕(沈承悳)의 이력서이다. 여기에는 심승덕이 1897년 8월 4일 진고개(泥峴)에 있는 찬화병원에서 수업을 받기 시작해서 11월 24일 종두의양성소를 제2회로 졸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성신보>의 광고대로 찬화병원의 종두의양성소에서 실제로 종두 교육을 했음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다.

세 번째 기록은 "일본 사람 고성매계가 (…) 종두의양성소를 사립하고 우리나라 자제들을 가르쳐서 졸업시킨 자가 80여인이 되는데"라는 <독립신문> 1899년 6월 12일자 기사이다. 이 기사의 고성매계, 즉 후루시로 바이케이(古城梅溪)는 <한성신보> 광고와 심승덕의 이력서에 나오는 찬화병원의 원장이다. 또한 80여 명을 졸업시켰다는 기사 내용은 앞에서 보았던 <관보> 기록에 정확히 부합한다.

요컨대, 찬화병원 원장 후루시로가 1897년(또는 1896년)에 정부의 윤허를 받아 종두의양성소를 설립하고 세 차례에 걸쳐 모두 81명의 종두 의사를 교육, 배출했던 것이다.

▲ <독립신문> 1899년 6월 12일자 기사. 후루시로(고성매계)가 종두의양성소를 설립하여 80여명의 조선인 종두 의사를 배출했음을 보도했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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