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봉건·매판적인 집권 세력의 대응은 역사를 거스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염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봉기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함으로써 이미 피폐한 나라와 백성들의 삶을 더욱 파탄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1885년의 톈진(天津) 조약을 내세우며 군대를 보냈다. 이 기회에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는 청·일 두 나라 사이에 전쟁 기운이 높아지자 그제야 조선 정부는 두 나라 군대의 철수를 요청하는 때늦은 조치를 취했다.
역사의 반복을 상기케 하는, 참으로 어리석고 부도덕하고 탐욕스러운 집권 세력이었다. 척족 정권의 반민족적, 반역사적 행위로 조선은 전쟁터가 되었고, 결국 일제에게 침략의 멍석을 깔아준 셈이 되었다.
▲ 아산전투 승리 후 한성 근교의 개선문을 통과하는 일본군(London News 1894년 11월 17일자. (<세밀한 일러스트와 희귀 사진으로 본 근대 조선>, 김장춘 엮음, 살림 펴냄.) ⓒ프레시안 |
▲ 조선인을 사살하는 청나라 군인들(The Graphic 1895년 3월 9일자. <세밀한 일러스트와 희귀 사진으로 본 근대 조선>). ⓒ프레시안 |
조선에서 지배력을 구축하고 있던 청나라는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인다고 했지만, 청나라 우위의 현상을 타개해야 할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침략의 구실을 삼고자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했다. 조선 정부가 이를 내정 간섭이라며 거부하자 일본군은 7월 23일 경복궁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 씨 척족 정권을 타도하고 김홍집 등 친일적인 개화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하게 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친일파"라는 말과 이 당시의 "친일"은 엄연히 구분해야 할 것이다. 김홍집 등이 일본에 우호적(친일적)이기는 했지만 민족을 배반하는 행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이때부터 1896년 2월의 아관파천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간섭과 "후견"(그 정도는 시기에 따라 달랐다) 아래 수많은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에는 필요성과 현실성에 문제가 있는 것도 적지 않았지만, 민중의 요구와 시대의 진운에 잘 부합되는 것도 많았다.
▲ <관보>에 개국 기년이 처음 쓰인 날짜는 1894년 7월 31일(개국 503년 6월 29일)로, 김홍집 정부가 출범하고 불과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프레시안 |
또 청나라 연호(年號)의 사용을 폐기하고 개국기년(開國紀年)의 사용을 의무화함으로써 청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청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이것은 자주독립 국가라면 너무나 당연한 조치이지만, 한편 여기에는 일본이 조선을 손쉽게 침략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렇듯 개혁 조치에는 묵시적으로, 또는 명시적으로 일본 등 열강의 이익을 위한 것들이 적지 않았다.
이 동안, 특히 1895년의 "을미개혁기"에 보건의료 및 위생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법령이 제정되었고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었다.
▲ 1895년 7월 4일(음력 윤5월 12일) 칙령 제115호로 제정, 반포된 <검역 규칙>(<관보> 1895년 7월 5일자). 실제로 검역은 1885년부터 시행되었고 1886년에 <온역장정(瘟疫章程)>을 제정하기도 했지만 체계적인 법률로 반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프레시안 |
이어서 당시 최대의 보건 문제였던 두창을 퇴치하기 위하여 <종두 규칙>(11월 24일), <종두의 양성소 규정>(12월 22일)이 마련되었다. (이때부터 종전의 우두 대신 종두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게 되었다.) 또한 정부는 1896년도 예산에 의학교비(費), 의학교 부속병원비, 종두의양성소비, 종두종계소비 등을 계상하여 의사와 종두 의사를 국가에서 양성하고 종두 접종을 국가 사업으로 계속할 방침을 명확히 했다.
위와 같은 근대적 보건의료 조치의 시행에 앞서 1894년 7월 30일(음력 6월 28일) 그러한 업무를 관장하는 "위생국(衛生局)"이 설치되었다. 즉, 기존의 6조(六曹) 대신 새로운 중앙 행정 기구인 8아문(八衙門)이 설치되면서, 내무아문 아래 위생국을 둔 것이다. 이때 "전염병 예방, 의약, 우두 등에 관한 사무"가 위생국의 소관 업무로 규정되었으며, 직원으로 참의(국장) 1명과 주사 2명을 두도록 했다.
하지만 실제로 위생국이 제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인 1895년 4월 20일(음력 3월 26일) 칙령 제53호로 <내부 관제>가 반포(시행은 4월 25일)되고, 4월 25일(음력 4월 1일)자로 김인식(金仁植·1862~?)이 위생국장으로 임명되면서부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전에는 위생국의 활동도, 직원 임명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 <고종실록> 1895년 4월 20일(음력 3월 26일)자. 위생국의 업무가 규정되어 있다. 1895년 5월 10일(음력 4월 16일)자 <관보>에 게재된 <내부(內部) 분과규정>도 똑같은 내용이다. ⓒ프레시안 |
제9조 위생국에서는 다음의 사무를 관장한다.
1. 전염병, 지방병의 예방과 종두, 기타 일체의 공중위생에 관한 사항.
1. 정박한 선박의 검역에 관한 사항.
1. 의사(醫師), 약제사(藥劑師)의 업무 및 약품 판매의 관리와 조사에 관한 사항.
이로써 위생국은 당시 가장 큰 문제였던 전염병 예방, 종두 시술, 검역뿐만 아니라 의사, 약제사, 약품 판매에 대한 관리 업무도 맡아 보건의료 및 위생 전반을 관장하게 되었다. 특히 1880년대부터 우두 의사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바 있었던 의료인 면허 제도를 확대할 계획을 정부가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첫 번째 위생국장으로 임명받은 김인식은 1896년 5월 11일 해주부(海州府) 주사로 전출될 때까지 1년 남짓 위생국장으로 근무했다. <검역 규칙>과 <종두의 양성소 규정> 등의 제정, 의학교 설립 계획 등 앞에서 언급한 을미개혁기의 보건의료 및 위생 관련 조치들이 김인식이 위생국장으로 재임했던 시기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위생국장 김인식의 활동으로 정부 기록(<관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은 "인천 평양 등지에 임시검역 사무 설치"(양력 1895년 8월 14일), "인천 검역부 점검"(9월 14일), "인천 평양의 유행병을 박멸하여 검역 사무 완료"(10월 2일) 등 1895년 여름부터 가을까지의 콜레라 유행에 관련된 것들뿐이다.
그러면 김인식은 어떤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을까? 위생국장에 임명되기 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위생국장으로 그만 둔 뒤에는 문의(文義), 상주(尙州), 증산(甑山) 등지의 군수를 지낸 것이 확인된다. (증산 군수 재임 시의 부정 행위로 태형 40대를 선고받았다는 불명예스러운 보도(<황성신문> 1898년 9월 9일자) 이후로는 아무런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의과(醫科)에 합격한 기록도 없는 것으로 보아서 김인식은 일반 행정 관료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처음으로 근대식 보건의료 행정의 실무 책임을 맡았던 김인식, 그리고 이근호(李根澔), 최훈주(崔勳柱), 박준승(朴準承), 홍철보(洪哲普), 민원식(閔元植), 유맹(劉猛), 염중모(廉仲模) 등 그 이후의 위생국장들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연구가 필요한 지점이다.
▲ 조선·대한제국 시기의 내부 위생국장. 1897년 3월부터 1898년 3월까지는 <관보> 등에서 위생국장의 임면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다. 기록의 누락인지, 공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민원식의 위생국장 관련 기사는 <관보>에는 없고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에만 나와 있어서 임면 날짜가 불명하다. ⓒ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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