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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과의 전쟁…무당 vs 의사, 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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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과의 전쟁…무당 vs 의사, 승자는?

[근대 의료의 풍경·45] 지석영과 우두 ⑤

외아문이 주관하여 1885년 11월에 시작된 국가 우두 사업은 불과 1년 만에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그 뒤 도(道)에 따라 우두 보급이 중단되거나 유명무실해진 경우도 있었지만 정부에 의한 우두 사업은 지속되었다.

그것은 그만큼 두창이 당시 조선 사회에서 가장 큰 보건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 19세기말까지 세계적으로도, 확실하고 직접적인 수단으로 대항할 수 있는 전염병이 우두를 통해 예방하는 두창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 <동아일보> 1948년 12월 4일자. 11월 한 달 동안 서울에서 146명의 두창 환자가 발생하여 그 가운데 40%가 사망했다는 기사이다. 두창은 1950년대까지도 맹위를 떨쳤다. 특히 한국전쟁 때인 1951년에는 4만3000여 명의 환자가 발생하여 1만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때 희생자는 대부분 필자 또래의 아기들이었다. 하지만 1961년에 마지막 환자가 생긴 뒤로 두창은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퇴치되었다. ⓒ프레시안
1870년대부터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세균학이 탄생, 발전하여 여러 가지 전염병의 정체와 원인이 밝혀지기 시작했지만, 효과적인 치료법과 예방법을 개발하기에는 아직도 요원한 시절이었다. 그보다 조금 앞서 서유럽에서부터 활용되기 시작한 상수 관리, 하수 처리, 격리와 같은 위생술이 콜레라 등 몇 가지 전염병의 확산을 방지하는 데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방법이었다.

따라서 조선 정부가 우두술 보급을 가장 시급한 보건 사업으로 추진한 것은 적절하고 타당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어떤 정책이든 당위성과 필요만으로 성공을 거둘 수는 없다.

당시 외교와 통상뿐만 아니라 우두술을 비롯하여 외래 문물의 도입과 보급을 담당했던 외아문에는 독판(장관)과 협판(차관)을 제외하고 관리(주사)가 10명도 채 안되었다. 이들 가운데 보건의료와 관련된 업무를 전담하는 사람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1894년 갑오개혁기에 내부에 위생국을 설치하여 보건위생 업무를 전담케 한 것은 큰 발전이었다.)

외아문이 우두 사업에 관해 실제로 했던 일은 각 도에 우두교수관을 파견한 것과 관찰사(도지사)에게 우두국을 설치하여 우두를 보급하라는 공문을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우두 사업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다는 정황이 파악되면 우두 사업을 독려하는 공문을 재차 보낸 정도였다. 또 제중원에 했던 것과는 달리 우두 사업에 필요한 정부 재원을 마련하는 노력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요컨대, 국가 우두 사업의 사령탑인 외아문의 행정·재정 능력은 애초부터 커다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외아문의 구실이 제한적이었던 만큼 우두 사업 시행에서 도(지방 정부)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컸다. 그런데 구체적인 사항은 알기 어렵지만, 도에 따라 사업 시행에 편차가 작지 않았다. 관찰사(도지사)의 관심과 행정 능력, 그리고 우두교수관의 의지와 역량이 우두 사업의 성패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지방의 우두 사업 상황을 잘 보여 주는 <우두절목>을 보면, 충청도의 우두 사업은 비교적 잘 시행되었다. 그런 경우라도 시기에 따른 편차가 없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앞으로 더 꼼꼼한 연구가 필요한 지점이다.

1885년부터 가장 중요한 국가 보건 사업으로 추진되었던 우두 보급은 당시에 어느 정도의 지지를 받았을까? 기존의 인두술은 금지하고 외래의 우두술만을 인정하는 강제적 우두 접종, 이러한 자못 급진적인 국가 정책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직 이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발견된 바는 없지만 모든 정치 세력이 국가 우두 사업에 찬동했던 것 같지는 않다. 1887년 5월, 반대파가 지석영의 탄핵 사유로 내세웠던 것 가운데 한 가지는 지석영이 우두 보급을 구실로 작당했다는 것이다(제44회). 이렇듯 지석영을 탄핵한 세력도 우두 사업에 대한 반대 의사를 드러냈던 건 아니었지만, 지석영을 제거함으로써 우두 사업에 커다란 타격을 주겠다는 숨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 <조선일보> 1953년 3월 18일자. 우두술이 보편화된 1950년대까지도 "미신"은 남아 있었다. 두창 환자가 한 해에 4만여 명이 생겨 그 가운데 무려 1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경험을 하던 시절에 미신이 사라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오히려 무리일지 모른다. ⓒ프레시안
민심도 우두 사업에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종두(인두) 의사와 무당처럼 우두 사업의 시행으로 직접적인 손해를 보는 사람들은 말할 것 없고, 외국과 외래 문물에 대해 막연하든 구체적이든 두려움과 적개심을 갖고 있던 수많은 민중들이 강제적인 우두 접종에 저항했던 것은 불가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1885년 겨울 우두교수관으로 충청도 정산읍을 방문했을 때, 우두술이 어린아이를 죽인다는 소문을 듣고 자녀와 함께 산으로 피신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지석영의 술회(<조선사상통신> 1928년 11월 26일자)처럼 우두를 기피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접종비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는 아예 우두가 증오의 대상이 되었을 수 있다.

▲ 무당의 배송(拜送) 굿. 두창에 걸린 뒤 대개 열사흘째 되는 날, 무당을 불러 두창 귀신(痘神)이 말썽부리지 않고 곱게 물러가도록 배송하는 굿을 벌였다. 우두술 보급은 무당들의 존재와 수입을 크게 위협하는 일이었다. ⓒ프레시안

일단 우두 의사들과 우두교수관들의 비리가 문제였다. 그러한 폐해를 말해주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 가지는 경기우도 우두교수관 김사익(金思益)이 경기우도뿐만 아니라 경기좌도의 각 읍에 내려 보낸 우두 의사들이 어린 아기가 있는 집들에 공갈을 쳐서 접종비를 갈취한다는 보고가 있으므로 그 의사들을 압송하라는 것이다(1890년 4월 12일(음력 윤2월 23일)자 외아문 공문).

또 한 가지는 전라도 우두교수관 강남형(姜南馨)이 공문을 위조했다는 데에 대하여 의정부와 전라도 감영 사이에 1890년 4월 26일(음력 3월 8일)부터 6월 2일(음력 4월 15일)까지 몇 차례 오간 공문이다. 이 사건은 강남형을 해임하고 대신 홍종규(洪鍾珪)를 후임으로 파견함으로써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 <팔도사도관초(八道四都關草)> 1890년 7월 4일(음력 5월 18일)자. 외아문이 전국 각지(9道 5都 제주)에 우두국 본국과 분국을 일거에 철폐하고 우두 의사들의 자격증을 회수하라고 보낸 공문의 내용이 실려 있다. ⓒ프레시안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1890년 7월 4일(음력 5월 18일), 외아문은 급기야 전국 각지(9道 5都와 제주)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내 우두국 본국과 분국을 당장 철폐하라고 지시했다.

"우두 신법(新法)을 관에서 허가하여 우두국을 세운 것은 오로지 영아를 보호하고 백성들을 번성(殖民)케 하는 일에 힘을 쓰려 했기 때문입니다. 우두업을 관칙(官勅)으로 인정하고, 의사를 파견하여 귀 감영에 우두국을 설치토록 했습니다. 지금 각 읍의 우두분국 의사배(醫士輩)들에 대하여 들으니 관에서 허가한 것을 빙자하여 폐단이 많다 합니다.

아예 우두약을 놓지도 않은 채 보수(접종비)를 챙겨서, 일반 백성들이 왕왕 어린 아기를 품에 안고 깊은 산골짜기에 몸을 숨길 정도입니다. 이와 같은 소문이 낭자하니 통탄할 일입니다. 이에 이 공문이 도착하는 즉시 귀 감영에서 관할하는 우두국은 본국과 분국을 가리지 말고 일체 철폐하십시오.

그리고 우두 의사들의 자격증은 일일이 거두어들이고 해당 의사들을 신속히 압송하여 계속 남아서 민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우두국에 있는 두묘(傳種) 한 그루(一款)는 귀 감영의 백성들끼리 상의해서 의사를 초빙하여 편리한 대로 접종(試藥)하여 원래 취지(款)에 부합되도록 하십시오. 의사배들에게 엄히 명령을 내려 다시 이전과 같이 거짓말하고 토색질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이 공문에 따르면 다만 우두분국에서 일하는 의사들의 전횡 때문에 전국의 우두국을 철폐하고 우두 의사들의 자격증을 환수한다는 것이었다. 또 관에서 설립하거나 허가한 우두국은 폐지하지만 두묘(痘苗)는 남겨서 문제가 된 우두분국 소속 의사들 외에 다른 의사들을 민간에서 초빙하여 우두 시술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외아문의 조치는 5년 동안 어렵사리 지속해 왔던 국가 우두 사업을 일시에 그만 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외아문이 우두 사업의 정당성과 필요성마저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우두국 철폐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것은 우두 의사들의 횡포였다.

7월 4일 이후에도 민폐를 끼친 의사 이혁(李赫)과 안정(安禎)을 잡아 보내라는 외아문의 지시(황해도 관초 1890년 7월 25일(음력 6월 9일)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몇몇 기록으로 남아 있는 우두 의사와 우두교수관들의 잘못만으로 우두국을 철폐하겠다는 외아문의 조치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설령 우두 의사들의 작폐가 그보다 훨씬 심했다 하더라도 외아문의 조치는 지나쳐 보인다.

또 우두 의사들의 작폐는 일차적으로 그들의 부도덕성에서 기인했겠지만, 아무런 사업 비용도 부담하지 않으면서 그저 강제적으로 우두 사업을 시행하려고만 한 정부에 더 근본적인 책임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우두 의사들은 온갖 방법으로 접종 대상자를 늘려 수입을 올리려 했고, 반면 민중들은 강제 접종 방식과 우두 의사들에 대해 반감만 키웠을지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노력보다는 민중의 불만을 일단 우두 의사들에게 돌리는 미봉적이고 책임회피적인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 아닐까?

▲ 1894년 1월 21일(음력 1893년 12월 15일)자 <통서일기>. 1885년에 시작된 국가의 우두 사업이 비록 한계를 보이지만 1894년까지도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프레시안
1890년 7월의 우두국 철폐 조치 이후에도 정부는 우두 사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부가 우두 사업 방식을 개선했거나 재정 지원을 했던 것 같지도 않다.

외아문은 1892년 11월 경상도에 다시 우두국을 설치하도록 했고, 1894년 1월 21일(음력 1893년 12월 15일)에는 진주를 비롯하여 경상도의 모든 읍진(邑鎭)에 우두분국을 설치하도록 독려하는 공문을 보냈다. 하지만 같은 공문에서 경상도 우두국이 사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보아 국가 주도의 우두 사업이 여전히 순항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1885년에 시작된 국가의 우두 사업은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1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1890년대 후반 이후의 보다 체계적인 우두 사업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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