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미국-영국-소련, 死神 영접을 승인하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미국-영국-소련, 死神 영접을 승인하다!

[해방일기] 1945년 8월 2일

1945년 8월 2일

포츠담. 독일제국의 출발점인 프러시아를 상징하는 도시. 그곳에서 연합군의 실세인 미국, 소련, 영국의 정상 회담이 끝났다. 1943년 11월 28일~12월 1일의 테헤란 회담, 1945년 2월 4~11일의 얄타 회담에 이어 세 번째 세 나라 정상 회담이었으나 이번에는 바뀐 얼굴이 있었다.

스탈린은 그대로였지만 미국은 지난 4월 죽은 대통령 루스벨트를 대신해 트루먼이 왔고, 총선을 앞둔 영국의 수상 처칠은 유력한 후임자인 부수상 애틀리와 함께 왔다가 7월 28일 선거 결과를 확인하고 대표 자리를 넘겨줬다.

바뀐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얄타 회담 때 항복이 임박해 있던 독일은 지난 5월 8일에 항복했고, 이제 일본만 남아 있었다.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은 회담 진행 중인 7월 26일에 먼저 발표했다. 이번 회담의 주 의제는 평정된 유럽, 그중에서도 독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관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관심의 초점은 소련이 어떤 전리품을 챙기느냐 하는 데 있었다. 테헤란 회담 때는 소련의 콧대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동유럽을 공산화하는 스탈린의 구상이 이 회담에서 승인받았다. 서부 전선에서는 독일에 별 압력을 가하지 못하고 동맹군의 주력에 거의 소련 혼자 맞서고 있을 때였으니 누구도 스탈린을 거스를 수 없었다. 회담 장소부터 스탈린의 편의에 맞춰 선택된 것이었다. (스탈린이 비행기 타는 것을 몹시 무서워해서 테헤란 회담이 유일한 탑승 경험이었다는 얘기를 어디서 본 듯. 겁 많은 사람이 잔인한 짓 잘한다는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떠오른다.)

그 후 노르망디 상륙으로 서부 전선도 한 몫 하게 되면서 서방국은 화장실 가기 전과 다녀온 후 마음이 다르게 되었다. 특히 처칠은 소련이 유럽 대륙의 큰 세력으로 일어나는 것을 극히 꺼렸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동조하지 않고 소련의 몫을 그대로 존중했다. 루스벨트가 스탈린에게 속아 넘어간 '어리석음'은 냉전 시작 후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것을 '어리석음'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냉전의 상황에 얽매인 관점 같다. 우리가 본 많은 영화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미국군과 영국군의 활약을 화려하게 보여준다. 모두 냉전 시대 미국의 관점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의 가장 큰 주인공은 소련이었다. 피해자로서도, 승리자로서도.

그 전쟁으로 인한 전 세계 인명 피해의 절반 이상을 소련이 입었다. 국토의 파괴도 제일 심했다. 그리고 종전 때까지 전쟁의 주 무대는 동부 전선이었다. 루스벨트는 소련의 역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 것뿐이었다. 똑같이 이기적인 스탈린과 처칠 사이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그는 자임했다.

일본 항복을 1주일 앞둔 소련의 선전포고를 기회주의적 태도로 비난하기도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전체 흐름에서 당연한 일이었다. 테헤란 회담 당시 독일의 주력군을 혼자 감당하고 있던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지킬 필요가 있었고, 독일 항복 후에야 일본 공격에 참여하기로 미국과 영국의 양해를 얻었다. 그 며칠 전 루스벨트와 처칠이 장개석과 함께 동아시아-태평양 문제를 의논한 카이로 회담에 스탈린이 참석하지 못하고 테헤란 회담을 따로 열어야 했던 것도 일본에 대한 소련의 입장 때문이었다.

▲ 독일 포츠담에 모인 세 정상. 왼쪽부터 소련의 스탈린, 미국의 트루먼, 영국의 처칠이다. ⓒcfo.doe.gov

독일 항복 후 두 달여가 지난 7월 17일 포츠담 회담이 시작될 때 트루먼은 전임자 루스벨트보다 인색한 협상자였다. 그리고 상대를 위축시킬 새로운 무기를 그는 가지고 있었다. 진짜 엄청난 무기였다. 원자폭탄.

회담 시작 바로 전날 뉴멕시코의 시험 폭발이 성공했다. 트루먼은 이 무기를 일본을 상대로 사용할 방침을 처칠과 먼저 합의해 놓은 다음 7월 25일에야 스탈린에게 이 무기의 존재를 밝혔다. 그 이튿날 발표된 대 일본 최후 통첩 '포츠담 선언'에서는 무조건 항복 요구에 불응할 경우 "신속하고 철저한 파괴(prompt and utter destruction)"를 명시해서 위협했다. 새 무기의 존재를 과시하는 듯한 문구였다.

일본에서 과연 핵폭탄 사용이 꼭 필요한 것이었는지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그에 대한 내 의견을 여기 굳이 내놓지 않겠다. 다만 미국에게 새 무기를 확실하게 데뷔시키고 싶은 강한 동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스탈린을 겁주려는 동기.

아무리 굉장한 무기가 있더라도 실제 사용할 수 없는 것이라면 가치가 제한된다. 도끼 든 사람이 바늘 든 사람 못 이기는 이치다. 원자폭탄 같은 무차별적 파괴력을 가진 무기를 실전에 쓴다는 것은 웬만한 상황에서 어려운 일이다. 일본 항복 전의 기회를 놓친다면 이 도끼가 휘두를 수 있는 도끼라는 사실을 확인할 기회가 언제 다시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원자폭탄 이야기를 듣고 스탈린이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며 트루먼은 (그리고 처칠도)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그 후 소련은 이란, 터키, 그리스, 베를린 등지에서 서방과 충돌이 있을 때마다 줄줄이 양보했다. 그런데 불과 4년 후 소련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빠른 추격이었다.

원자폭탄을 믿고 탱자탱자하던 미국 사회가 발칵 뒤집혔고, 그 불안감에 편승해 매카시 광풍이 일어났다. 소련 해체 후 KGB 비밀문서에서 소련이 스파이 활동을 통해 미국 기술을 빼내 온 사실, 포츠담 회담 이전에 스탈린이 원자폭탄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그 스파이들은 매카시가 고발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원자폭탄 사용 방침 합의가 포츠담 회담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일은 마침 요긴한 사건도 따로 눈에 띄는 것이 없으니 포츠담 회담 이야기를 더 해야겠다. 폴란드 처리에 관한 이야기다. '해방' 후 한국이 겪은 상황 이해에 여러 모로 참고가 되는 이야기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