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도민들에게 강정마을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작가들의 편지 연재는 처음 조정 시인이 제안하고, '제주 팸플릿 작가들'이 참여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20년 넘는 형을 받고 파시스트들의 감옥에 있을 때,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습니다. 로맹 롤랑이 지속적으로 만들어 배포한 팸플릿 역시 크게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제주 팸플릿 운동'은 여기에서 연대의 힘을 발견했습니다.
쓰는 일 외에 별로 잘하는 게 없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언어로 세상을 물들이고 싶습니다.
서귀포 바람, 애월의 파도, 북촌의 눈물, 위미의 수평선, 쇠소깍의 고요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연민이 어룽진 손으로 제주도민들께 편지를 씁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입니다. 필자 주
태산아, 참극이다
마오쩌둥의 '대장정'보다 재미있던 네 가출 얘기를 나는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네가 고교 2년 봄이었을 때라고 했으니, 아마도 1979년 5월쯤이겠다. 너는 아카시아 꽃향기에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집을 나섰다. 주머니에는 4만 5000원이 들어 있었다. 육성회비를 내고 참고서를 사야 할 돈이었다. 너는 용산역에서 목포행 완행열차를 탔다. 풍운아는 원래 항구에서 크는 법이니까 그건 잘한 일이었다. 하지만 목포는 너의 최종 목표지가 아니었다. 집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야 한다고 믿었기에 너는 목포에서 곧장 제주행 여객선에 몸을 실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너는 재수 없게도 여객선을 놓쳤다. 물론 그게 어디 재수 없어서 그리된 거냐. 괜스레 목포 바닥을 헤매다가 새벽녘에야 잠든 탓이겠지.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방범대원한테 끌려가 구류 살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인 거였다.
너는 그다음 날에야 제주행 여객선에 올랐다. 그리고 제주에 닿았다. 이제 안심해도 좋으련만, 너는 안심하지 않았다. 더 남쪽으로! 제주의 최남단 서귀포에 닿고서야 너는 적이 안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거금 4만 5000원은 차비 말고는 쓴 데도 없이 다 써 버린 상태였다. 너는 당장 저녁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너는 서귀포시장 근처에 있는 자장면집으로 기어들어 갔다. 마치 자장면집에 취직하려고 머나먼 서울에서 기차에 배에 버스에 몸을 실은 꼴이었다.
자장면집은 하루가 100년이었다. 며칠 못 가 물밀 듯이 후회가 밀려들었다. 비질이 끝나면 걸레질, 걸레질이 끝나면 양파 까기, 양파 까기가 끝나면 양파 썰기, 양파 썰기가 끝나면 단무지 썰기, 단무지 썰기가 끝나면 설거지하기, 설거지하기가 끝나면 지치고 서글픈 서귀포의 깊고 슬픈 밤이었다. 그냥 배곯지 않을 만큼 자장면이나 먹는 것으로 족할 뿐 급여란 것도 없는 눈물겨운 하루하루였다.
'밥 빌어먹자고 여기까지 왔나?'
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장면집에서 일한 지는 열흘쯤 지났을 때였다. 집으로 돌아갈 여비조차 없었기에 너는 주인 몰래 전화할 기회만 찾았다. 시외전화 한 통화에 기둥뿌리가 뽑히는 걸로 알던 시절이었으니 주인 몰래 전화하는 건 필수였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너는 자장면집 전화로 엄마를 찾았다. 이문시장에서 어물전 하는 어머니는 다음날 곧장 그 머나먼 서귀포를 찾았다. 가출한 지는 벌써 보름이 지나 있었다.
"태산아 이눔아, 이토록 에미 속 썩이니 전생에 무슨 웬수였냐? 성들 똥이나 빨아 묵어라, 이 잡눔아!"
재회의 첫 마디가 서울대에 다니는 두 형의 똥이나 빨아 먹으라고 했으니 그건 좀 심한 말씀이었다. 한순간 너는 오기가 생겨 괜히 전화했다는 후회도 해 보았다. 하지만 절실하고 다급한 건 서귀포 탈출이었다. 너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자장면집을 나섰다. 제주시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차부로 향했다. 버스가 떠난 지 얼마 안 돼 두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너는 당장 지옥 같은 서귀포를 뜰 생각뿐이었다. 그리하여 얻어 탄 게 강정으로 가는 딸딸이였다. 서귀포에서 시멘트를 싣고 강정으로 돌아가던 경운기였다. 서귀포발 제주시로 가는 버스가 하늘을 날지 않는 한 강정에서도 두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함은 물론이다. 어머니는 기다리는 길에 바다나 보겠다며 너를 앞세워 강정 바다로 향했다. 그리고 문제의 검은 바위벌판을 만났다. 구럼비였다.
"세상에!"
끝없이 펼쳐진 검은 바위벌판을 보고 어머니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이었다. 어머니는 천천히 구럼비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 갔다. 그곳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이눔아, 너도 벗어! 신령님이 내려와 계시잖어."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너는 얼떨결에 신발을 벗긴 했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신령님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너에게 구럼비는 신령하기보다는 장엄하고 광활한 것이었다.
맨발의 어머니는 바다 쪽을 향해 손을 모아 절을 했다. 어물전으로 먹고사는 처지여서 바다를 달래느라 그런가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머니는 구럼비의 동쪽을 보고 절을 했다. 서쪽을 보고, 북쪽을 보고 차례차례 절을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기이하고 강렬했던지 너는 그때의 구럼비와 사방을 향해 절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노순택 |
어머니에겐 신령한 곳이었고, 네게는 장엄하고 광활한 바위벌판이었던 구럼비, 그 구럼비가 지금 무자비하게 박살 나고 있는 걸 아냐. 가증스럽고 미련한 권력에 의해 처참하게 으깨어지고 있는 걸 너는 아냐. 파괴의 이유는 정히 기막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제주 해군기지라나 미국 해군기지라나. 그건 태평양 전쟁 당시 히로시마가 어떤 곳이었는지 도대체 모르고서 설레발치는 꼴이다. 히로시마는 일본군의 제2사령부에다 통신센터, 병참기지가 있던 일본 제일의 군항이었다. 일본 제일의 군항이었기에 히로시마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1945년 8월 6일 아침, 원폭이 도심을 강타하자 무려 16만 6천 명이나 타죽거나 그을려 죽거나 건물의 잔해에 깔려 죽었다. 제일의 군항이 제일의 과녁이 되어 참극의 도시가 되었다는 얘기다. 해군기지 강정이 강정을 지켜 주는 게 아니라 강정의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교훈이 아니겠느냐. 해군기지 강정이 제주를 지켜 주는 게 아니라 제주의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경종이 아니겠느냐. 해군기지 강정이 대한민국을 지켜 주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의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절규가 아니겠느냐. 태산아, 그건 참극이다.
유채림 소설가. 1989년 <녹두꽃>으로 등단. 장편소설 <금강산 최후의 환쟁이>(새운 펴냄), <서쪽은 어둡다>, <그대 어디 있든지>(풀빛 펴냄), 르포르타주 <매력만점 철거농성장>(박김형준 사진, 실천문학사 펴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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