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박정양(朴定陽)은 1881년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 내무성 위생국에서 관할하는 우두 제도와 그 실시 상황 등을 상세히 조사해서 국왕에게 보고했다. 요컨대 일본에서는 도쿄부(東京府) 산하에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를 설립해서 시술을 하는 등 우두 사업을 정부가 주관하여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박정양은 종두 의사의 면허와 역할, 접종 대상자의 관리, 접종 시기 등을 규정한 <종두의 규칙(種痘醫規則)>도 일본에서 입수하여 정부에 제출했다. 종두 의사의 면허에 관해 상세히 규정한 이 <종두의 규칙>은 1880년대 조선에서 "우두 의사 면허 제도"(제17회)를 실시하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밖에 박정양이 보고, 제출한 일본의 <중앙위생회 직제>, <의사 시험 규칙>, <약품 취급 규칙>, <전염병 예방 규칙> 등은 당장 활용되지는 않았다. 그만큼 우두술 도입과 우두 의사 관리가 당시 조선에서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였던 것이다.
▲ 박정양이 일본 시찰을 마치고 귀국한 뒤 정부에 제출한 <종두의 규칙>. 모두 7개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종두 의사 면허에 관한 사항이 가장 많다. ⓒ프레시안 |
그리고 1882년 9월(음력) 민심 수습을 위해 전라도로 파견 나간 어사(御使) 박영교(朴泳敎·1849~1884)는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할 계획을 세우고 다음과 같이 도민들에게 우두 접종을 장려하는 권유문을 발표했다.
"천화두역(天花痘疫)은 귀천을 가리지 않는바, 이 두창이 창궐할 때마다 어린이들이 그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의원의 치료도 여의치 않아 10명 중 8~9명이 죽고 요행히 1~2명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 10명 중 2~3명은 얼굴에 상처가 남는 등 폐인이 된다. 이러한 자가 1년에도 몇 백 명이나 되니 눈물 없이 볼 수 없다."
"영국의 신의(神醫) 점나(占那·제너)가 고생 끝에 우두라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내었는데, 100번 시험해서 100번 효험을 보고 또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니 정말로 좋은 방법이다. 이 우두는 한 번의 접종만으로도 실패가 없으며 또 그 효과가 영구히 지속되므로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 방법은 시행한 지 87년이 되었으며, 중국에서도 78년 전부터 널리 시술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석영이 제생의원에서 그 이치를 배워 여러 해 동안 한성에서 열심히 시술하여 귀신같은 효과를 거두었다. 그래서 요즈음에는 많은 고관이 자식과 가족들에게 접종을 하도록 하는데 모두 뚜렷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번에 전주에도 우두국을 설치하고 지석영을 교사로 초빙해서, 이 방법을 배우고자 하는 도내 각 읍의 인사들에게 가르쳐 보급함으로써 자녀를 가진 모두가 그 효험을 보도록 하려 한다. "(일본의 <의사신문> 1883년 6월 15일자)
박영교의 이 권유문으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당시 조선에서 두창이 커다란 사회적·국가적 문제였으며 그 문제를 박영교 같은 정부 당국자도 심각하게 여겼다는 점이다. 또 종래의 방법으로는 두창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는 반면 제너의 우두술로는 능히 그 문제를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관리들도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로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전국적인 차원은 아니더라도 정부에서 두창을 예방하기 위해 우두술을 실시할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게 되었다는 점이다.
위의 권유문에 나오는 대로 당시 전주에 우두국이 실제로 설치되어 우두술이 널리 시술되었는지는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권유문을 보면 그러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또 어사라는 박영교의 직책을 생각할 때 그러한 계획은 박영교 개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정부 정책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더욱이 전주 우두국 설치에 관한 권유문이 나온 시기가 개화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이 거세게 터져 나왔던 임오군란 직후임을 생각할 때 우두술 보급에 관한 정부 시책이 즉흥적으로 마련된 것이 아니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웬만하면 우두국 설치와 같은, 민심을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극할 정책을 적어도 당분간은 발표하지 않았을 텐데도 권유문을 발표한 것을 보면 정부에서 그에 관해 지속적으로 논의해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박영교가 임오군란이 진압된 뒤 청나라에 간 김윤식(雲養大人)에게 보낸 편지. 박영효의 형인 박영교는 갑신쿠데타 때 도승지를 맡았다가 청나라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지석영과는 1880년 김홍집 수신사절단의 일원으로 함께 일본을 방문한 인연이 있다. ⓒ프레시안 |
권유문을 통해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 사실은 우두술에 관해 지석영의 명망이 상당히 높았다는 점이다. 박영교도 1880년 김홍집 수신사절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하면서 수행원이었던 지석영의 우두술에 대한 관심과 조예를 익히 알고 있었던 터였다.
그리고 지석영이 일본에서 우두술을 더욱 철저히 익힌 것은 그 자신의 개인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그러한 임무가 맡겨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함을 전후 사정을 통해 알 수 있다. 지석영 스스로도, 자신을 사절단 수행원으로 추천한 김옥균이 "우두법을 배우는 데 그치지 말고 우두약의 제조법까지 배우라고 쉬임없이 독려했다"(<매일신보> 1931년 1월 25일자)라고 술회했다.
당시 우두술에 관한 지석영의 명성은 여러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데, 지석영이 1885년에 펴낸 <우두신설(牛痘新說)>에 실린 김홍집과 이도재(李道宰)의 서문을 통해서 특히 잘 알 수 있다.
"어린이가 태어나 두창으로 죽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의원들이 그 기술을 시행하지 못해서 그러하니 군자는 그것을 명(命)으로 여기지 않는다. 지석영이 아직 과거에 합격하지 않았을 때 우두법을 알게 되어 그것을 시험해 보고는, 두창을 구제할 수 있겠다고 했다. 경진년(1880년) 여름 나를 따라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지석영은 그곳 의사를 방문해서 우두법의 묘리를 터득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우두술을 베풀어 보니 곧 효과가 있어 백 명에 한 명도 실패가 없었다."
"지석영은 살린 사람의 수가 거의 만 명에 이르도록 이 법을 널리 베풀었으며, 이제 그 방법을 감추지 않고 경험을 책으로 펴내 널리 전파하게 되었다. 장차 온 세상 사람들을 장수하게 하여 일찍 죽는 두려움을 없앨 것이니 그 공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김홍집의 서문)
"두창이 사람을 해침은 오래되었다. 어린이가 그 병에 걸려 열 명에 두셋이 살아남지 못하고 혹 살아남더라도 나쁜 병으로 변해 고통을 받으며 일생을 마친다. (…) 우두법을 터득함으로써 비로소 환난을 예방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 이 법이 서양에서 유래하여 세계 각지에 전해져 일찍 죽는 사람이 없는데 오직 우리나라만이 궁벽하여 이를 모르고 있었다."
"지석영은 마음에 자비로움이 있어 바다를 건너 스승을 찾아 그 지극히 간단하고도 신묘하며 넓은 법을 다 터득하고 돌아와서 시험했다. (…) 신령한 효험이 무척 빨랐으므로 이를 널리 베풀었다. 이에 소문을 듣고 그것을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날로 문에 이어졌다. 지석영은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그 방법을 남김없이 가르쳐 주었다." (이도재의 서문)
지석영은 이처럼 김홍집과 이도재(李道宰·1848~1909), 그리고 김옥균과 박영교 등 개화파 정치인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들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빌미가 되어 탄압을 받고 귀양살이도 하게 된다.)
▲ 지석영이 1885년에 펴낸 <우두신설(牛痘新說)> 중의 김홍집 서문(오른쪽)과 이도재 서문(왼쪽). 두 사람은 이후에도 계속 지석영과 인연을 유지하며 도움을 주었다. ⓒ프레시안 |
1876년의 개국 무렵 우두술을 습득하고 시술한 사람으로는 지석영 외에도 이재하(李在夏), 최창진(崔昌鎭), 이현유(李鉉宥) 등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가장 먼저 시술한 사람으로 이재하를 꼽는 견해가 있다.
이재하는 1889년에 펴낸 <제영신편(濟嬰新編)>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을해년(1875년)에 내가 평양(浿館)에 머무를 때 계득하(桂得河)를 만나 교류하게 되었는데, 지식이 깊고 인정이 넓은 사람이었다. 그는 매번 나에게 영국 양의(良醫)의 어질고 덕이 빛나는 우두법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 말을 들으니 장님이 눈을 뜬 듯, 귀머거리가 귀가 트인 듯 상쾌했다. 뒤에 지석영이 일본인에게서, 최창진이 중국인에게서 이 방법을 배웠다."
이 인용문을 꼼꼼히 짚어보면, 이재하가 계득하에게 우두술에 대해 전해 들었다는 얘기만 있을 뿐 실제로 그것을 배우고 시술을 했다는 언급은 없다. 이재하는 이어서 언제부터인지는 언급하지 않은 채 자신이 기호(畿湖) 지방에서부터 우두 시술을 했으며, 그 뒤로 강영로(姜永老,) 강해원(姜海遠), 조인하(趙寅夏) 등과 함께 영남에 우두국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우두 사업을 벌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면 이재하에게 우두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계득하는 누구인가? 그는 우두술에 대해 그저 알고만 있었을까, 아니면 시술도 했을까? 이재하가 계득하의 국적을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계득하는 거의 틀림없이 조선인일 터이지만, 그밖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 이재하가 펴낸 <제영신편>의 서문. 이재하는 자신이 지석영, 최창진보다 먼저 우두술에 대해 전해 들었다고 적었다. ⓒ프레시안 |
국가가 아직 우두 사업을 계획하기 전에, 이미 지석영을 비롯한 민간인들이 얼마 전까지도 외래 문물이라 금기시되었던 우두 접종을 시술하고 있었다. 근대는 위에서 주어지기 전에 바닥에서부터 꿈틀거리고 있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민간에서 시작된 우두 시술은 정부가 국가 사업으로 채택하면서 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이렇듯 우두술 보급을 비롯한 새로운 보건의료 조치들은 외부의 힘이 주도해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다.
지난번 제41회에서 "지석영이 처음으로 우두 시술을 한 날짜가 1880년 1월 17일(음력 1879년 12월 6일)로 알려져 왔다"라고 언급했다. 그런데 이것은 필자가 그 주장의 근거가 되는 자료에서 양력과 음력을 혼동했기 때문에 생긴 오류이다.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매일신보> 1928년 9월 22일자 "조선에 종두 실시한 은인의 공적을 표창"이라는 제목의 기사 중 "표창 기념식은 지석영 씨가 50년 전 맨 처음으로 종두를 시행한 음(陰) 10월 25일 즉 금년 12월 6일에 성대히 거행할 터"라는 구절이다. 글을 쓰면서 <매일신보> 기사를 다시 확인하지 않고 "12월 6일"을 음력으로 잘못 기억하고는 양력 1880년 1월 17일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음력 1879년 10월 25일은 양력으로는 같은 해 "12월 8일"이다. 음력 10월 25일이 양력 "12월 6일"인 것은 1928년의 경우이다. 따라서 "음력 1879년 10월 25일설"을 주장한다면 양력으로는 같은 해 12월 8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때 기념한 "50년"은 만 (滿) 50년이 아니라 햇수로 50년 되는 때를 뜻한 것이다.
요컨대, 신뢰성이 더 높은 자료가 나타나기 전에는 지석영의 첫 우두 시술 날짜를 1879년 12월~1880년 2월경으로 해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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