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사사하거나 교유했던 인물로는 강위 외에도 정대영(丁大英·1838~1904), 김홍집(金弘集·1842~1896), 황현(黃玹·1855~1910), 유길준(兪吉濬·1856~1914), 정만조(鄭萬朝· 1858~1936) 등을 꼽을 수 있는데 황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대외 개방적이고 온건 개혁적인 사람들이었다. 지석영이 평생 동안 거의 일관되게 보인 노선과 행태에는 그러한 교유와 인간관계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석영은 한의사이자 역관(譯官)인 박영선(朴永善)에게서 어려서부터 한문과 한의술을 배웠다.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한 박영선과의 만남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그러한 인연 덕분에 지석영이 우두술을 익히고 널리 보급하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에는 여러 가지 전염병이 만연했는데 특히 치명률이 매우 높은 두창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인두술(人痘術)로 두창을 예방하는 노력을 했지만 사람의 두창을 사용하는 인두술은 소의 두창(우두)을 이용하는 우두술에 비해 부작용이 적지 않았고 효과도 떨어졌다.
이러한 때에(1876년 5월~6월) 마침 정부에서 건량관(乾糧官)으로 일하던 박영선이 수신사 김기수(金綺秀·1832~?)의 수행 의관(醫官) 겸 통역관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여행에서 일본에서는 이미 인두술 대신 서양에서 전래한 우두술로 두창을 효과적으로 예방하고 있다는 사정을 알게 된 박영선은 도쿄 쥰텐토의원(順天堂醫院)의 의사 오다키(大瀧富三)에게서 약식으로 우두술을 배우고 또 구가(久我克明)가 저술한 <종두귀감(種痘龜鑑)>을 구해서 귀국했다.
▲ 강화도조약 체결 뒤, 제1차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예조참의 김기수 일행이 1876년 5월 29일(음력 5월 7일) 요코하마 시내를 지나는 모습. 김기수 사절단은 6월 18일 도쿄를 떠날 때까지 20일 동안 철도와 전신국, 군함과 대포 제작창을 비롯해 일본의 근대적 교통, 통신, 산업, 군사, 교육, 보건 의료 부문의 여러 시설을 시찰했다. ⓒ프레시안 |
박영선은 귀국하여 자신의 방일 체험을 지인과 제자들에게 술회하는 자리에서 우두술에 관한 이야기도 했는데, 특히 지석영이 우두술에 관심을 보였다. 그해 초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래로 일본인들의 거주지로 성장하고 있던 동래와 초량에서 일본인들이 우두를 시술하여 두창을 예방하고 있다는 소식을 지석영은 이미 듣고 있던 터였기 때문이다.
▲ <종두귀감(種痘龜鑑)> 표지. 본문 22쪽의 소책자로, 대학 동교(도쿄 대학의 전신)의 중조교(中助敎)이자 종두관(種痘館) 간사인 구가(久我克明)가 1871년에 펴낸 것이다. ⓒ프레시안 |
우두술을 배우기로 결심한 지석영은 1879년 9월, 조선에 세워진 최초의 근대 서양식 병원이라고 할 일본 해군 소속의 제생의원(제4회)에 가서 마츠마에(松前讓)와 도츠카(戶塚積齋)로부터 두 달 동안 우두술을 익히고 두묘(痘苗·우두 원료)와 종두침(種痘針)을 얻어 귀경하게 되었다. 지석영은 제생의원에서 주로 우두술을 배웠지만 그밖에도 그곳에서 시술되던 근대 서양 의술의 효과들을 체험하기도 했다.
지석영은 귀경길에 자신의 본향이자 처가가 있는 충주에서 잠시 머물렀다. (일단 부산에서 한성으로 돌아왔다가 충주로 갔다는 설도 있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두 살 난 처남에게 우두술을 시술했다. 우두에 관한 지식이 있을 리 없는 장인 등 처가 식구와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지석영은 마침내 어린 처남에게 우두를 시술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시술한 지 나흘 만에 접종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의 감격을 지석영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평생을 통해 볼 때 과거에 (급제)했을 때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왔을 때가 크나큰 기쁨이었는데 그때(처남의 팔뚝에 우두 자국이 완연히 나타나는 것을 보았을 때)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지요." (<매일신보> 1931년 1월 25일자)
이것은 거의 한 세기 전인 1796년 7월 저 멀리 영국 땅에서 에드워드 제너가 제임스 핍스라는 이웃 어린이에게서 사상 처음으로 우두 접종의 효과를 확인했을 때 맛본 감격과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 "각 방면의 성공고심담, 종두 수입자 지석영 씨 (1)" (<중외일보> 1929년 10월 22일자 기사). 처가의 반대를 극복하고 우두를 시행한 과정에 대한 술회이다. 지석영은 그것이 조선(인) 최초라고 언급했지만, 아닐 가능성이 더 많다. 두 살짜리 처남을 "미혼 처남"이라고 표현한 기사 소제목이 이채롭다. ⓒ프레시안 |
그 동안 지석영이 처음으로 우두 시술을 한 날짜가 1880년 1월 17일(음력 1879년 12월 6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위의 <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지석영이 처가에 도착한 날짜가 음력 12월 25일(양력 1880년 2월 5일)이었고, 시술한 날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따라서 더 신뢰할 만한 자료가 나오기 전에는 지석영의 첫 우두 시술 날짜를 특정하기는 어렵고, 다만 1880년 1월~2월경으로 해둘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쨌든 자신을 얻은 지석영은 그곳에서 40여명에게 더 시술을 하여 우두술의 효과를 거듭 확인한 뒤 한성으로 돌아와 1880년 3월 사설(私設)로 우두국을 설치하고 공개적으로 우두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지원이나 공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비밀리에 할 필요는 없었다는 점에서 지석영은 정약용과 남상교보다는 시대를 잘 타고났던 셈이다.
그리고 곧 부산 제생의원에서의 수학에 미흡함을 느끼고 있던 지석영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즉, 1880년 6월 김홍집이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가게 되었을 때 지석영은 김옥균 등의 도움으로 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할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지석영은 이 여행에서 일본 내무성 위생국의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를 방문해 제생의원에서 미처 배우지 못했던 종묘(種苗) 제조법을 비롯해 채두가 수장법(採痘痂收藏法), 독우 사양법(犢牛飼養法), 채장법(採漿法) 등 우두술과 관련한 모든 지식과 기술을 습득했다.
▲ 지석영. <동아일보> 1928년 9월 21일자에 실린 사진으로 70대 때의 모습으로 생각된다. ⓒ프레시안 |
그런데 이러한 지석영의 우두 사업에 역풍이 불어닥쳤다. 1882년 7월(음력 6월)의 임오군란(壬午軍亂)이 그것이다. 7월 19일(오늘이 꼭 128년이 되는 날이다), "신식 군대"에 비해 형편없는 대우를 받던 "구식 군대"의 항거(도봉소 사건·都捧所事件)로 시작된 민군(民軍) 합동의 봉기는 이른바 모든 "개화 문물"에 미치게 되었다.
조선 정부와 국왕이 도입한 최초의 근대 서양식 제도는 군대에 관한 것이었다. 외세의 침략 가능성이 점차 높아져 가던 당시에 왕권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구식 군인들과 민중의 처지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개화"란, 근대적 의미를 갖기는커녕 시대를 역행하는 "삽질"에 지나지 않았다. 개화라는 미명하에 소외된 구식 군인과 민중들은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이 저항 세력에는 우두술이 자신들의 생계를 위협한다고 생각한 무당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지석영의 종두장을 개화 운동의 텃밭이라며 불태워 버렸고 지석영을 개화 운동자로 몰아붙여 처단을 요구했다. 이에 놀란 지석영이 충주의 처가로 피신하게 됨으로써 우두 사업의 제1막이 일단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신식 군대"가 남산 아래 훈련장에서 훈련하는 모습. 조선 정부와 국왕이 최초로 도입한 근대식 제도는 신식 군대였다. ⓒ프레시안 |
당시 많은 민중들은 개국과 개화 조치 이래 자신들의 삶이 더욱 피폐해졌다고 생각했다. 조선보다 조금 앞서 산업화를 시작한 일본의 공산품들이 들어와 농촌의 가내 수공업 기반을 허물어트리기 시작했고, 인플레이션이 심해짐으로써 경제 생활이 더 악화되었다. 그와 더불어 새로운 외래 문물에 의한 문화적 충격 역시 민중들이 감내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두술 등 외래적인 것에 대한 저항은 일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석영의 주관적인 생각에는 "폭도들의 만행"이 무지몽매하고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비추어졌을지 모르지만 민중들의 항거에는 나름대로 현실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의미가 있었다. 이러한 지석영류의 "개화 지식인"들과 민중들 사이의 갈등과 모순은 10여 년 뒤 갑오농민전쟁에서도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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