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 의사'는 정약용?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한국 최초의 '근대 의사'는 정약용?

[근대 의료의 풍경·40] 근대와 서양 의학

우리는 종종 1876년 "개항" 이전의 조선 후기 시대를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전혀 발전이 없었거나 오히려 퇴보했던 암흑기로 기억하고 있다. 세도정치와 쇄국, 부패와 빈곤, 기아와 전염병, 나태와 무기력 등 부정적인 모습만 있었던 양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도와 가렴주구의 가혹한 억압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농민 반란의 형태로 분출되고, 특권 상업에 대항하는 근대 지향의 새로운 상업과 상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기였다. 또 양반의 특권적 문화 향수에 대항하는 민중 문화가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것도 이 무렵이었다.

16세기말의 동아시아 7년 전쟁(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 삼국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생산력(주로 농업 분야) 발전도 지속되고 있었다. 그 결과 조선에서도 인구 성장, 도시화, 신분제의 이완 등 근대적 특성이 싹트고 있었다.

사상적으로도, 성리학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통 유학의 변모를 꾀했을 뿐 아니라 외래 종교와 사상에 대한 관심과 수용이 급증하던 것이 "개국"을 앞둔 조선 사회의 실상이었다.

다시 말해 20세기 전반기의 일제 강점과 후반기의 민간·군부 독재라는 엄혹한 상황 속에서 민주화, 산업화, 세계화의 기반을 닦은 것과 비슷한 모습을 19세기 조선 사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이라는 내적 조건이 갖추어져 가던 상황에서 조선 사회는 1876년의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를 계기로 선진 자본주의 사회와의 교섭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사와 자본주의 질서로의 급격한 편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던 결과 마침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조선 사회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새로운 상황을 맞이했던 것이 아니었음은 그간의 역사와 오늘의 현실이 보여주는 바이다.

▲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어 강화도 남문 앞에 모여든 민중들(<한일병합사(1875~1945)>, 신기수 엮음, 눈빛 펴냄). 미지의 변화에 대한 맹목적인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련을 예견했기 때문이었을까?

요컨대, 개국 이후 외부의 충격에 의해 조선 사회의 운명이 불가항력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개국 자체도 외견상으로는 외세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조선 사회의 변화와 발전이라는 내적 조건도 함께 작용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1870년대 이후의 근대 서양 의학과 의료의 도입과 수용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이 무렵 전통 의학의 변모와 발전은 아직 그것을 확인할 만한 연구가 충분하지 못해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근대 사회를 지향해 가던 19세기의 조선에서도 그러한 가능성이 있었던 점은 가설로나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유럽에서 근대 의학이 싹트고 꽃필 수 있었던 배경을 서유럽 사회 자체가 근대적인 모습으로 변모, 발전한 데에서 찾을 수 있듯이 말이다.

그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얼마 전부터 부각되고 있는 사실은 당시 상설적인 약령시(藥令市)가 개설되고 확대, 발전한 일이다. 그만큼 조선 사회의 의료 수요가 커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수요를 주로 민간 부문에서 감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의학과 의료의 발전을 이끄는 힘으로 작용했고, 또한 다른 의학 체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이제마(李濟馬·1837~1900)는 "사상의학"이라는 나름대로 독자적인 의학 체계를 구상하고 있었으며, 그에 앞서 몇몇 실학자들은 서양 의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었다. 특히 두창의 치료와 예방에도 관심이 많던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한역서양의서(漢譯西洋醫書)들을 통해 제너의 우두술을 알게 되었고 1828년에는 자신의 저서 <마과회통(麻科會通)>에 그 내용을 소개했다.

▲ 정약용의 <마과회통>. 초간본은 1798년에 나왔으며, 1828년 판본 부록에 제너의 우두술을 조선에 처음으로 소개한 "신증종두기법상실"(新證種痘奇法詳悉)이 실려 있다. 정약용이 실제로 우두술을 시술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시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근대 서양 의학과 의술은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조선에 점차적으로 도입되고 수용된 것이었다. 이 연재에서 계속 살펴보고 있듯이, 근대 의학은 아무런 준비도 갖추어지지 않았고 받아들일 조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느닷없이 외부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진 "천사의 선물"이 아니었다.

그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 의술을 시행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얼핏 생각하기에는 "최초로 결핵균을 발견한 학자", 또는 "최초로 심장 이식에 성공한 외과의사" 등과 마찬가지로 대답하기 쉬운 것 같지만, 필자에게는 대단히 까다로운 질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대답하기 위해서는 "근대 의술"이 뜻하는 바를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서양 문물=근대 문물", 따라서 "서양 의술=근대 의술"로 간주한다면 대답은 비교적 쉬울지 모른다.

서양 사회 내에서 르네상스 이래 몇 백 년에 걸쳐 다른 분파들과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발달해 온 의학과 의술은 오늘날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를 풍미하는 "보편적" 의학 체계와 의술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양 의학이라는 "진리"와 "정의"가 마침내 모든 거짓과 불의를 제압하고 예정된 승리를 거두었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자신의 종교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힘이 확대되는 것을 신의 섭리라고 해석할지 모르지만, 의학을 포함해서 인간사는 (종교조차도!) 여러 요인과 힘의 상호작용에 의해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개항 이래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의학과 의술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의학 내외적인 여러 요인이 상호작용한 결과였다. 또 다른 문물이나 제도와 마찬가지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서양 의술과 의학이 이 땅에 첫선을 보였을 때, 그것이 오늘날과 같이 번성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앞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자. 필자는 "근대 의술"이란 어떤 사회에서든지 그것이 근대적인 의미를 가질 때 그 이름에 값한다고 생각한다. 단지 근대 서양 의학의 어떤 지식과 기술, 예컨대 우두술을 이용한다 해서 곧바로 그것이 근대적 의미를 띠는 것은 아니다. 비유컨대, 누가 최첨단 로봇 물고기를 얘기하고 사용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최첨단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좁게는 보건 의료 체계, 넓게는 한 사회의 성격이 근대적인 모습으로 어느 정도 변화했을 때, 개개 의술의 근대성도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 땅에 정착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서양 의학과 의술이 조선 사회에 첫 선을 보인 것은 우두술(牛痘術)을 통해서였다. 영국 의사 제너(1749~1823)가 개발한 우두술(제27회)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측면에서 의학의 역사에서 중요하고도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우선 우두술은 인류사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인류가 겪어 온 수많은 질병이 흥망성쇠를 거듭했지만, 그 가운데 인간의 힘으로 완전히 물리친 것은 아직까지도 두창(痘瘡·일본식 병명으로 천연두)이 유일하다. 그 두창으로부터 인류를 구한 수단이 바로 우두술이다. 제너의 우두술 발견과 보급은 근 2세기에 걸친 두창 퇴치의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질병에 대해 진정으로 효과적인 처방을 처음으로 인류가 구사한 근대화의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우두술은 조선,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를 비롯해 서양 이외의 나라에서 서양 의술의 효능을 뚜렷하게 인식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 동아시아 세 나라 모두 우두 의사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을 만든 것이 새로운 의료인 양성 기관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우두술에 관해 흔히 간과되고 있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우두술이 "근대 서양 의학 체계"의 소산인가 하는 점이다. 우두술은, 의학 역사상 유일하게 서양 사회에서 르네상스 이래 발달하기 시작한 인체 해부학과 그것이 임상 의학과 결합함으로써 탄생한 국소적 고체병리학(固體病理學)의 귀결은 아니었다. 우두술보다 한 세기 뒤늦게 성립된 세균학이나 면역학의 논리적 결실은 더더욱 아니었다.

우두술은 제너라는 영국 의료계의 주변적 인물에 의해 도입되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근대 서양 의학의 발달 과정에서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는 시술법은 아니었다. 또한 인두술(人痘術)처럼 우두술이 서양 이외의 나라에서 개발되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우두술이 서양 사회에서 일시적으로는 저항을 받았지만, 곧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던 것은 우두술이 종래의 인두술에 비해 효과가 뚜렷하고 부작용이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크게는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근대 국민국가의 성격을 갖추었다는 점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즉, 국가가 국민의 건강을 국가 통치의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또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천적인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 우두술 보급의 의학외적인 배경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른바 "후발 국가"들에서 우두술이 보급되는 과정을 통해서도 입증되며, 그 점에서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두창은 1959년 마지막 환자가 보고될 때까지,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한국인들을 괴롭혀 온 질병이다. 그리고 역시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대증요법과 더불어 인두술이 사용되어 왔다. 그러던 차에 헌종(憲宗) 때에 정약용, 철종(哲宗) 때에 남상교(南尙敎) 등 주로 천주교인이 비밀리에 우두술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시술 범위는 매우 제한되었을 것이다.

앞의 물음, 즉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 의술을 펼친 사람을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정약용이나 남상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장황하게 언급했던 근대성이라는 측면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 의미는, 시술 범위가 시사하듯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즉, 똑같은 우두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시행되는 시대와 사회의 성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두술이 우리 사회에서 근대적 의미를 갖게 되는 계기는 개항 이후에 마련되며, 그것은 근대 사회와 근대적 보건 의료 체계라는 담론의 등장과 궤를 같이 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