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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vs 연세대…제중원 '뿌리 논쟁'의 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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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울대 vs 연세대…제중원 '뿌리 논쟁'의 진실은?

[근대 의료의 풍경·39] 제중원의 퇴장

1895년 6월과 1902년 11월(신문 보도만 있을 뿐 정부 기록은 없어 확실치는 않다), 정부는 제중원의 환수를 시도했지만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905년 4월 한국 주재 일본 공사관의 거중 조정으로 제중원은 10년 7개월 만에 대한제국 정부로 환수되었다(제24회).

일본 측의 중재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전 해에 세브란스병원이 완공되었기 때문에 대한제국 정부가 제중원을 환수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일본과 미국이 어느 때보다도 밀월 관계를 즐기던 때였지만, 세브란스병원이 세워지지 않았다면 일본이 미국 측에게 제중원 반환을 요청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일본이 제중원 환수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물론 자신의 이익 때문이었다. 환수된 병원 건물은 일본인과 친일파의 사교클럽 격인 대동구락부로 재건축되었고, 에비슨이 사용하던 사택은 1904년 11월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 고문으로 임명되어 을사늑약의 막후 역할을 하는 등 일본의 "공작원"처럼 활동한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1851~1908)의 사택으로 쓰였다.

▲ 대동구락부 건물. 대문 기둥에 "농상공부(農商工部)"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사진은 1907년~1910년 사이에 찍은 것으로 여겨진다. 1912년에는 조선귀족회(회장 박영효) 소유의 귀족회관이 되었다. 지금은 이 자리에 외환은행 본점 주차 빌딩이 들어서 있다. ⓒ프레시안

▲ 장인환(張仁煥·1876~1930)과 전명운(田明雲·1884~1947)의 스티븐스 저격을 보도한 1908년 3월 24일자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가운데가 스티븐스, 왼쪽이 전명운, 오른쪽이 장인환이다. 3월 23일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장인환과 전명운이 각각 독자적으로 스티븐스를 저격했고, 장인환의 총탄에 치명상을 입은 스티븐스는 이틀 뒤 사망했다. 이들의 거사는 다음 해 안중근(安重根·1879~1910년 3월 26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이재명(李在明· 1890~1910년 9월 13일)의 이완용 응징으로 이어졌다. 한편, 살인죄로 기소된 장인환의 법정 통역을 요청받은 이승만(당시 하버드 대학교 석사 과정)은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도울 수 없다며 통역을 거절했다. ⓒ프레시안

이로써 1885년 4월 14일 국왕의 재가에 의해 정식으로 설립되었던(제12회)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제5회)인 제중원은 꼭 20년 만에 운명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제중원의 승계와 관련된 세간의 논란이다.

먼저 광제원과 제중원의 관계를 살펴보자. 1885년, 알렌에 이어 두 번째로 조선에 온 선교의사 스크랜튼(제5회)은 1908년 6월 3일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제1회 졸업식에서 "한국에서 서양 의학의 도래와 발전에 대한 간략한 묘사(A short sketch of the advent and progress of Western medicine in Korea)"라는 제목의 축하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스크랜튼은 광제원을 "어떤 의미에서 옛 외아문 병원(제중원)의 계승자(in some sense the late successor of the old Foreign Office Hospital)"라고 지칭했다.

광제원은 1899년 4월 24일 내부(內部) 소속으로 설립된 국립병원(제23회)이다. 스크랜튼이 광제원을 "제중원의 계승자"라고 했던 것은 아마도 두 병원이 정부가 운영한 국립병원이라는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1900년 10월부터 광제원이 예전의 재동 제중원의 대지와 건물들을 사용했으므로, 광제원과 제중원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던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광제원이 제중원을 계승했다고 하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둘 사이에 법률적, 제도적 승계를 보여주는 근거와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제중원(1885년~1905년)과 광제원(1899년~1907년)은 별개의 국립병원이었을 뿐이다. 또 이후의 국립병원과 제중원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승계와 연결을 말하기 어렵다.

▲ <Korea Mission Field> 1908년 7월호(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소장). 스크랜튼은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제1회 졸업식에서 행한 강연에서 광제원을 "어떤 의미에서 옛 외아문 병원(제중원)의 계승자"라고 지칭했다. ⓒ프레시안

만약 1895년에 조선 정부가 의도대로 구리개 제중원을 환수하여 의학교로 사용했다면 의학교가 제중원을 계승하게 되었겠지만, 당시 조선 정부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리고 1899년에 실제로 설립된 의학교와 제중원의 계승 또는 연관 관계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없다.

그러면 제중원과 세브란스병원의 관계는 어떠한가? 제중원의 운영권은 1894년 9월 에비슨(사실상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게 이관되었다가 1905년 4월에 건물 및 대지와 함께 환수되었다. 일부에서 환수된 것은 제중원의 "건물과 대지"라고 주장하여, 제중원의 운영권과 법통은 여전히 에비슨에게 남아 있는 것처럼 호도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일 뿐이다. 제중원의 건물, 대지와 분리된 별도의 운영권이라는 것은 없었다.

만약 대한제국 정부가 제중원의 대지와 건물을 공식 문서로 미국인에게 양도해 달라는 1902년 4월의 알렌의 요구를(제38회) 받아들였더라면, 그래서 미국 측 소유가 된 제중원 자리에 세브란스병원이 세워졌더라면 제중원은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1905년 4월 10일, 대한제국 외부대신 이하영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한 빈튼 사이에 <제중원 반환에 관한 약정서>가 체결됨으로써 제중원과 미국 측과의 관계는 소멸되었다. 그리고 환수 받은 제중원을 대한제국 정부가 더 이상 병원으로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국립병원 제중원은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 <제중원 반환에 관한 약정서>(규장각 소장). 1905년 4월 10일, 대한제국 외부대신 이하영과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한 빈튼 사이에 이 약정서가 체결됨으로써 제중원과 미국 측과의 관계는 소멸되었다. ⓒ프레시안

"그(세브란스) 병원은 제중원을 이어서 옮겨 세운 것으로(該病院 係是濟衆院之移設者)"(미국 공사 알렌이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보낸 1905년 2월 16일자 공문, 제38회)라는 식의 표현은 알렌이나 미국 측의 자의적 인식일 뿐, 제중원과 세브란스병원의 승계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 외부대신 이하영이 미국 공사 알렌에게 보낸 1905년 6월 5일자 공문. ⓒ프레시안
제중원 때와 마찬가지로 세브란스병원에도 경비 지원을 해 달라는, 바로 위의 미국 측 공문에 대해 외부대신 이하영은 한참 뒤인 6월 5일에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회신했다.

"신제중원(新濟衆院)에 매달 400~500원씩 보조해 달라는 요청에 대해 회답이 늦어진 것은 본 정부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 대신은 그 뜻에 찬성하지만 정부에서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 귀 공사가 국왕을 만날 때 문의해 보십시오."

대한제국 정부는 직접적인 관련이 전혀 없는 세브란스병원에 대해 매달 적지 않은 금액의 경비를 지원해 달라는 미국 측의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때까지도 여전히 친미적이었던 이하영도 알렌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공문에서 세브란스병원을 "신제중원(新濟衆院)"이라고 지칭했다고 하여, 대한제국 정부가 세브란스병원이 제중원을 계승했다고 인정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세브란스병원이 세워지고 제중원이 정부에 환수된 뒤에도 오랫동안 제중원이라는 명칭이 쓰였다. 심지어 1920년대까지도 사용되었다. 예컨대 "血汗의 結晶 귀중한 동정금, 東拓 이민의 私差押의 본보 기사를 읽고 십원 기부, 제중원 내의 일 독자"(<동아일보> 1927년 12월 15일자) 식이다.

세브란스병원 스스로도 제중원이라는 명칭을 병용했다. 사람들에게 익숙하기도 하고 제중원과의 관련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종종 다른 제중원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황성(皇城, (대한)제국의 수도라는 뜻) 제중원"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1900년 무렵부터 "평양 제중원 미국 의사 魏越時(헌터 웰즈)"(<황성신문> 1900년 1월 11일자) 식의 언급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뒤로 점점 확산되어 광주 제중원(광주기독병원), 대구 제중원(동산병원), 선천 제중원, 재령 제중원 등 지방에서 활동하던 장로교 선교 의사의 진료소를 제중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중에는 제중원의 의미가 더욱 넓어져 "불교 제중원 준공 개업"(<동아일보> 1923년 9월 2일)처럼 병원과 비슷한 뜻으로까지 쓰이게 되었다.

따라서 이하영의 공문에 언급된 "신제중원"은 선교부가 새로 지은 병원이라는 뜻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 탁지부 대신 민영기(閔泳綺)가 내부 소관 제중원에 찬성금을 지출할 것을 내각에 제청한 청의서(1906년 5월 31일자). 작성 경위를 알 수 없지만 사실과 전혀 다른 내용이다. ⓒ프레시안
이로부터 1년이 지난 1906년 5월 31일, 대한제국 정부는 "제중원 찬성금(贊成金)"으로 3000환(圜)을 지불할 것을 논의하여 결정했다. 이때 제중원, 다시 말해 세브란스병원에 찬성금을 보내는 이유로 청의서(請議書)에 언급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중원의 설행(設行)이 이미 몇 십 해가 되었고, 백성의 생명을 구하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죽다가 살아나고 위험한 지경에서 목숨을 잇게 된 자가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인데도 아직까지 한 마디 칭찬하는 말이 없고 한 푼 도와주는 돈이 없으니 심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제중원 찬성금을 보내는 것이 이미 정부의 방침인 바, 잘 검토한 다음 찬성금 3000환을 예산 외에서 지출하여 제중원이 널리 시술하는 아름다운 뜻을 깊이 치하함이 마땅합니다."

이것은 물론 1년여 전, 미국 공사 알렌이 세브란스병원의 경비 보조를 요청한 것에 대한 대한제국 정부의 결정이다. 알렌은 매달 400~500원씩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정부는 일시금으로 6개월치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그 사안을 정리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청의서의 내용이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20년 동안 제중원을 국립병원으로 유지했고, 그 가운데 처음 9년 반을 정부가 직접 운영했는데 "한 마디 칭찬하는 말이 없고 한 푼 도와주는 돈이 없다"고 한 것은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1894년 9월 에비슨에게 운영권을 이관할 때까지 정부는 건물, 대지, 설비, 약품, 운영비 등을 모두 부담했으며, 알렌, 헤론, 에비슨, 엘러스, 호튼 등 제중원에서 일한 의료인에게 최상의 대우를 해주었다. 그리고 운영권을 이관한 뒤에도 건물과 대지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병원 건물과 사택의 수리비, 신개축비까지 모두 부담하는 지원을 했다. 운영비도 지원했을 가능성이 있다(제38회).

더욱 큰 문제는 이 문서가 정부와 제중원의 관련을 일체 언급하지 않아, 제중원은 아예 설립 때부터 정부와 무관한 기관임을 시사한다는 점이다. 문서 제목의 "내부(內部) 소관(所管) 제중원"도 제중원이 내부 소속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립병원) 제중원에 관한 업무를 내부가 담당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사실 관계가 완전히 잘못된 정부 문서가 작성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이처럼 내용상의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 만큼, 제중원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에 사용할 만한 사료로서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문서를 근거로 세브란스병원이 제중원을 승계했다는 주장도 무리한 것이다.

다만 이때의 내각 결정에 따라 대한제국 정부가 "제중원 찬성금"이라는 명목으로 3000환(圜)을 세브란스병원에 제공한 사실 정도만을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제중원은 20년 동안 조선(한국)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으로 존립하면서 근대 서양 의학이 이 땅에 도입되고 발전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중원은 역사 속으로 물러난 뒤에도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우리나라의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 가운데 한 가지는 세브란스병원을 통한 것이었다. 제중원에서 일했던 여러 선교 의사의 경험은 선교부가 설립한 세브란스병원의 발전뿐만 아니라 의사 양성 등을 통해 한국 의학을 발전시키는 데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대한제국 정부의 의학교와 광제원을 통한 것이다. 제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얻은 정부의 경험은 의학교와 광제원 등 국립 의료 기관의 건립과 운영, 나아가 역시 의사 양성 등을 통해 한국 의학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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