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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 탄생의 비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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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 탄생의 비밀은?

[근대 의료의 풍경·38] 제중원 운영권 ④

헤론은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제5회).

"정부 병원(제중원) 일을 가능하면 오래 잘하려고 합니다만, 우리 자신의 병원이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면 정부 병원에서보다 환자들을 더 잘 보살필 수 있고 기독교에 대한 교육도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바람은 헤론만이 아니라 제중원에서 일한 모든 선교 의사가 공통적으로 가졌을 것이다. 헤론의 소원은 죽은 지 4년 남짓 지나서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에비슨이 최선의 조건으로 제중원의 운영권을 인계받기는 했지만, 소유권은 여전히 조선 정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인들은 이전과 다름없이 제중원을 "왕립 병원(Royal Hospital)"이나 "정부 병원(Government Hospital)"이라고 했다(제23회). 에비슨이 1901년에 작성한 보고서의 명칭도 "대한제국 병원 연례 보고서(Annual Report of the Imperial Korean Hospital)"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정부가 언제 태도를 바꾸어 제중원의 반환을 요구할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운영권을 이관한 지 채 9개월도 되지 않은 1895년 6월 중순, 조선 정부는 제중원을 되돌려 받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제7회, 제24회). 아마도 의사 양성을 위한 의학교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에비슨과 선교부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조선 정부의 그러한 시도는 성취되지 않았다.

1894년에 에비슨 측이 조선 정부로부터 제중원의 운영권이 아니라 아예 소유권을 넘겨받았으면 어땠을까? 알렌이 "우리는 제중원을 박사님(엘린우드)께 증서로 완전히 넘기든지, 아니면 정부의 찬조 아래 운영할 수 있는 협약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제37회)라고 한 것을 보면 미국 측은 소유권의 이전까지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 정부나 국왕이 선교부와 미국에게 아무리 호의적이었다 하더라도 무상으로 제중원을 넘겨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유상 매입은? 선교부의 의지도 문제였지만 재정적 능력으로 보아서도 가능했을 것 같지 않다.

제중원의 수입-지출 상황을 비교적 뚜렷하게 보여주는 위의 <대한제국 병원 연례 보고서>를 보면 1900년 5월부터 1901년 4월까지 1년 동안 선교본부가 제중원에 제공한 돈은 2040원이었다. 물가 상승과 환율 변동 등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1894년 이전 조선 정부의 제중원 연간 예산인 3000원의 3분의 2에 불과할 뿐이었다. 또 내부(內部)에 소속된 국립 병원 광제원의 1901년 예산(세출) 7332원에 비하면 3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국왕에게 제중원 사업에 필요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지 않겠다"라며 선심 쓰듯 운영권의 이관을 요구했던 에비슨과 선교부의 재정 능력은 이렇듯 충실치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선교부가 제중원을 유상으로 매입하려는 계획은 애초부터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1901년도 대한제국 정부 예산 내역(<황성신문> 1901년 3월 19일자). 내부 소속의 광제원에는 7332원, 종두사(種痘司)에는 3282원이 배정되었다. ⓒ프레시안

제중원의 소유권까지 얻지는 못했지만, 여하튼 운영권을 이관받은 것만으로도 선교부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되었다. 그 동안 하지 못했던 제중원에서의 선교 활동을 이제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다. 진료를 통한 선교, 선교와 진료의 연계라는 알렌과 헤론과 에비슨의 꿈이 실현된 것이었다. 게다가 정부 병원인 이상, 정부가 가진 권위의 혜택도 여전히 함께 누릴 수 있었다. 반면에 정부의 간섭이란 없었으니 금상첨화였다.

이 정도로 유리한 조건이 아니었는데도, 영국성공회와 가톨릭, 그리고 일본 측이 제중원과 인연을 가지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것을 생각하면 북장로교 선교부가 거둔 성과는 매우 컸으며 그 의미도 명백했다.

▲ 알렌이 외부대신에게 보낸 1905년 2월 16일자 공문. 알렌은 제중원의 예에 따라 세브란스 병원(施病院)에도 대한제국 정부가 경비(매달 400~500원)를 보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프레시안
한편, 제중원 운영권 이관 이후 조선(대한제국) 정부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건물과 대지라는 하드웨어, 그리고 정부의 권위까지만 제공한 것이었을까? 1905년 2월 16일 미국 공사 알렌은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1858~1919)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내 세브란스 병원의 운영비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세브란스) 병원은 제중원을 이어서 옮겨 세운 것으로, 제중원으로 운영되던 때 귀 정부의 도와주는 은혜를 많이 입으며 경비를 분담했습니다(該病院 係是濟衆院之移設者 而曾爲濟衆院時 多蒙貴政府助護之惠 支敷經費矣)."

"귀국의 환자들이 그 병원에 머물러 치료받을 때에 소용되는 음식물과 연료용 기름 등의 비용이 적지 않습니다(貴國病人等 留該病院治療之際 食物及柴油之費 果係不少)."

"그러므로 몇 해 전 제중원의 예에 따라 귀 정부에서 이 경비를 보조해 준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則依昔年濟衆院之例 自貴吏政府 補助此等經費 豈非美事耶)."

알렌의 공문에 정부가 제중원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시기가 명확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도와주는 은혜" "경비 분담" 등의 구절로 보아 1894년 9월 운영권을 이관한 뒤에도 조선(대한제국) 정부는 제중원 경비를 보조해 준 것으로 여겨진다. 만약 알렌이 언급한 시기가 운영권 이관 이전이라면, 그것은 제중원의 정체성과 운영의 실상을 크게 왜곡하는 것일 터이다. 운영권을 에비슨에게 넘기기 전까지 제중원 경비는 전적으로 조선 정부가 지출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알렌이 1902년 4월 22일 외부대신 서리 유기환에게 보낸 공문에는 대한제국 정부는 제중원 운영비를 전혀 부담하지 않았다(without costing the Government any money)고 하여, 어느 쪽이 사실인지 혼란스럽다.

설령 운영비를 부담하지 않고 대지와 건물만을 제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작지 않은 역할이었다. 에비슨(선교부)에게 운영권을 이관했고 그에 따라 그 동안 금지되었던 병원 내 선교도 허용되었지만, 제중원이 정부의 병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건물들과 대지를 무상으로 사용토록 했을 것이다. 또 건물을 수리, 개조하거나 신축하는 경우 나중에 제중원을 환수할 때 그 비용을 지불하기로 미국 측과 약정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뒤에 보듯이, 미국 측은 그 조항을 교묘히 이용하려 했다.)

1899년 3월 말 에비슨은 요양을 위해 안식년 휴가를 얻어 한성을 떠나 캐나다로 돌아갔다. 에비슨은 장기 휴가를 떠나면서 어떤 식으로든 제중원을 개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중원은 난방은 물론이고 상하수 시설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제중원에 근무한 여의사 에바 필드가 "선교부는 현재 우리가 일하는 환경처럼 나쁜 곳에서 일 시킬 권리는 없다"(제21회)고 할 정도였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에비슨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애당초 제중원 안에 자기 집을 짓는 데 사용한 8500원을 왜 병원 개건(改建)에 사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8500원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돈이었다. 그 돈을 병원 건물의 신축에 사용했다면 몇 해 뒤에 설립된 세브란스 병원의 절반 가까이 되는 규모의 최신식 병원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에바 필드도 불만만 터뜨릴 것이 아니라 (선교부를 설득하여) 제중원에 인접한 땅과 집을 살 돈으로 제중원의 환경을 개선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에바 필드는 1905년 1만 9020원을 받고 그 땅과 집을 대한제국 정부에 되팔았다.)

어쨌든 4월 하순, 캐나다 토론토로 돌아간 에비슨은 건축가 고든(Henry B Gordon)에게 40 병상 규모의 병원 설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에비슨에게 공감한 고든은 설계를 무료로 해주겠다고 했으며, 건축비로는 1만 달러(2만 원에 해당) 정도가 들 것이라고 말했다.

그 뒤 에비슨은 뉴욕으로 가서 선교본부 총무 엘린우드와 병원 신축에 대해 논의했고, 엘린우드는 병원 건립 기금 모금 계획을 선교본부에 보고하여 허가를 받았다. 그러고는 1년가량 모금에 별 진척이 없었는데, 1900년 4월 30일 에비슨이 뉴욕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서 연설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상황은 급진전했다.

▲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1838~1913). 같은 클리블랜드 출신의 친구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1839~1937)와 함께 1870년에 스탠더드 석유회사를 설립했으며, 1874년부터 22년 동안 재무이사를 지냈다. 자본가와 대부호로 긍정, 부정 양 측면의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 세브란스와 록펠러는 인생 후반기에는 대자선가로도 명성을 날렸다. ⓒ프레시안
그 자리에서 에비슨은 한성에 파견된 선교 의사들이 협력해서 병원 하나를 새로 짓는다면 의료 선교가 크게 발전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에비슨의 연설에 감명을 받은 클리블랜드의 대부호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는 병원 신축 비용 1만 달러를 선교본부에 기탁했다.

1900년 10월 2일 소원을 성취해서 기쁜 마음으로 한성에 돌아온 에비슨은 기왕이면 제중원 안에 새 병원을 짓기를 원했다. 그리고 알렌에 따르면, 세브란스가 병원 신축비로 1만 달러를 기부했다는 소식을 알렌에게서 전해들은 국왕은 알렌과 에비슨에게 병원 신축을 위한 부지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왕의 언질에도 불구하고 새 병원의 터를 마련하는 일이 지지부진하자, 미국 특파전권공사 알렌은 1902년 4월 22일 외무대신 서리 유기환(兪箕煥·1858~1913)에게 공문을 보내 제중원 자리에 새 병원을 짓겠으니, 제중원의 대지와 건물들의 소유권을 미국 측에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알렌은 제중원 자리에 새 병원을 지어야 하는 이유로, 조선인들이 구리개의 제중원 위치에 익숙해 있으며, 새 병원 건물을 새로운 장소에 짓는 경우에는 비용이 2만5000원이나 들 것이고, 또 한동안 병원 문을 닫아야 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그러고는 순전히 병원 용도로만 사용하겠다고 하면서, 병원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제중원의 대지와 건물들을 공식 문서로 미국인들에게 양도할 것(that he(the King) grant by regular deed, this present hospital site and its native buildings, to the Americans for the continuance of the hospital work)을 요구했다.

그리고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에서 에비슨이 제중원 터에 새 병원을 짓게 되면, 1894년의 약정에 따라 나중에 제중원을 환수하는 경우 대한제국 정부는 병원 건축에 쓰인 비용을 모두 갚아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알렌은 공문의 앞 부분에서 이미 그때까지 제중원 건물들의 수리와 신축에 2만5000원을 사용했음을 언급했다.

▲ 미국 특파전권공사 알렌이 외무대신 서리 유기환에게 보낸 1902년 4월 22일자 공문. 병원 사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제중원의 대지와 건물들을 공식 문서로 미국인들에게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 ⓒ프레시안
그런데 1905년 4월 막상 제중원을 환수하면서 대한제국 정부가 지불한 금액은 그보다 절반 넘게 적은 1만1269원90전이었다(제24회). 알렌이 액수를 잘 몰라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대한제국 정부에게 제중원의 소유권을 넘기도록 부담을 주고 겁박하기 위해서 일부러 과장했던 것일까?

공사관 서기관 시절인 1894년 8월 "제중원을 박사님(엘린우드)께 증서로 완전히 넘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we are trying to have the institution either given over to you entirely by deed)"라고 했던 알렌은, 한국 주재 특파전권공사로 승진해서는 미국의 "국익"과 선교 활동의 확장을 위해 더욱 노골적으로 행동했다.

만약 대한제국 정부가 알렌의 요구를 받아들였더라면, 그 뒤 제중원의 역사와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알렌에게 그리도 우호적이었던 대한제국 정부와 국왕도 알렌의 그 요구만은 들어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미국 측도 그러한 대한제국 정부의 대응에 맞서 제중원 내에 새 병원 건물을 짓는 실력 행사는 하지 않았다.

얼마 뒤 그러한 사정을 알게 된 세브란스는 병원 대지 구입 비용 5000달러를 추가로 보냈다. 에비슨은 그 돈으로 6월 초순 남대문 밖 복숭아골(지금의 남대문로 5가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 일대)의 대지를 구입했고, 11월 27일에는 정초식을 가졌다. 그리고 1904년 9월 23일, 병상 40개를 갖춘 현대식 병원, 즉 "세브란스 기념 병원"(Severance Memorial Hospital)이 완공되자 봉헌식을 거행했다. 이로써 선교부 자체의 병원을 갖기를 원했던 헤론의 꿈은 완전히 이루어졌다.

▲ 세브란스 병원(<사진으로 보는 한국 신교 백년>에서). 1908년 일제에 의해 대한의원(大韓醫院)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시설도 단연 뛰어났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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