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아내를 식칼로 위협해 수차례 강간한 혐의(특수강간)로 기소된 강 모(45) 씨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3년6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앞서 이 사건의 1·2심 재판부 역시 모두 강간죄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2심 재판부는 법률상 아내는 강간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강 씨의 주장에 대해 "부부 사이에서 상대방에게 성관계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폭행·협박 등으로 상대방을 억압해 강제로 성관계를 할 권리까지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후 지난달 18일 열린 이 사건에 대한 공개 변론은 세간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공개 변론에서 피고인 강 씨 측 변호인은 "부부 강간의 현상이 존재한다고 해서 형벌이 부부 침실에 들어가 시시비비를 가려야 한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건리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장은 "부부 사이의 반복된 폭력은 타인에 대한 강간보다 더 중한 폭력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며 "부인이라는 이유로 강간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맞선 바 있다.
▲ 지난달 18일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에서 부부 간 강간죄 성립 여부 관련 대법원 전원합의체 공개 변론이 열렸다. ⓒ연합뉴스 |
"부부 강간은 더 큰 상처…내가 쓰레기통이 된 기분이었다"
최근 들어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부쩍 커졌지만, 유독 부부 강간에 대해서만큼은 '범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는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아직도 많은 사람은 "아내랑 하는 것도 허락받고 해야 하느냐"며 부부 사이의 성관계는 '의무'라고 항변한다. 일각에서는 부부 강간을 인정할 경우 이혼을 원하는 아내들이 이를 '악용'할 거란 우려마저 제기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정작 부부 강간 피해자 또는 피해자 가족들은 피해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경우가 많아, 부부 강간 인정이 '악용'될 거란 주장은 지나치게 성급한 우려로 보인다.
가정폭력 상담 현장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은 피해자들이 신체 폭력은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지만, 성폭력은 수치감 등의 이유로 감추고 싶어 한다고 설명한다. 이문자 한국여성의전화 부설 여성주의상담실천소장은 "심각한 아내 강간 사건을 다룰 때마다 '그 얘기(성폭력)는 빼주세요"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지난 10일 열린 '무엇이 아내 성폭력'인가 토론회에서 전했다.
오히려 부부 강간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 때문에, 피해 아내들은 지속적인 폭력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설명도 나온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12년 한 해 동안 언론에 보도된 성폭력 사건을 집계한 결과를 보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남성에게 살해된 여성은 최소 120명에 달했다. (☞관련 기사 보기 : 지난해 3일에 1명꼴로 남편·애인에게 여성 피살)
정춘숙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부부 성폭력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결혼 생활이 청산될 때까지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며 "남편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겪은 여성들은 '내가 쓰레기통이 된 것 같다'고 말하는 등 심각한 두려움과 수치심을 가지고 강간범과 함께 살게 된다"고 설명했다.
한국 사법 체계의 느린 걸음
한국과 달리 유럽 등 서구 국가에서는 20~30년 전부터 부부 강간을 범죄로 인정·처벌하고 있다.
유럽의회는 지난 1986년 혼인관계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강간을 처벌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와 독일은 1997년 전후로 강간죄 성립 범위를 '혼인 외 성교'로 한정했던 형법을 개정하고 부부 강간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부부 사이의 강간을 인정하지 않는 '결혼 강간 면제' 법 조항이 1976년까지 있었으나, 이후 한 주씩 해당 조항을 폐기하기 시작해 1996년에는 17개 주에서 모두 폐지됐다. 현재 미국은 모든 주에서 부부 강간을 성폭행 범죄로 다루고 있고, 피해자는 민사소송도 제기할 수 있다.
프랑스 역시 부부 강간을 강간죄로 처벌한다. 이는 프랑스 형법이 강간을 폭력·강요·위협·충격을 이용해 '타인'에게 가하는 모든 형태의 성적 삽입 행위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1994년 형사정의 및 공공질서법을 제정하며 부부 강간을 강간죄에 포함시켰다.
반면 일본 법원은 '혼인관계가 실질적으로 파탄되지 않는 한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며 부부 강간을 제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일관되게 "부부는 성생활의 의무가 있다"고 판결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09년 서울고법이 정상적인 부부 관계에서도 강간죄가 성립한다는 판결을 내리는 등 하급심에서는 변화가 생기고 있으나, 그간 대법원까지 간 사건 중에 부부 강간이 인정된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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