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도민들에게 강정마을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작가들의 편지 연재는 처음 조정 시인이 제안하고, '제주 팸플릿 작가들'이 참여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20년 넘는 형을 받고 파시스트들의 감옥에 있을 때,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습니다. 로맹 롤랑이 지속적으로 만들어 배포한 팸플릿 역시 크게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제주 팸플릿 운동'은 여기에서 연대의 힘을 발견했습니다.
쓰는 일 외에 별로 잘하는 게 없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평화의 언어로 세상을 물들이고 싶습니다.
서귀포 바람, 애월의 파도, 북촌의 눈물, 위미의 수평선, 쇠소깍의 고요를 생각하며, 두려움과 연민이 어룽진 손으로 제주도민들께 편지를 씁니다. <작가, 제주와 연애하다>입니다. 필자 주
당신은 괜찮을 거예요
항상 그랬습니다. 사이렌이 울리면 우리는 모두 책상 아래로 내려가야 했지요. 의자를 책상 위로 올리고 그 틈으로 어린 몸을 구겨 넣었어요. 작은 짐승처럼 쪼그려 앉아 사이렌이 다시 울려 해제가 되기를 기다리다 보면 가끔은 바닥이 무척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더랬습니다. 반 아이들은 별 반응 없이 기계적으로 이 일에 동참했지요. 하지만 왜였을까요. 매달 15일이 되고 사이렌이 울릴 때마다 섬뜩했거든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손바닥이 축축해졌습니다. 계절이 여러 번 바뀌고 해가 쌓여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았어요. 그때마다 생각했습니다. 나는 전생에 총을 맞았나 보다. 아니면 폭탄을 맞았던 걸까? 아픔은 추상적이었지만 매우 강렬했기에 나의 상상은 언제나 구체적인 징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알고 있었어요. 이것은 훈련이다. 훈련은 실제상황이 아니다.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어린 나는 직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훈련이란 전쟁을 대비한 예비 동작이란 것을요. 정말이지 전쟁을 예비하는 초등학생이라니요.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가요. 손에 총을 쥐여 주지 않는다고 전쟁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은 어떨지요? 훈련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당신을 뒤덮고 사방에서 총소리가 쳐들어와도 당신은 도망칠 발도 없잖아요. 그저 견뎌내야 하는 수밖에 없겠죠. 어느 날 당신이 입고 있던 푸른 잎들이 강제로 벗겨져 상처투성이가 된 몸 위로 시멘트가 부어지고 항만이 들어선다면 아마도 당신이 품고 있던 오랜 이야기들은 모두 먼지처럼 흩어져 버리겠지요. 어린 나처럼 당신도 그렇게 고통스러울까요? 당신이 품었던 깊은 물과 바위들, 당신이 키워 내던 수많은 나무와 풀 들, 그 안에 살고 있는 붉은발말똥게와 연산호들은 또 어떻게 될까요?
다른 건 몰라도 우리가 같은 점이 하나 정도는 있겠군요. 아무리 반복돼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것 말이죠. 우리는 알고 있겠죠. 이것은 단지 훈련이고 예비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 알고 있는 거죠. 그 훈련과 예비가 무엇에 관한 것이란 걸요. 그런 것들은 정말이지 얼마나 아픈 얘기인가요. 물론 준비 없는 평화만을 외치며 가만히 있으면 결국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겠지요. 꼭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당신이 당하고 있고, 앞으로 당할지도 모르는 일들은 어떨까요? 정말 당연한 일일까요? 당신이 지켜내던 그 많은 것들이 사라질 만큼 꼭 필요한 일일까요? 아니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습니다. 왜 꼭 당신이어야 하나요?
ⓒ노순택 |
하지만 괜찮아요. 아직은 다 끝난 게 아니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당신의 곁에서 함께 살아가던 사람들, 먼 곳에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달려와 준 사람들, 모두 다르게 생긴 얼굴과 다르게 생긴 마음이지만 한 곳만은 서로 닮았지요. 당신을 위해 슬퍼하고 아파하잖아요. 그래요. 어떤 이는 밥을 굶고, 어떤 이는 엎드려 절을 하고, 또 어떤 이는 머리를 깎았더랬죠. 그것이 당신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돈이 많아서, 힘이 세서, 당신을 도울 수 있다면 얼마나 쉬웠을까요. 그래도 말이죠.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모여 바꿔 가는 것이란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죠. 지나간 역사가 가르쳐 주었으니까요. 아마 앞으로도 우리는 당신을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버텨 내겠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 그렇게 견뎌 내겠죠. 아직은 괜찮아요. 우리는 각기 다르게 살았지만 닮은 곳이 한 군데쯤은 있으니까요.
이제 곧 가지마다 봄을 틔우고 새잎을 피워 내겠죠. 당신에게도 어김없이 봄은 올 거예요. 언제나 그렇듯 겨울이 가면 봄이 오니까요. 아프고 힘들지만 함께 견뎌요. 당신은 괜찮을 거예요.
신지영 아동·청소년문학가. 2007년 <아동문학평론>, 2008년 <강원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 새로운 평론가상, 창비좋은어린이책 기획 부문상 수상. 동화집 <지구영웅 페트병의 달인>(이효실 그림, 리젬 펴냄), 청소년 시집 <넌 아직 몰라도 돼>(박건웅 그림, 도서출판 북멘토 펴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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