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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로 끝난 '노동자 정치세력화', 앞날은?

[분석] 민주노총의 통합진보당 지지철회, 의미와 전망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가 14일 새벽 내린 '통합진보당 배타적 지지 철회' 방침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2008년 구 민주노동당이 진보신당과 갈라섰던 분당 사태 때에도 배타적 지지는 철회되지 않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는 통합진보당 구 당권파와의 결별이기도 하지만, 민주노조 조직을 기반으로 해 건설된 진보정당의 시대가 끝났다는 해석도 있다.

당면한 현실에서 지지 철회가 가지는 1차적 의미는 유시민 전 공동대표가 언급한 바 있는 통합진보당의 '사망 선고'다. 7만5000명 정도의 통합진보당 진성당원 중 3만5000여 명이 민주노총 조합원이며, 이들이 납부하는 당비는 연 3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노총은 '집단 탈당은 없을 것'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석기·김재연 의원 제명안 부결 이후 이어져 온 당원들의 개별적 탈당 흐름이 가속화될 수도 있다.

이보다 큰 문제는 노동자 계급의 정당이라는 대표성이 사라진 것이다. 노동 분야 전문가인 윤효원 ICEM 컨설턴트는 이번 사태에 대해 "1997년 '국민승리 21' 결의를 통해 민주노총이 시도했던 노동자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도 "노동에 기반을 둔 진보정치의 실험이 일단 실패했다는 공식 선언"이라고 같은 진단을 내렸다.

박 대표는 유럽 등의 경우처럼 노조 기반 정당이 성장해 독립성을 획득한 "발전적 독립과 연대"가 아니라 "잘 안 돼 흩어진 '강제적 별거'라는 희한한 길이 돼버린 것"이라며 "공동 전략을 세우기도 어렵고, 노조가 독자적 방침을 갖기에는 현장이 열악하고, 당은 당장 선거 국면이어서 선거 적응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당도 둘로 나뉘어 적자경쟁을 해야 한다. 지금이 진보정치 최고의 시험대일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거대한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까닭과 관련, 이석기·김재연 의원 제명안 부결로 나타난 통합진보당 내의 문제보다 더 깊숙한 부분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윤효원 컨설턴트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즉 노동자가 중심이 되고 노동자가 주도하고 참여하는 정치세력화 흐름에서 당이 일탈했다"고 지적한다. 구체적으로 그는 "노동자 정당으로서 자기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고 실천할 실무자가 없었다"는 점을 들었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는 "사실 민노당이나 통합진보당이 잘못된 데에는 정당의 문제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노조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에 문제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손 교수는 이번 사태에 대해 "사태가 위중하고 국민 여론이 따가워서 계속 통합진보당을 지지하다가는 민주노총까지 매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고, 노조원들을 설득하고 끌고 나가기 어려운 현실이 이중으로 있는 것 같다"고 배경을 짚었다.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민주노총의 총파업 결의대회. 앞줄에 통합진보당 심상정 의원, 권영길 전 의원의 모습이 눈에 띈다. 권 전 의원 오른쪽은 백기완 민족문제연구소장. ⓒ프레시안

갖가지 해법·전망 나왔지만…

민주노총과 당 내외에서는 갖가지 해법이 나오고 있다. 일부 산별노조는 통합진보당 혁신모임 측과 함께 신당 창당에 나설 모양새다. 민주노총의 통합진보당 지지 철회가 곧 혁신모임에 대한 지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통합진보당에 사망선고를 내림으로써 당을 해산하고 신당을 만들자는 혁신모임 측의 주장이 논리적 정당성을 갖게 된 면은 있다.

또 현재 혁신모임에 가담하고 있지 않은 구 민노계 비연합 세력은 새로 건설될 당이 '노동 중심'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당 안팎을 아우르는 노동 주도의 폭넓은 진보진영 공동추진기구를 제안한다"고 밝혔다.

최규엽, 최순영, 박승흡, 정성희 전 민노당 최고위원 등 17명은 이날 회견에서 "혁신거부세력이 이제 와서 만신창이 당을 사수하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혁신옹호세력은 노동 중심의 진보대통합 정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들의 판단"이라며 "빠른 시일 내 혁신을 거부하는 구태를 청산하고 노동중심의 진보대통합당으로의 혁신재창당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끝내 혁신재창당이 거부될 경우, 2012년 대선 대응과 함께 새로운 노동중심의 진보대통합당 건설에 적극 나선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신당 창당 움직임이 본격화되기도 전부터 이미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고 있다. 윤효원 컨설턴트는 "신당이 만들어지고 민주노총이 거기에 100% 동의한다 해도 (노총의) 역량 자체가 부족해 돕기 어려운 상황인데, 문제는 내부 동의도 안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상훈 대표도 "정치의 정당성은 결과가 말해주는 것이고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면 성과를 낼 수밖에 없는데, (혁신모임 내) 정파들 간의 공동행동을 조직하는 것도 만만치 않을 것이며 선거는 닥쳐있어 최악의 조건"이라고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박 대표는 "현재로는 혁신모임 쪽이 정치적으로 소멸할 가능성이 많다"며 "(반면) 구 당권파는 리더십이 안정돼 있고 활동가들의 헌신성과 대중 조직기반이 있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고 예측했다. 그는 "지금은 구 당권파만 잘못했다 말하기 어렵다. 당직선거 이후에는 혁신모임 측이 지도부였기 때문에 (대중은) 구 당권파의 이상한 행동만이 아니라 이들의 무능력도 문제삼고 있다"면서 "사람들이 잘 안 따라갈 것 같다. 냉소적이고, 지쳤고, 피로현상이 심하다"고 했다.

그는 다만 "유일한 길이 있다면 대선이라는 제도의 힘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며 "빨리 대선후보를 확정짓고 대선후보의 발언권 중심으로 당의 사회적 목소리를 내면서 당을 만드는, '역순'으로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구 당권파는 기존의 노선을 독자 추진할 듯 보인다. 이들은 혁신모임 측의 행보를 "진보 분열 획책"이라고 비난하는 가운데 "민주노총 중집의 결정은 통합진보당의 강화 발전을 바라는 고언으로 듣겠다"고 의미를 축소했다. 이상규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통합진보당은 앞으로도 기층 현장의 변함없는 지지와 튼튼한 대중기반을 소중히 생각하고, 입당 복당 운동과 노동탄압 분쇄 투쟁, 8월 총파업투쟁, 비정규직 차별철폐 투쟁 등에 적극적으로 결합해 노동 현장성을 더욱 강화하겠다"고 했다.

이 의원은 기자들과 만나, 탈당 흐름에 대한 대응으로 "현장에서부터 입당 및 복당 운동을 새롭게 전개할 계획"이라며 "아래로부터의 당원 운동이 기본 방침"이라고 밝혔다. 이 의원은 '구 당권파만 남게 되더라도 당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냥 갈 뿐만 아니라 강화 발전시킬 것"이라며 "2008년에도 (분당 이후) 민노당은 세도 없고 스타 정치인도 없고 종북과 패권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2010년 지방선거에서 복구시키고 야권연대를 선도하며 발전시켰다. 자신있다"고 답했다.

구 당권파 측과 행동을 같이하는 노동계 인사 190여 명은 이날 '분당 반대, 통합진보당 사수를 위한 노동자 운동본부' 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민주노총은 단결과 투쟁을 호소해야지 분당 논란에 휩싸여서는 안 된다. 단순히 지지냐 지지철회냐의 문제를 넘어 이후 진보정치세력화를 어떻게 해 나갈 것이냐의 종합적 판단과 결정이 함께돼야 한다"고 민주노총의 결정을 비판했다. 이들은 "분당은 반노동자 반진보적 행위"라면서 "노동 현장에서부터 분당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노총의 앞날은?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들의 접근은 모두 민주노총-민주노동당 식의 노조-당 관계를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 당권파 측은 아예 '흔들림없이 하던 대로 해나가겠다'고 천명한 상태이고, 혁신모임과 비연합자주 측도 일부 산별노조, 나아가 민주노총 전체가 신당을 지지해주기를 바라며 은근한 '러브콜'을 보내면서도 당과 노조의 관계 설정 등에 대한 새로운 구상은 아직 밝힌 바 없다.

앞서 지난 6월 7일 열렸던 통합진보당 새로나기특위의 토론회 '통합진보당과 노동정치'가 새로이 주목받는 것은 이 지점에서다. 당시 김호규 전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당이) 선거 공학적 접근이나 탈정치적, 중립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적 입장과 가치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면서 "노동 중심성이라는 말이 조합주의적 이해관계를 정당화시키거나 조합 상층 인사들의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것으로 왜곡됐다"고 기존 양태를 비판했다.

이상호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연구위원도 이 자리에서 "(당의) 민주노총 중심성을 단호히 버려야 한다"면서 "2004년 의회진출 후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조합원이 당내 다수가 되어 민주노총의 요구를 실현하는 정당으로 진보정당의 역할이 축소됐다"고 지적한 바 있다. "진보정당이 노동조합의 '고충처리기관'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이 위원은 "노동조합의 요구와 진보정당의 요구가 반드시 일치할 수는 없다"고도 했다.

이같은 지적처럼, 새롭게 짜여질 진보정치의 틀에서 민주노총의 역할에 대한 부분도 토론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은 "향후 민주노총 정치방침 수립은 새정치특위(새로운노동자정치체력화특별위원회)를 비롯한 조직 내의 의사결정 구조 속에서 토론하고 마련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한편에서는 노조 조직이 당의 기반이 되는 유럽식 모델을 벗어나 정책 사안별로 연대하면서 선거에서 지지하는 미국식 모델도 거론된다. 민노당 등 진보진영 출신 인사들이 민주당 행을 택하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사실상 양당제로 가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과 같은 맥락에서다. 그러나 박상훈 대표는 "만약 노동정치, 진보정치가 종결됐다면 울며 겨자먹기로 미국식으로라도 가겠지만 이는 간단히 말해 노동을 위한 정당이나 정치가 없다는 얘기"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박 대표는 "미국식으로 가야한다는 것은 형식논리적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노동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정치적 외피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다만 "문제는 민주노총의 조직적·현장 기반이 과연 (노동자들이) 진보정치의 범위 안에 머물기를 바라도록 하는 힘을 갖고 있나? 부정적이다"라고 지적했다.

박 대표는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 진보세력이 겪게 될 또다른 소용돌이의 초점이 민주노총이 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현장에서는 정치적 냉소주의가 강할 것이고,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을 전체 차원에서 낼 수 있는 합의기반 등이 있는지는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동운동이 유럽처럼 사회적 내용을 갖는 세력이 될지, 미국처럼 주류정치에 종속적인 이익집단으로 축소될지 시험기에 접어들지 않았나 한다"고 덧붙였다.

손호철 교수는 "이번 기회에 민주노총 스스로 정치방침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면서 "아예 정치방침을 갖지 말아야 하는지, 노무현 정부에서 반노동자 정책을 폈던 국민참여당 중심의 새 정당을 지지할 것인지, 민주노총 중심의 새로운 노동자 정당을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 교수는 지지 철회에 대해 "때늦었지만 올바른 결정"이라면서 다만 "단순히 통합진보당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노동운동의 올바른 입장에서 정치적 실천을 할 것인지, 진보정당이 이렇게 된 데에 대한 민주노총의 책임을 반성하고 어떻게 새로운 정치 노선을 만들 것인지 고민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 보이지 않는다. 반 발짝 나간 것이고, 해결이 아닌 시작"이라고 평했다.

윤효원 컨설턴트는 "조직노동자 대중이 중심이 돼서 정치세력화를 하는 노선 자체가 잘못됐다고 보진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노총을 다시 강화하고 노동운동을 혁신하고 전망을 마련하고 인력을 만들어내지 않는 이상 한국에서 노동자 중심 진보정당 운동은 어려울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대중이 존재하는 한 대중운동은 존재하게 되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리더십과 활동가들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올해 대선에 맞추기는 벅차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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