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보스포럼의 최대 화두: '자본주의 위기'
매년 1월말이 되면 스위스 동쪽 끝에 위치한 산골 마을인 다보스(Davos)에서 '전 세계 상위 1%'라 불리는 사람들이 모여 글로벌 경제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인다. 흔히 '다보스포럼'이라 불리는 세계경제포럼(WEF)이 바로 그것이다. 올해로 42번째를 맞이한 이 포럼은 예전과 같이 다양한 경제문제가 논의되었다. 그 중에서도 최대 화두는 작금의 글로벌 경제가 '자본주의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이고, 그에 대한 해법과 대안을 찾고자한 노력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다보스포럼은 신자유주의와 자유무역을 하나의 신앙으로 여겨왔던 것이 사실이다. 2011년 다보스포럼의 주제가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도 공통된 규범을 잊지 말자는 '공통된 규범(shared Norms)'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자유시장경제 원칙에 대한 '전 세계 상위 1%'들의 의식이 어떠한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금년 다보스의 분위기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1월 24일 개막 하루 전, 포럼의 수장 격인 스위스 제네바대학의 클라우스 슈바프(Klaus Schwab)교수는 포럼의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시도를 하겠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죄를 짓고 있고 자본주의 체제를 개선할 때다"라고 고백했다. 이에 외신은 "다보스포럼이 자본주의를 버렸다"는 표현까지도 서슴지 않았고, 포럼의 초반부터 '자본주의의 위기'가 핵심 화제로 부상했다.
'자본주의 논쟁'은 개막 당일부터 뜨거웠다. 노동계를 대변해 참여한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의 샤넌 버로(Sharan Burrow)사무총장은 "정부와 노동자가 한 테이블에 앉아 경제 시스템을 고치지 않는다면 시장 실패는 지속될 것"이라고 일갈했고, 자본주의의 '총아'로 지칭되는 대형 사모펀드 중 하나인 칼라일(Carlyle)그룹의 데이비드 루벤스타인(David Rubenstein)회장은 "만약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부채 문제 등 심각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중국형 국가자본주의 모델이 서구 자본주의를 지배할 것"이라 경고하기도 했다. 심지어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The Daily Telegraph)은 중국모델로 대표되는 국가 가본주의(State capitalism)가 서구 자본주의를 구할 것이라는 선진국 경제학자들의 변화된 관점을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사실 작금의 자본주의가 비판 대상이 된 주된 원인은 금융사들이 정당한 경쟁을 통해 이익을 내는 것이 아니라, 대마불사(Too big to fail)식의 무책임과 자신들만이 세계 경제를 이끌 수 있다는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던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the Wall-street)'와 같은 시위는 탐욕스런 금융권에 대한 분노와 청년실업, 소득불균형 등으로 야기된 사회구조적 불만이 가중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위기론으로 확대된 것이다. 자본주의의 장점은 창의성과 혁신에 의한 경쟁으로부터 그 생명력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공정경쟁에 의한 혁신이 탐욕에 의해 구축(驅逐)되면서 구조적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고, 결국 자본주의가 지금과 같이 각종 합병증으로 시름시름 앓게 된 것이다.
'국가자본주의'가 아시아 국가의 성장을 이끌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국가자본주의'가 기존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약이라는 입장에는 선 듯 동의할 수 없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은 그동안 양질의 저임 노동력을 기반으로 '선진국 따라 하기'를 통해 급격히 성장했고, 최근에는 선진국의 문턱까지 왔다. 그러나 현 수준에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혁신이 필요하다.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이 보여준 '국가자본주의'의 성공 모멘텀은 선진국 경제와 산업을 따라 잡은 뒤에는 둔화될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국가자본주의'를 표방했던 아시아 국가들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글로벌화와 개혁 그리고 혁신을 위해 국가 차원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국가자본주의의 숭배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개방적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의 정치적 실천으로 이뤄진 사회구조에서 형성된 국가제도만이, 장기적인 안정과 지속적인 발전을 구가할 수 있다고 믿어왔다. 이런 까닭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한 이후에도 자본주의 자체가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지난 4년 간, 선진국은 시장을 살리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고 지금까지도 '구제'를 머리말로 하는 각종 계획은 끝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경기부양책에도 불구하고, 불황이 바닥을 찍고 재상승할 것이란 확신에 찬 소리는 누구도 내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갈수록 무기력해지는 정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실망감은 한줄기 빛도 보지 못한지 이미 오래다.
4년이 지난 후, 그간 자신만만했던 '세계를 대표하는 1%'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20세기의 자본주의는 21세기 사회에서 실패하고 있는가?"란 물음이 바로 그것이었고, 자본주의적 정치제도와 경제체제 및 사회문제에 대한 반성과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제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 형성된 정치, 경제, 문화 등이 전면적인 위기에 직면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경제학자들로부터 제기된 것이 자본주의체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와 어떤 제도와 모델이 그 답이 될 것인가란 막연한 질문들이었다.
그러나 그 해답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왔다. 지난 30여 년간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실현하고 있는 중국이 바로 그 해답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중국모델을 "국가자본주의"라 정의하면서, 이는 기업의 소유권이 국가에 귀속되고 국가가 주도적으로 기업에 자금과 정책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라 정의했다. '국가자본주의'는 순식간에 인구에 회자되었고, 중국모델은 자본주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인식되기까지 했다. 중국에 대한 미사여구는 점차 구체적인 데이터와 함께 아름답게 포장되었다. '경제 총량에서 세계 2위', '세계 1위의 외환보유국', '지난 30여 년간 연평균 9.8%의 경제성장률', '세계의 공장' 등은 중국의 대명사가 되어 각종 매체를 도배했다.
2012년 1월 21일자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국가자본주의'가 가장 성공한 국가로 중국을 지목했다. 세계경제의 발전이 갈수록 중국을 비롯한 소위 이머징 마켓(Emerging market)의 경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근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일종의 맹신은, 단지 이론적 측면만을 강조하고 있는 경제학자들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이를 따라하는 국가도 있다. 러시아 푸틴(V. Putin) 총리는 중국을 모범답안으로 삼아 중국식 국유기업 모델을 모방했고, 국가만이 혁신에 필요한 자본 지원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또한 영국의 조지 오스본(George Osborne) 재정부 장관은 경제위기의 돌파구로 런던을 홍콩에 이어 RMB 역외 거래 중심지로 지정되도록 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경기 불황 속에서 독일의 토목장비가 대량으로 중국에 수출되고, 중국인들이 프랑스산 보르도 포도주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점 등이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상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본주의를 구할 수 없는 중국
누군가가 자신의 매력에 빠져있고 심지어 자신의 모든 것을 숭배하기까지 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아마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미사여구로 정신이 혼미해져 방향감을 잃고 난 후, 서구 자본주의가 초래한 파국을 수습해야 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자본주의의 폐단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결코 마멸되거나 해체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강력한 성장 동력을 가진 중국을 들여다보면 빈부격차가 상상을 초월하고, 엄청난 극빈층이 어떠한 해결 방안도 없이 방치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중국 스스로도 자신이 사회주의 초급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평가하며 개혁ㆍ개방의 고삐를 늦추고 있지 않다는 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최근 중국과학원이 발표한 『2012년 중국 지속발전 전략 보고』는 중국 정부가 정한 빈곤층 기준인 농촌지역 기준, 1인당 연간 순소득이 2,300RMB(한화41만4000원, 2011년 기준)이하의 빈곤층이 1억2,8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중국 정부는 음성수입이 과도해 고소득자 집계가 어려워 2000년 이후 11년째 지니계수 발표를 거부하고 있기도 하다. 중국 사회과학원이 2005년에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당시의 지니계수는 0.47로 분석한 바 있으나, 세계은행 및 경제전문가들은 현재 중국의 지니계수가 0.5를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니계수는 소득불평등을 나타내는 대표적 지수로 0이면 완전평등, 1이면 완전불평등으로 해석되는데, 0.4~0.5 범위는 폭동을 유발할 정도로 소득불평등이 매우 심각한 수준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는 완벽하지 않다. 또한 수많은 구조적 문제가 산재해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자본주의의 새로운 문제들이 분출됐고,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는 침체 국면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전면적인 위기에 직면해 붕괴할 것이란 주장은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자본주의가 창의성과 혁신에 의한 경쟁으로 그 생명력을 갖는다면, 능동적인 자정 능력은 자본주의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개진과 발전을 통해 위기를 극복해 왔다.
지금 자본주의가 직면한 문제는 국가경제의 주력 산업이 제조업에서 금융업으로 이행되면서 나타난 결과다. 선진국은 제조업을 개도국으로 이전시키면서 금융업을 중심으로 국가의 부를 창출해 왔다. 산업구조의 재편을 통해 고도화를 달성했지만 이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실험이었다. 따라서 작금의 위기를 산업의 위기라 하지 않고 금융위기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며 무모한 실험으로 인해 스스로 자초한 패착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선진국 국민은 높은 수준의 사회보장과 복지를 향유할 수 있었지만 그 대가 또한 엄청났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프랑스 통신회사 알카텔-루슨트(Alcatel-Lucent)의 벤 버바이엔(Ben Verwaayen) 최고경영자는 다보스포럼에서 "자본주의는 여전히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제도이며, 자본주의는 부와 기회 그리고 자유를 창조했다"고 강조하면서 "자본주의가 만든 가치와 이념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문제는 어떻게 응용하는가?"에 있다고 주장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까지 자본주의에 적응한 선진국에게 '국가자본주의'를 적용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국가자본주의'는 수출기업간의 경쟁이 치열하고 사회보장체제가 미흡하며 국가개입에 제한이 없다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빈부격차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보다 심각하다. 더욱이 연해지역이 21세기에 걸맞은 하이테크 도시의 특징을 가지고는 있지만, 국토의 2/3를 차지하는 내륙지역의 대부분 도시들은 아직도 현대화란 말을 쓰기 민망할 정도의 수준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국가자본주의'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초급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봐야 한다. 더욱이 경제구조의 불균형 발전, 경제발전의 지속성과 질적 수준 및 과학ㆍ기술력의 경쟁력 등에 있어 심각한 비대칭적 편차가 존재한다는 점에서도 중국 경제가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다고 하겠다.
중국은 각종 언론 매체가 쏟아내는 찬양에 득의양양할 필요가 없다. '국가자본주의'란 대안은 경제침체 국면에 있는 자본주의 국가 사람들이, 단지 답답한 속을 풀기 위해 한번 내뱉는 말일뿐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중국은 자본주의를 구제할 수도 없을뿐더러 구원자도 될 수 없다. 중국은 지속적인 고도성장을 위해 개혁ㆍ개방 노선을 계속 견지할 수밖에 없다.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절대로 머리를 들어 앞서지 말라"는 덩샤오핑의 말을 잊어서도 안 된다.
자본주의의 미래는 변혁이 관건
작금의 자본주의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믿음은 그저 막연한 기대와 희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철저한 자기 성찰과 자정능력 그리고 창의성과 혁신에 의한 경쟁은 오래된 규칙과 관습 그리고 관행에만 안주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자극했고, 부단한 변혁과 변용을 통해 자생력을 키워온 것이 자본주의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해법의 최대 관건은 바로 자본주의가 어떠한 변혁과 변용을 진행할 것인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국가자본주의'가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국유화" 혹은 글로벌 경제발전의 중요 방향으로 작용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국가에 의한 "보이는 손"으로 대체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과정에서 나타난 주요 기업들의 "파산"을 국유화로 회생시킨 경험과 국가의 책임 하에 채무를 변제해 준 사례가 "케이지언(Keynesian) 사민주의"를 부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변혁(용) 혹은 전환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자본주의를 형성할 것이라 기대는 하지만, 지금의 자본주의 제도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의 등장은 아직 시기상호라 판단된다. 일부 전문가들은 정부가 기업을 주도하거나 업계의 관행을 새롭게 정립한다면 이익충돌이 발생할 것이며, 심지어는 이러한 행위가 제도적 부패(systemic corruption)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정책을 통해서만이 자본주의의 문제를 개선할 수 있다고 본다. 세제개혁을 통해 경제의 왜곡 현상을 최소화한다면 소득분배의 균형은 보다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투명하지 않은 재정지출을 감소시킬 수만 있어도 각종 사회보장제도는 보다 효과적으로 개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금융업에 대한 제한도 가능해 자본주의의 문제가 상당 부분 개선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변혁과 변용을 하던 간에 자본주의는 이미 장기간의 자성과 개혁의 단계에 들어선 상황임에 틀림없다. 자본주의의 경쟁 상대는 더 이상 사회주의가 아니다. 두 체제 간 상품과 자본 그리고 기술, 사상 및 문화 등의 교류와 절충 과정에서 나타나는 끝임 없는 상호작용과 자기 혁신을 통한 개선에서 자본주의의 미래를 찾아야 할 것이다. 과거에도 유사한 위기와 문제가 있었지만 자본주의는 이를 극복해왔다. 이는 자본주의가 창의성과 혁신에 의한 경쟁 그리고 자성과 자정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보스포럼이 위기를 진단하고 그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부정적으로만 보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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