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말라 시내의 중심은 그곳 사람들이 아랍어로 '마나라'라고 일컫는 원형 로타리다. 한 가운데에 대리석 돌기둥이 있고 주변을 돌사자들이 둘러싼 '마나라'는 우리말로 옮기면 '등대'를 뜻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948년 1차 중동전쟁으로 2000년 전부터 살아오던 땅을 잃었고,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으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마저 넘겨주었다. 이스라엘의 식민지배 아래 놓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겐 거친 풍랑에서 민족의 앞길을 밝혀줄 '등대'가 절실할 것이다.
그 마나라 가까이에 전에는 보지 못했던 특이한 조형물이 하나 눈길을 끈다. 어른 키보다 4배쯤 높이로, 연단 위에 제법 큰 의자를 하나 놓여 있다. 의자에 영어와 아랍어로 쓰인 문구는 '유엔 정식 회원국은 팔레스타인의 권리'. 잘 알려진 바처럼, 팔레스타인은 지난 2011년 가을 미국 뉴욕에 있는 유엔에서 회원국 가입을 꾀했으나 이스라엘과 그 강력한 후원국인 미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통령의 통신기술부문 보좌역인 사브리 사이담(전 통신부장관, 42)를 만났을 때 '의자 조형물을 왜 그냥 놔두냐'고 물었다.
"지난해 가을 팔레스타인의 유엔 가입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한 뒤 우리 팔레스타인 사람들 모두 다시금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통령이 그 의자 조형물을 그대로 놔두도록 한 것은 그 나름으로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곳을 오갈 때마다 하루라도 빨리 팔레스타인 유엔가입을 실현시켜 독립국가를 이루겠다는 팔레스타인의 의지를 되새기도록 하자는 뜻에서다"
팔레스타인에게 유엔 회원국이 되는데는 실패했지만 위안이 되는 일은 있었다.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정회원국 자격을 얻은 데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자 미국과 이스라엘이 발끈하고 나섰다. 이스라엘 정부는 "유네스코에 이스라엘이 해마다 내온 2백만 달러를 내지 않겠다"고 했고, 미국 오바마 정부도 유네스코에 대한 재정지원을 끊겠다며 이스라엘을 감쌌다.
▲ 이스라엘에 세운 8m 높이의 분리장벽에 그려진 '한잘라'. 원작자인 나지 알 알리(1938~1987)가 그려낸 한잘라는 생존권을 앗긴 팔레스타인 민중의 상징적 인물이다. ⓒ김재명 |
고립된 미-이 동맹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을 맺고 팔레스타인에 자치정부가 들어선지 거의 2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안타깝게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희망인 독립국가의 꿈은 이뤄지지 못한 상태다. 이스라엘 강경파들은 "1967년 6일전쟁 경계선 이전으로 돌아가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미국도 이스라엘을 감싸고 돌 뿐이다.
이스라엘은 국제사회로부터 '깡패국가'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최근 유엔에서도 이스라엘은 궁지에 몰렸다. 지난 3월22일 유엔 인권이사회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정책이 팔레스타인 인권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비난 결의안(A/HRC/19/L.34)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킨 바 있다(찬성 44, 기권2, 반대 1).
이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진 국가는 단 하나. 미국이다. 이스라엘을 감싸려는 미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에서 이스라엘 비탄 결의안들을 잇달아 거부권으로 막아왔지만, 인권위는 다르다. 거부권이 없는, 인권위 소속 47개 회원국으로서의 한 표를 행사할 뿐이다.
이스라엘의 강경파들은 "인권 상황이 더 나쁜 곳이 많은데 하필 여기가 늘 표적이냐. 국제사회가 아랍인들의 선전에 놀아나고 있다"는 불만을 내뱉는다. 미국도 문제다. 팔레스타인의 유엔가입에 찬물을 끼얹고 이스라엘이 계속 유대인 정착촌을 늘려가는 것을 못본 채 하는 현실은 미국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를 드러낸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감싸다가 국제시회로부터 고립되는 모습이다.
현상유지가 아닌 '현상유지'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1967년 경계선으로 물러나고, 동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도로 인정하고, 유엔총회 결의안 194(1948년12월11일)에 따라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를 세우면서 쫓아냈던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귀환 권리를 존중해주고, 팔레스타인 점령지에 세우고 있는 유대인 정착촌을 철거하라는 요구를 해왔다.
이스라엘은 그런 요구를 묵살하고 현상유지 정책을 펴고 있다. 평화협상도 없고, 쫓겨난 난민들의 귀환도 없고,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도 없고, 그러면서 유혈분쟁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현상유지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현상유지가 아니다. 시간을 끌면서 유대인 정착촌을 늘려가는 것이고, 그럴수록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존권이 위협을 받는 그런 '현상유지'다.
▲ 서안지구의 라말라 근처의 한 유대인 정착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평화적 생존권을 위협하는 정착촌은 국제사회로부터 중동평화의 암초로 비판 받는다. ⓒ김재명 |
평화적 생존권의 문제
유엔사무국 산하의 인권관련 업무를 맡은 기관인 OCHA(Office for the Coordination of Humanitarian Affairs)가 최근에 내놓은 통계자료는 2011년 한해 동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유대인 정착촌으로부터 얼마만큼 생존권을 위협받는가를 보여준다.
△유대인 정착촌의 공격은 32% 늘어났고, △팔레스타인 농부가 기르던 나무(레몬나무, 올리브나무 등) 1만 그루가 잘리거나 불탔고, △139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유대인 공격을 견디지 못해 살던 곳을 떠나야 했고 △"유대인 정착민들에게 피해를 입었다"며 팔레스타인 원주민이 낸 민원의 90% 이상이 아무런 행정조치 없이 묵살됐다.
이스라엘에는 "우리 유대인의 생존이 먼저다"라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존권을 파괴하는 극단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원하는 땅을 돌려주고 우리가 바라는 평화를 되찾아야 한다"는 평화공존의 열린 생각을 지닌 이는 소수다.
가장 최근의 총선인 2009년 총선에서 나타난 유권자의 투표성향을 보면 강경파 8 대 온건파(평화공존) 2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비롯해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와 정부를 장악한 강경파 정치인들이 유대인 정착촌 확장을 밀어붙이는 것은 그들의 뒤에 이스라엘 유권자들의 유대인 중심의 극단적 정치성향이 도사리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존권을 유대인 정착민들이 그들의 종교적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정착권에 견주어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마구잡이로 정착촌 건설 확대 움직임을 보이는 데 대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저항하는 것도 원주민인 그들의 자유로운 삶, 평화적 생존권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 팔레스타인 시위현장에서 만난 이스라엘 평화운동가들.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에 반대하는 이들은 이스라엘 정치지형에선 소수자에 속한다. ⓒ김재명 |
제주 해군기지와 유대인 정착촌
팔레스타인 현지를 취재하면서 제주도 강정마을이 떠올랐다. 그곳 주민들이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까닭은 국가안보 논리를 내세운 해군기지가 그들의 평화적 생존권을 위협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대인 정착촌을 반대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논리와 같은 맥락이다.
우리 인간은 평화적 생존권 및 평화로운 상태를 위협하는 어떠한 외부적 강제조치도 거부할 권리를 지녔다. 평화적 생존권(줄여 평화권)은 인간안보의 권리, 안전한 환경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국가의 불법적, 반인권적 행위에 대해서 모든 인간은 양심적 거부와 불복종의 권리를 가진다. 최근 국제사회에서 유엔을 중심으로 평화권(평화적 생존권)을 국제인권법으로 정립하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음은 반가운 일이다.
이스라엘은 국가안보란 이름 아래 월등한 국가폭력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해왔다. 제주 강정마을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지는 중이다. 국가안보도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 이름으로 인간안보와 평화적 생존권이 유린된다면 그것은 큰 문제다. 태어난 땅에서 인간다운 삶을 평화적으로 누릴 권리를 지님은 제주 강정마을 사람들이나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이나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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