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러한 양적 확대와 형식의 격상에도 불구하고 이를 관리할 수 있는 정치안보 메커니즘은 효율적으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남북관계나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김대중-노무현 시기보다 크게 후퇴했다. 또한 민간 수준에서 양국 국민의 상호인식과 호감도도 개선되지 않고 있으며 외교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혐한(嫌韓)이나 반중정서가 여과 없이 등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 시기 한중관계는 수교 20년 중에서 최악이라는 평가도 만만치 않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후반기로 가면서 양국간 인식차이와 기대차이는 하나의 프레임으로 고착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왜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했는가.
▲ 이명박 대통령이 중국 지진 피해 어린이를 청와대에 초청한 장면 ⓒ뉴시스 |
첫째, 이명박 정부의 세계와 중국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다. 한반도에서 한중관계는 한미관계의 대체재는 아니지만 한중관계의 한미관계화는 빨라지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이미 국제질서는 무극(non polarity)로 일컬어질 정도로 힘의 분포에 변화가 나타났다. 이러한 상태에서 영토와 역사문제 등 지정학적 안보이익이 급증하는 한편 지역질서가 국제구조에 영향을 주고 중요한 행위자들의 안보자율성도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는 과거 정부의 접근방식과는 달리 세계‧동북아‧한반도로 접근했고 한미동맹과 지구적 보편성이 안정적으로 작동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것이 성숙한 한국(global Korea)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인식의 틀 속에서 중국은 이념과 가치를 달리하는 '사회주의 국가'이며 '매력국가'가 아니었다. 중동에서 쟈스민 혁명이 발생하자 중국도 '중진국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단이 외교안보 서클에서 횡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기에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사건을 거치면서 북한을 두둔하자, '중국위협'이라는 이미지도 덧씌웠다. '미국이냐 중국이냐'는 이분법적인 논리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따라서 2008년 한중양국은 러시아, 인도 등과 같은 높은 수준의 외교형식인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맺었지만, '전략'을 협의하기는 출발부터 어려웠다. 즉 국제(國際)관계가 인간관계(人際)의 연장이라면 취약한 신뢰의 기반에서 이룰 수 있는 전략적 협력은 애초부터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대중국 프레임의 문제였다.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정부의 '균형자론'을 비판하면서 한미동맹을 가치동맹으로 발전시키고 이를 인격화했다. 그리고 '더 이상 좋을 수 없다'는 한미동맹의 프레임에서 중국을 접근해왔기 때문에 군사안보영역에서의 한중관계의 독자화는 한계가 명확했다. 사실 '지역'의 수준에서는 미국의 쇠퇴와 중국의 부상이 가져온 중첩(intersection)의 일상화는 새로운 도전이었기 때문에 한미관계와 한중관계를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것은 하나의 이상형이자 구두선에 불과했다. 중국도 가치를 넘어 협력한다는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거두어 들이고 중국의 대한국 프레임을 독자적으로 설정했다. 한국을 접근하면서 미중관계, 6자회담 그리고 북중관계를 통해 한국을 접근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외교정책의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한미동맹도 새롭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첫 중국방문을 앞두고 중국외교부 대변인이 "한미군사동맹은 냉전이 남겨준 유산"이라는 발언도 하나의 해프닝만은 아니었다. 더욱이 2010년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거치면서 한국이 미국의 동아시아 진출의 길을 내주고 있다고 인식했고 북한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북중관계의 발전은 중국의 정책목표를 수정한 것이라기 보다는 한반도 상황변화에 따른 수동적 대응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셋째, 한국의 대중국정책의 한계는 북한체제의 존재방식에 대한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한 점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관계를 강화하는 동시에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여 북한을 정상국가로 만들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중국도 북한부담론을 느끼고 한중협력에 적극적일 것이라는 예단과 기독교적 '소명의식'이 결합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으로서는 븍한체제의 안정이 한반도정책의 일관된 목표였고 그 방식은 남북대화와 6자회담 등 대화를 통한 해결이었다. 반면 이명박 정부는 김정일 위원장 건강이상설이 불거진 이후 범정부적 차원에서 북한급변사태를 주요한 정책 어젠다로 설정했다. 이러한 북한문제에 대한 인식과 해법의 차이는 한중협력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한중 양국이 차관급 전략대화를 정례화하고 '전략'의 핵심인 북한문제를 효율적으로 다루고자 했으나, 중국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 결과 '북방상실'이라는 비용은 한국이 지불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미국도 북한에 대한 '전략적 인내'를 접자 한국배제(Korea passing)가 표면위로 나타났다. 비록 2009년 중국과 북한의 인공위성 실험과 제2차 핵실험 결과 유엔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이 통과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양국이 협력했으나, 이것은 중국의 대북정책 조정과정에서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 당시 대북정책에 대한 온도차이는 명확했다. 이와는 달리 중국은 북한의 후계체제가 어느 정도 가닥을 잡자 북한의 지전략적 가치를 새롭게 주목했다. 2010년 천안함, 연평도 사건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냉정과 절제 그리고 대화를 통한 해결'이라는 입장과 김정일 위원장을 중국에 불러들여 북중간 전략적 소통을 강화한 것은 한중관계와 북중관계의 전략적 차등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 것이었다.
넷째, 대중국 사령탑(control tower)이 없었다. 중국은 더 이상 한중 양자관계의 맥락에서 접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부 시기 중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한미관계와 한중관계의 동시발전을 주장했지만, 구체적인 대중국 전략을 짜는 그룹이나 집단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대중국정책의 혼선이 곳곳에서 감지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실패한 남북관계에도 불구하고 대북강경정책을 유지하는 것을 자신의 정치적 성과로 삼으려는 고위관료도 있었고, 국내 반중여론이 고조될 때마다 외교라인을 벗어나 '중국 때리기'에 나서는 일들이 나타났다.
이것은 과거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같은 기구와 조직을 없앤 원인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남북관계의 공고화를 통해 한중관계의 지렛대를 확보하고자 하는 역사의식의 빈곤이 더 큰 원인이었다. 여기에 외교안보 핵심라인에 중국문제에 정통한 '중국통'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과 안정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가동하기 어려웠고 중국에게도 중국을 중시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었다. 비록 외교통상부 동북아국을 확대 개편하는 등 조직과 인력은 보강하고 연구기능을 강화했으나. 여전히 북미라인과 '동맹파'가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국라인이 창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았다.
다섯째, 대중국 메시지 관리에 실패했다.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중국이고 중국과의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미국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이러한 메시지 관리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정책은 한미동맹으로 환원된다는 이미지를 중국에 심어주었다. 한미 FTA가 체결되지 '군사동맹+경제동맹'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공개적으로 한미일 안보협력을 과시하면서 중국의 우려를 불러일으켰으며, 한반도에 위기가 발생하면 곧바로 미국의 항모를 불러들이고 대통령이 야전점퍼를 입고 한미연합사도 달려가는 등의 행동은 중국에게는 매우 불편한 신호였을 것이다. 사실 대중국 정책의 핵심은 신뢰에 기반한 긴 호흡을 유지하는 것이다. '물이 흐르면 길이 열린다(水到渠成)'는 말처럼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장기적이고 축적된 메시지 관리가 필요하다.
예컨대 탈북자 문제를 처리를 두고 예의 '조용한 외교'를 버리고 중국과 날을 세우거나 서해에서의 충돌사건이 발생하면 곧바로 '총기사용'을 언급하는 것은 국내여론을 고려한 대증 처방이다. 그 결과는 우리의 안보이익이 걸린 상황에서는 정작 전략적 협력을 이루지 못하고 새로운 메시지를 만들어야 하는 비용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 이후 초라한 한중협력은 이를 웅변해 주고 있다. 물론 대중국 메시지 관리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인권에 대한 가치는 한국이 양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도 일관되어야 하고 이중적인 잣대를 사용하거나 즉흥적이서는 곤란하다. 즉 중국에 '아니오'라고 하기 위해서는 미국에도 '아니오'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명박 정부는 이와 같은 몇 차례 기회의 창을 '동맹의 덫'에 걸려 무산시켰고 집권 후반기로 가면서 정권의 인기하락을 '중국때리기'로 만회하는 방식을 동원하고 있다.
대중국전략의 핵심은 한국이 존중받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적 '핵심이익'을 설정하고 지켜나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양한 지렛대를 확보하는 것이다. 특히 남북관계를 역진이 불가능할 정도로 관리하는 것이고, 지역공동체에 대한 기여를 통해 중국을 불러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민간협력을 질적으로 높여 외교안보협력의 자산으로 축적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대중국정책은 동맹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중국과 공진(共進)존하는 법을 효과적으로 제시하지 못했고 북한과 지역에 대한 지렛대로 중국을 견인하는 상상력도 빈곤했다. 반면교사로 학습하기에는 비용을 너무 많이 지불했다.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소장 이수훈)가 발행하는 <한반도포커스> 2012년 3·4월호(제17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번 호의 전체 주제는 '이명박 정부 4년 : 외교‧안보‧대북정책 평가'입니다. (☞전체보기)
* 원제 : 이명박 정부의 대중국정책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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