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현, 이종석,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은 17일 서울 조계사 경내 한국불교역사문화관에서 열린 토론회 '김정은 체제와 한반도의 진로'에서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진전을 위한 방안에 대한 의견을 개진했다. 행사에는 청중 200여 명이 참석해 열기를 띠었다.
정세현 전 장관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해 "기조부터 잘못됐다"면서 "비핵·개방·3000은 남북관계를 핵 문제에 종속시킨 구조"라고 비판했다. 이는 김영삼 정부 때 '통일부가 할 일이 없게 만든'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이라면서 반대로 핵 문제를 남북관계와 병행하는 정책을 취했을 때 9.19 공동성명 등 핵 문제 해결을 위한 토대가 마련됐다고 주장했다.
정 전 장관은 이명박 정부 들어 "3명의 장관들(김하중, 현인택 전 장관과 류우익 현 장관)이 비핵·개방·3000을 뛰어넘는 이론을 대통령에게 건의해 변화시켰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안타깝다"면서 "다만 류 장관이 유연하게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데 정부 안에는 '관성'이 있는 것 같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북한도 그러면 안 된다"면서 "이쪽에 유연성을 발휘하려는 장관이 있다면 그 분이 일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어야 한다. (…) '상종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도 말했다.
이종석 전 장관 역시 비핵·개방·3000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 그는 "포기하면 얼마를 해 주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포기하게 할 것인가'가 정책 과제"라면서 "북측에 비핵화를 하면 얼마를 주겠다'라고 하는 게 무슨 정책인가"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은 '비합리적'이라며 "북한이 나오겠다는 6자회담도 전제조건을 걸어서 못 나오게 막고 있으면서 북핵 문제가 더 엄중해졌다고만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전쟁 가능성이 있는 군사적 제재나 중국의 존재 때문에 효과가 없는 경제제재 모두 답이 아니라면 경제적 보장을 통해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하는 정책을 취하는 수밖에 없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할 수 없는 이상 핵 협상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 한국 정부의 '운명'이라면서 "2010년 1월만 해도 한미 양국은 북한이 조건없이 무조건 6자회담에 복귀해야 한다고 했는데 천안함 이후에는 사과가 없으면 6자회담도 없다고 했다. 정신분열적이다. 그러면 북한은 좋다고 핵 개발을 계속할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재정 전 장관은 천안함·연평도 사태로 인한 긴장 격화는 10.4 남북정상선언에서 채택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법이 정한 것들을 근본적으로 무시한 것"이 문제라며 참여정부 막바지에 마련된 '남북관계발전 기본 5개년 계획' 역시 하나도 실행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의 사회로 열린 이날 토론회는 프레시안과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한겨레신문 4사가 공동 주최하고 사단법인 한반도평화포럼과 시민평화포럼의 주관으로 열렸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재직했던 정세현·이종석·이재정 장관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며 2010년 발생한 천안함·연평도 사태는 전 정권이 추진한 북한과의 화해협력정책(햇볕정책)의 성과인 10.4 선언을 부정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뉴시스 |
정세현 "MB, 류우익 밀어주라…북한도 그러면 안 된다"
토론회에서는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의 이명박 정부 정책 대안에 대한 제언도 나왔다. 정세현 전 장관은 "남북관계를 임기 말년에라도, 조금이라도 개선하고 싶다면 류우익 장관이 말하는 '유연성'을 대통령이 적극 밀어주라"고 제안했다.
그는 "그 유연성은 인도적 지원, 식량지원에서 시작해야 한다"면서 "그러다 보면 이산가족 문제를 논의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금강산 관광 문제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때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실무 협의를 시작하고 임기 전에 23차 장관급 회담을 열고 떠나는 것이 정권의 역사적 책임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이명박 정부 임기 내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 전망이 대부분이었다. 이종석 전 장관은 "정부의 의지가 있는지 잘 모르겠고 북한도 할 것 같지는 않다"면서, 설사 이 대통령이 의지를 보인다 해도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다고 그 분의 언어가 그 행동이나 뜻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봐왔지 않나"라고 꼬집었다.
또 세 명의 장관들은 공통적으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6자회담의 조속한 재개가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정 전 장관은 "북한과 협조하고 통로를 열어서 6자회담을 빨리 여는 것이 북한이 '몸값'을 불리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라고 했고, 이종석 전 장관도 "6자회담을 재개하는 문제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합의가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무조건 재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석 "남북관계가 민주주의 가로막지 않게 해야"
참석자들은 또 대북정책이 한국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과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이재정 전 장관은 "기업인들이 (북한에 들어가) 임가공업을 하면서 지난 20년간 800개 업체가 벌어와 세금 낸 돈이 북한에 쌀을 지원한 돈보다 많다"면서 "평화를 만들기 위한 남북 교류협력 더 강화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 전 장관은 "한반도 상황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서는 대북 지원으로 상호 의존성을 키워야 한다"면서 "쌀과 비료를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북한이) 군사 도발을 못하게 해서 국민들이 편히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종석 전 장관은 최근 고(故) 이청호 경사의 순직으로 논란이 된 북방한계선(NLL) 인근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 문제를 거론하며 "결국은 NLL을 평화협력특별지대로 해서 남북 간 분쟁이 없이 해야 중국 어선 문제도 막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북한이 싫다고 대화를 안 하면 그사이 중국 어선이 맨날 들어와 그 짓을 하지 않나"면서 "북한이 좋아서 대화하는 게 아니라 국민들의 삶을 증진시키는 많은 문제가 연결돼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남북 문제와 통일문제는 수구세력이 '북풍 몰이'를 한다든가 하면서 끊임없이 국내의 민주화와 개혁에 발목을 잡고 1987년 성립된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원인이 됐다"면서 "남북 문제가 민주주의를 가로막지 않는 체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정 "김정은 체제 불안정해지면 문제 더 복잡해져"
세 명의 장관들은 '김정은 체제'의 안정성과 북중관계, 남북관계, 대미관계 사안 등에 대한 정세 전망도 제시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김정은 체제는 현재 상당히 안정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단기적인 급변사태 발생 등의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정세현 전 장관은 "장기적 불안정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10년 이내 북한 사회주의 체제나 김정은 정권이 붕괴할 가능성은 낮다"면서 "식량난이나 경제난 때문에 북한이 붕괴한다면 마오쩌둥(毛澤東) 시절 중국도 붕괴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한의 폐쇄적 체제 속성을 들어 "모두가 배고플 때에는 오히려 체제가 안정된다. '배아픈' 사람들이 나와야 한다"면서 개혁개방 과정에서 외부 문화가 유입되고 북한 주민들 내 계층 분화가 일어나야 오히려 북한의 변화가 생겨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재정 전 장관은 북한이 과거 두 차례의 헌법 개정과 국방위원회 및 당 중앙군사위원회 인사를 통해 상당 부분 '김정은 체제'를 준비해온 것으로 보인다면서 "(북한이) 안정적으로 가야지, 불안해지면 그 이후 나타날 한반도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고 우려했다.
북중관계 전망에 대해 그는 "중국이 공격적으로 북한에 경제 투자를 하거나 협력을 강화하는 게 아니고 수동적으로 북한이 요구하는 한계 내에서 모자란 부분만 투자하는 것"이라며 중국의 대북 영향력 확대를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종석 전 장관도 "북한이 중국과의 경제관계를 확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시장경제·개방으로 나온다는 것이니 나쁘지 않다"면서도 "문제는 남북관계가 균형을 잡아주지 못하면 그때부터 나빠지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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