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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한미정상회담, '박근혜 해법'을 제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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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5월 한미정상회담, '박근혜 해법'을 제시하라

[정세현의 정세토크] 박 대통령, 신뢰 프로세스 구체화해야

한반도에 드리웠던 위기의 먹구름이 조금씩 걷힐 듯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대화의 뜻이 있음을 밝혔고 케리 미국 국무장관이 한중일을 방문하고 북한 비핵화 대화에 대한 메시지를 분명하게 보냈다. 케리는 마지막 방문지인 중국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중국과 함께 6자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주 빨리(very quickly) 움직이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에 대한 북한의 반응도 나온 상태에서 이제 관심은 5월 7일에 있을 한미정상회담으로 쏠리고 있다.

4월 18일 <프레시안>은 정세현 원광대 총장(전 통일부 장관)을 만나 정세 변화를 면밀하게 진단하고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어떻게 가져올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았다.

4월 18일 북한은 국방위원회 정책국 성명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담화를 통해 "대화를 원한다면" "도발 행위를 중단, 사죄"하고 "유엔의 대북 제재를 철회"하라고 밝혔다. 정세현 총장은 북한이 내건 '조건절'에 주목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5월 7일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 문제를 최우선순위로 놓고 대화에 임하라고 주문했다.

정 총장은 이 과정에서 남북 관계가 북미 관계에 비해 속도가 뒤처지는 것 같다 하더라도 서두르지 않고 평화협정 체결에 대한 확신을 북한에 심어주면 자연스럽게 남북 관계에도 속도가 붙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정 총장은 3월에 한미독수리훈련이 시작되는 바람에 박근혜 정부가 얘기한 신뢰 프로세스를 구체화할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라면서 한미정상회담에서 큰 틀의 방향성에 대해 합의한 뒤, 국민적 동의를 구하며 구체화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한 북한도 핵보유국 지위에 관한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핵실험을 두 번 성공한 것 가지고 국제적으로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며, 핵보유국 지위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군사적 안전 보장과 경제적 지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대담 전문이다. <편집자>

▲ 정세현 원광대 총장 ⓒ서해문집

프레시안 :
지난 8일 북한의 개성공단 잠정 폐쇄 조치로 최고조에 이르렀던 한반도 안보 위기가 박근혜 대통령의 대화 의사 표명, 케리 미국 국무장관의 대북 대화 제의 등으로 일단 소강 상태에 접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중일 방문을 마친 케리 장관이 대화 제의를 한 데 대해 북한이 강경 반응을 보였습니다. 18일 국방위원회 정책국 성명을 통해 "한미 양국이 대화와 협상을 원한다면 모든 도발 행위들을 즉시 중단하고 전면 사죄하라"고 요구했는데, 이러한 북한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정세현 : 북한의 화법에서는 조건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어떤 때는 조건절이 주절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을 때도 있어요. 조건절은 그냥 넘어가고 주절에서만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핵심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도발 행위들을 즉시 중단하고 전면 사죄하라"는 주절보다 "대화와 협상을 원한다면"에 주목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북한이 "대화와 협상을 원한다면"이란 표현을 쓴 것은 한국이 아닌 미국의 대화 제의에 화답한 것으로 보입니다. 케리 장관의 발언에서 뭔가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봐야 해요. 케리 장관은 양제츠(杨洁篪) 중국 국무위원과 회담한 후 발언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미중 양국이 노력할 것이며, 이를 매우 빨리(very quickly) 진전시키기 위해 두 나라가 추가 협의(further discussions)를 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2005년 9·19공동성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를 하면서, 6자회담은 물론 2자회담, 4자회담도 가능하다고 얘기했어요. 북한은 그걸 보고 '괜찮은 메시지구나' 하고 판단한 뒤 이런 반응을 보인 걸로 생각합니다. 내부적으로 득실을 많이 따졌을 거예요.

물론 협상에 임하는 북한의 입장은 2005년과는 많이 다를 것입니다. 스스로 핵보유국임을 내세우면서 비핵화보다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먼저 논의하자고 요구할 겁니다.

프레시안 : 2자회담, 4자회담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정세현 : 만약 6자회담부터 열자고 한다면 판을 어떻게 짤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시작해서 수많은 협상과 기싸움, 물밑 접촉 등을 거쳐야 합니다. 일을 쉽게 풀려면 미국과 북한이 먼저 만나서 판을 어떻게 짤 것인지에 대한 합의를 한 뒤에 6자로 가는 게 빠릅니다.

예를 들어 2007년 2.13 합의는 형식은 6자회담이었지만 그전에 2006년 11월부터 미북 양자가 틀을 짜놓고 6자회담에서 추인받는 형식으로 진행했습니다. 2.13 합의는 9.19 공동성명을 이행하기 위한 실천 로드맵인데, 그것이 만들어진 배경이 복잡합니다. 9.19공동성명은 미국에서는 국무부가 주도하여 2005년 9월 19일에 합의됐는데. 바로 다음 날인 9월 20일부터 재무부 쪽에서 북한의 불법 자금 세탁에 이용된다는 이유로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은행(BDA)의 북한 계좌를 동결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경제 제재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결국 북한으로 하여금 9.19공동성명에 대한 미국의 의지를 의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죠. 아무리 다른 부서라지만, '한 대통령 아래에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북한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이죠. 그러면서 '미국이 우리를 살살 달래서 우리 핵능력만 약화시키고 실질적으로 우리 뒤통수를 때려서 무장 해제를 시키려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으면서 바로 핵폭탄 만들 준비를 했습니다.

결국 그로부터 1년 후인 2006년 10월 9일 핵실험을 하지 않습니까? 핵실험을 하고 나니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북한을 압박하던 부시 정부가 11월에 북한과 양자 접촉을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해주면 되겠느냐. 9.19공동성명이 매력적인가? 우리가 그동안 사정이 있어서 이행하지 못했는데 이제 본격적으로 하자.' 이렇게 하면서 그 이행 계획을 만든 게 2.13합의입니다. 어쨌든 북미 양자 협의가 선행됐기 때문에 짧은 기간 안에 6자회담에서도 합의를 이뤄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 점에서 북한 입장에서는 2자회담이 매력적입니다. 4자회담, 6자회담으로 가기 위해서는 2자회담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북한의 생각일 겁니다. 18일에 "대화를 원하다면"이라는 토를 달았지만, 사실은 거기에 북한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는 것이죠.

4자회담이 북한에 매력적인 이유는 9.19 공동성명 4항과 관련이 있습니다. 9.19 공동성명은 6개항으로 구성돼 있는데 1항이 한반도 비핵화, 2항 북미·북일 관계 정상화, 3항 에너지 등 대북 경제 지원, 4항이 한반도 평화 체제 논의입니다. 구체적으로 4항은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 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다"라고 돼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별도의 포럼 관련 당사국이란 한반도 정전 체제 및 평화 체제와 관련된 남북미중 4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남북미중 4자회담은 곧 한반도 평화 체제에 관한 논의를 의미하는 것이죠. 어찌 보면 4자회담이라는 것이 6자회담보다 핵심이에요. 한반도 평화체제를 요구하는 북한으로서는 4자회담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이 반가운 일일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북한으로 하여금 "대화를 원한다면"이란 표현을 쓰게까지 만들었는데, 이렇게 띄워놓고 또다시 미국에서 북한을 향해 "비핵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느니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들어가는 조치를 선행하라"느니 하는 식으로 나오면 북한은 미국의 진의가 뭐냐 하면서 의심하고 대화 테이블에 안 나올 겁니다.

그동안 북미대화, 북핵회담의 역사를 보면 클린턴 정부 때부터 그래 왔습니다. 백악관이나 국무부가 모양을 만들어 놓은 뒤 그 이행을 위해서는 실무자들이 들어갑니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 전문가나 외교 전문가가 아니라 핵 검증 전문가들입니다. 이들이 들어가서 사사건건 "이건 이렇게 고쳐라", "저건 저렇게 고쳐라" 하면서 미국 쪽에서 합의 사항을 이행할 시간을 자꾸 늦춥니다.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우리도 이행 못 한다" 하는 식으로. 그러니까 원칙적인 합의를 해놓고 난 뒤 이런저런 기술적 이유를 대면서 자꾸 지원을 늦추니까 북한으로서는 미국의 본심이 뭐냐는 의심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북한은 미국이 지원에 나설 수밖에 없도록 압박을 가하는 수단으로 더 강수를 뒀죠. 그런데 우리는 미국에서 원인을 제공했던 부분은 생각 안 합니다. 그렇게 보고 싶어 하니까. 그런데 국제 정치, 외교에서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쪽은 계속 좋은 친구(good guy)이고 다른 쪽은 계속 나쁜 녀석(bad guy)일 수 있겠습니까? 엄연히 상대가 있는 문제인데.

박 대통령이 4월 9일 국무회의에서 북한이 위기를 조성하면 타협하고 지원하는 악순환을 끊어야 된다고 발언했는데, 좁은 대롱을 통해 북한만 바라보고 있으면 그런 식으로 보게 됩니다. 대롱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라버리고 보는 것이죠. 미국도 약속 위반을 많이 했습니다. 클린턴 정부만 해도 1994년 10월 21일에 제네바 기본 합의를 체결해놓고 17일 후인 11월 7일 중간 선거에서 민주당이 대패한 뒤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바람에 제네바 기본 합의를 제대로 이행을 못 했습니다. 그다음부터 북한은 미국의 본심을 의심하게 됐습니다. 자신들의 핵 능력만 동결시키고 시간을 끌면서 다른 방법으로 북한을 와해시키려는 거 아니냐는 것이었죠. 그래도 클린턴 정부 때까지는 성의 있게 나가면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사업은 계속했습니다. 그래서 2002년 10월 켈리 당시 국무부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해 고농축우라늄 문제를 제기하기까지 북핵 문제는 없었습니다. 북한이 경수로 건설에 대한 기대 때문에 핵 활동을 안 했으니까요.

그런데 부시가 고농축 우라늄 문제를 구실로 경수로 건설을 중단시키니까 2003년부터 북한은 IAEA 사찰관을 추방하고 핵 활동을 재개하는 등 강수를 두었습니다. 이에 부시 정부는 북핵 문제를 다자회담 방식으로 풀자면서 5자회담을 제의했고, 북한이 다시 6자회담을 역제의해 2003년 8월 6자회담이 성사됐습니다. 장시간 협상을 거쳐 2005년 9.19공동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BDA 제재가 시작된 거죠.

이런 지난 역사 때문에 북한이 미국의 진의에 대해 계속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오바마 정부가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확고한 자세를 확립해야 하는데, 그것을 한국 정부가 촉진시켜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평화협정 문제를 우선적으로 협의하는 4자회담을 열어도 좋다는 열린 자세로 나가 북한 핵 활동의 진전을 막아야 우리 국민들이 편히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협정을 뒤로 미루면 북한은 회담에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서 핵 활동은 계속할 것이고요. 그렇게 계속 시간을 보내면 북한은 핵보유국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북한에 핵멱살 잡혀 헉헉거리면서 미국에 매달려 핵우산도 확대해야 하고 미사일방어체제(MD)도 사야 되고 국방 예산도 확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4자회담도 좋다, 북미회담도 빨리 열어라', 이런 식으로 나가야 합니다.

프레시안 : 케리 장관의 대화 제의에 북한이 내심 관심을 갖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겠군요?

정세현 : 그렇죠. 북한이 말로는 사죄하라 뭐하라 했지만, 20일 정도 남은 한미정상회담에서 좋은 말들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독수리 훈련 종료 이후 상황까지 고려한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북한이 저 정도 나오면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북한이 6자회담에 나올 수 있도록 자리를 깔아주는 데 우리가 미국을 리드해나가야 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에게는 북핵 문제가 우리만큼 절박한 것이 아닙니다. 이란 문제가 더 중요하고. 북핵은 해결되면 좋고 안 돼도 크게 나쁠 것은 없는 것이에요. 핵기술이 이란 등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들로 이전만 안 된다면, 즉 핵 비확산만 보장된다면 '핵보유국으로 공식 인정은 하지 않은 채' 실질적으로 핵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을 용인하는 것이 미국의 군산복합체나 국방부에는 나쁠 것이 없습니다. 국방부나 군산복합체에 북핵은 꽃놀이패예요. 우리에게는 죽고 사는 문제이지만.

프레시안 : 2005년 9.19공동성명 때와 달리 3차례 핵실험에 성공한 북한은 스스로 핵보유국이라고 하는데, 만약 북한이 회담 테이블에 나온다면 핵보유국 지위로 나오려고 하지 않을까요?

정세현 : 핵보유국 인정을 해줘야 회담에 나올 수 있다고 할 수도 있겠죠. 이미 그런 뜻을 비쳤습니다.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했다는 평가들이 나오니까 북한은 "이제 비핵화회담은 필요없다. 핵군축회담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었지요. 4월 20일에도 그런 요구를 내놓았지요. 북한으로부터 그런 요구나 주장이 나올 것을 미리 예상하고 케리 장관의 한중일 순방 후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에 핵탄두의 미사일 탑재 능력은 없다고 본다"고 선을 그은 겁니다. 기술 수준이 아직 핵보유국이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핵탄두를 미사일에 실을 수 있는 경량화, 소형화 기술이 없다는 겁니다.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는 미국이 절대 인정 안 할 겁니다.

그럼 핵보유국 인정을 안 해주면 북한이 회담에 안 나올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데, 아마 평화협정 문제의 진지한 논의에 대한 의지가 확인되면 나올 것이라고 봅니다.

▲ 2월 12일 북한의 핵실험 보도. 북한은 '제3차 지하 핵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발표했다. ⓒ연합뉴스

북한도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핵실험 3번 해서 2번 성공했는데, 그걸 가지고 핵보유국이라 하는 건 대내용이죠. 2번 실험한 걸로 국제적인 핵보유국 인정은 받기 힘들 거예요. 파키스탄의 경우를 보면 적어도 5번은 해야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크게 걱정할 대목은 아닙니다. 평화협정 체결 문제가 잘 풀려나가면 북한도 핵보유국 주장을 계속하면서 회담 진전을 가로막지는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것보다 시급한 것이 평화협정이기 때문입니다. 군사적 안전 보장을 받아야 하니까. 나아가 미국과 수교가 돼야 국제 사회의 경제 지원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미국과 수교한다는 것은 단지 미국의 경제 원조뿐만 아니라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것입니다. 세계은행(World Bank)이나 아시아개발은행(ADB) 같은 곳에서 대북 차관을 제공받으려면 최대 지분을 갖고 있는 미국이 승인을 해줘야 하니까요.

프레시안 : 미국은 핵 비확산에 더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이는 반면 우리는 반드시 비핵화까지 이루어야 하는 입장입니다. 양국의 정책 목표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정세현 : 미국의 본심이 뭐냐는 것을 따져봐야 합니다. 아마 미국은 비핵화면 좋고 비확산도 크게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일 겁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한국이 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히 비핵화를 고집하면 그렇게 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외교에서 공식적인 입장(official statement, proclaimed policy)과 본심(real intention, real strategy)이 이율배반적인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에 공표해왔던 공식적 입장에 입각해서 미국을 압박하면 국제 평화 유지 책임을 자처해온 미국이 '사실은 내가…' 하면서 본심을 내세우기는 힘듭니다. 공식적으로는 비핵화를 내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비확산이 군산복합체의 본심일지는 모르지만, 국무부와 백악관, 국방부까지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비핵화입니다. 명분 면에서 미국이 비확산을 공식 입장으로 채택할 수 없는 상황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또 그게 국제적으로도 말이 됩니다.

가끔 전문가들의 기고문이나 토론 내용을 보면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의 비핵화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선반도 비핵화는 수령님의 유훈이다"라는 표현을 북쪽에서 많이 쓰는데, 이건 자신들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없애려면 남쪽 것도 없애야 한다는 것이죠.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식으로 말하면 조선반도의 비핵화인데 이걸 북한의 비핵화로 동일시하는 경우, 남북대화나 6자회담에서 중대한 착오가 생길 수 있습니다. 북한의 입장에서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없애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의 한국에 대한 핵우산도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반도 남쪽 미군의 전술핵은 1991년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채택 때 모두 철수했습니다.

그 뒤 한반도 안보 위기 때마다 한국이 전술핵 재배치를 요구해도 미국이 거절했습니다. 전술핵을 들여오는 것은 비밀리에 할 수 없는 일이고, 핵을 들여오면 당장 북한에 비핵화를 요구할 수 있는 도덕적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미국 지상군의 핵무기는 없습니다. 다만 핵우산을 통해 북한 미사일에 대응해 요격 미사일을 쏴줄 수도 있고, 괌 등의 기지에서 핵항모나 스텔스 전폭기에 탑재하고 있는 핵무기를 필요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없앤 건 아닙니다. 북한이 말하는 조선반도 비핵화, 우리식으로 하면 한반도 비핵화라는 말 속에는 북한의 핵무장을 해제시키려면 남쪽도 미국의 핵우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가 실려 있다는 것을 정확히 알고 단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북한의 핵만 뺐으면 우리는 걱정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부산에 입항하는 미군 핵추진 잠수함이나 이지스함에 싣고 다니는 무기 중에 핵미사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도 한반도 해역에 출몰하지 말라는 게 북한의 조선반도 비핵화 요구, 한반도 비핵화 요구입니다.

프레시안 : 오는 5월 7일 박근혜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 간의 한미정상회담이 북핵 문제 해결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견해가 많습니다. 한국 정부의 전략은 어떠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정세현 : 박근혜 정부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추진하겠다는 건 반가운 일입니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는 두 정상 간에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대한 공감대를 구축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론을 협의해야 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케리 장관이 이번 한중일 순방 과정에서 언급한 2자회담, 4자회담 방식으로 일을 시작해서 핵문제 해결의 수순을 빨리 밟자고 요구해야 합니다.

지난번 정세토크에서 얘기했던 '힐러리 해법'을 다시 추진하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바마 1기 때 힐러리 국무장관이 내놓은 해법의 골자는 9.19 공동성명의 4항이었던 평화협정 문제에 대한 협의의 우선순위를 끌어올리겠다는 것입니다. 당시 힐러리 장관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미국이 세 가지를 해주겠다고 했었죠. 첫째가 미북 수교, 둘째가 평화협정 체결, 셋째가 경제 지원이었습니다. 오바마 정부 출범 초기인 2009년 2월 13일에 처음 이 얘기를 했고, 1차 북핵실험 이후 7월 23일과 11월 21일 등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이런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비핵-개방-3000'을 내세우며 북한의 선비핵화를 요구한 이명박 정부의 반대로 결국 진전을 보지 못했죠.

미국으로서는 이명박 정부가 자꾸 말리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고 그런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온 말이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입니다. 북한이 위협적인 행동을 해도 거기에 놀라지 않고 자세를 바꿀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애매한 정책을 정당화하는 개념이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오바마 1기 정부의 발목을 잡던 이명박 정부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2자회담, 4자회담 빨리 해라. 평화협정 겁낼 것 없다"며 제안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평화체제가 구축되면 주한미군이 철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번 정세토크에서 얘기한 것처럼 이미 지난 1992년 1월 미국을 방문한 김용순 당시 북한 노동당 국제비서가 아놀드 캔터 미국 국무부 차관에게, 그리고 2000년 10월에는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이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에게 미국이 북한과 수교만 해주면 평화 유지자로서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용인하겠다고 말한 바가 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평화협정 문제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 2000년 10월 김정일-올브라이트 회담 내용을 확인·다짐하는 절차는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과 조건이라면 우리 입장에서도 평화협정 논의를 못 할 이유가 없어요. 우리 사회 일각에는 아직 미군의 주둔 문제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많지만, 2009년 힐러리가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대책도 없이 평화협정 우선 논의를 제안하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이번 케리 장관의 4자회담 언급도 난데없이 튀어나온 얘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니 이번 정상회담에서 '힐러리 해법'과 '케리의 4자회담 구상'을 좀 더 현실성 있게 수정·보완한 '박근혜 해법'을 미국에 제안하고 합의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프레시안 : 그렇지만 평화협정 논의를 빌미로 북미 관계가 너무 진전되면 한국이 소외되는 것 아니냐는 이른바 통미봉남에 대한 우려가 나올 수 있고, 또 개성공단 문제라든가 남북 관계 개선에 관한 요구가 나오지 않을까요?

정세현 : 모양새로는 남북 관계가 먼저 풀리고 긴밀해지는 토대 위에서 미북 관계가 빨리 개선되도록 촉진하고 도와주는 게 좋죠. '선 남북 후 북미'가 모양이 좋은데. 불행히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이명박 정권에서 계획을 세웠던 독수리 훈련이 너무 세게 진행됐어요. 훈련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와서 더 강해진 건 아니에요. 대개 보면 올해 훈련 계획을 전년도에 세웁니다.

김영삼 정부 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노태우 정부 말년인 1992년 가을에 국방부가 1993년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를 결정해버리니까 새 정부 들어 김영삼 대통령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훈련에 들어갔고, 이게 한 원인이 되어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죠. 1992년에는 남북대화 진전을 위해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했었는데,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팀스리트 훈련을 1993년에 재개하니까 북한이 발끈한 거죠. 당시 팀스피리트 재개를 결정한 미국 측 주역이 바로 아버지 부시 대통령 때 국방장관이었고 아들 부시 대통령 때는 부통령으로서 네오콘의 수장 노릇을 하면서 북핵 문제 해결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었던 딕 체니였습니다.

1993년에 팀스피리트 훈련이 재개되면서 그해 3월 북한이 NPT 탈퇴 선언을 하자 북미 대화가 먼저 시작됐어요. 핵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이를 관리하기 위해서 미국이 미북 대화를 시작하려 하니까 김영삼 대통령이 그걸 막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김영삼 정부의 견제나 불평은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과 대화를 시작했고 북핵 문제 해법을 논의했습니다. 우리가 못 하게 말리는데도 미국이 자기 필요 때문에 그냥 가버리니까 미북 간에는 대화가 있고 남북 간에는 대화가 막히는 상황, 이것이 통미봉남이었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김영삼 정부 시기의 그러한 선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무작정 미북 대화를 막으려 할 것이 아니라 권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어차피 키리졸브, 독수리 훈련 때문에 남북 관계도 꼬이고 개성공단도 막힌 상황에서, 개성공단이 시급하다 할지라도 남북관계는 뒤에 시작해도 좋다는 열린 자세로 북미 대화가 먼저 될 수 있도록 밀어주면 북한도 개성공단 등과 관련된 남북 대화에 나오리라고 봅니다. 물론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은 그것대로 지금부터라도 해야 합니다.

▲ 지난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 문산읍 남북출입사무소에서 개성공단 관계자들이 출경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 북한 당국은 이날 오전 10시 30분경 개성공단관리위원회를 통해 개성공단 입주기업 대표단 10명의 개성 방문을 불허했다. ⓒ뉴시스

최근 정부의 남북 대화 관련 발표 내용을 보면, 남북 관계 의제를 개성공단에만 국한하려는 것 같은데, 이것도 입장을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성공단 출입과 조업 재개만 얘기한다면 북한에게는 큰 매력이 없습니다. 개성공단 문제를 얘기하려면 자연히 이명박 정부 시기 중지됐던 2단계 200만 평 개발을 다시 시작하자는 얘기를 해야 합니다. 개성공단의 규모를 지금보다 확대하자는 전향적인 제안을 내놓으라는 것이죠. 그리고 개성공단은 북한이 중단시켰는데. 우리가 중단시킨 금강산 관광 재개를 개성공단 출입 자유화하고 같이 묶어야 당국 차원의 대화가 성사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두 문제를 포괄적으로 묶어서 당국 간 경제 회담으로 시작하여 이후 장관급 회담과 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수순을 취해야 합니다. 개성공단 문제 하나만 가지고 마치 계란 노른자만 쏙 빼먹으려는 식으로 접근하면 별 효과를 못 볼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남북·미북 관계가 동시에 가면 좋겠지만, 필요하다면 미북 관계가 한발 먼저 나가도 좋다는 자세로 접근하는 게 북한으로 하여금 북핵 해결에 전향적으로 나오게 할 수 있는 길이라고 국민들에게 설명하면 될 것입니다.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에 그런 전향적 자세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는 것도 아직 구호 차원이지 구체적 내용이 없고, 이번 위기 대응 과정에서 우왕좌왕했다는 비판도 있던데, 한반도 평화 체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걸로 보시는지요.

정세현 : 신뢰 프로세스에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것은 사실인데 신뢰 프로세스를 구체화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겁니다. 구체화할 수 있는 시점인 3월부터, 그전보다 한층 강도가 높아진 키리졸브 훈련과 독수리 훈련이 시작됐죠. 키 리졸브 훈련은 비록 도상훈련이라고 해도 북한의 심장부를 타격한다는 개념으로 훈련을 했다는 것이 북한을 자극했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북한이 강경 대응한 거 아닙니까. 바로 이어진 독수리 훈련에서는 B-52, B-2 폭격기에, F-22 전투기가 뜨고 핵잠수함, 이지스함까지 왔다갔다 하니까 북한이 그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 저항하지 않았습니까? 신뢰 프로세스의 내용을 구체화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시간도 없었죠.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하는데 한미정상회담에서 신뢰프로세스의 방향성에 대한 합의를 한미 간에 먼저 끝내놓고 그걸 토대로 내용을 구체화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정권 출범 6개월도 안 된 상황에서 앞으로 5년 가까이 쓸 것을 미리 내놓는 건 대통령이 그 분야에 대해 전문성이 있는 대통령이 아닌 한 기대하기 어려운 일입니니다.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자신이 1971년 7대 대선 때부터 남북 관계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었고, 15대 대선 직전에는 아태 평화재단을 통해 3단계 통일론까지 내놨기 때문에 그때는 로드맵이란 게 있었습니다. 지금의 신뢰 프로세스에는 그런 게 없지만 한미정상회담 이후 만들면 됩니다. 이전 정부에서 그런 것들이 잘 만들어진 선례를 잘 따르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로드맵을 만들 때는 외부 전문가들 의견을 잘 받는 것도 필요합니다. 대북 정책은 국민적 지지를 받아야 하는 것이므로 중론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 핵심에는 대통령의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한미정상회담 이후 신뢰 프로세스의 로드맵을 만들어서 우선 국민들부터 이해를 시켜야 합니다. 북한에 써먹으려면 그 대상인 북한의 이해도 중요하지만 우리 국민에게도 남북 관계 발전에 대한 신심을 줘야 하거든요. 국민적 지지와 동의를 받으려면 전문가들의 의견을 널리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북 정책에 관한 한 비밀 군사작전 계획이라면 몰라도 남북 관계 특히 통일 문제에는 국민적 동의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국방부와 통일부의 차이가 그것이에요. 공개적으로 해야 하고 국민적 동의와 지지를 끌어내야만 대북 차원에서 추동력이 생깁니다. 그리고 국제적 협력을 끌어들이는 데서도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큰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프레시안 : 일각에서는 중국이 북한에 대해 압박을 가하면 북핵 문제가 풀리는 것 아니냐는 기대가 있습니다. 핵실험 등 북한의 행동에 대해 중국이 불쾌해하고 있다면서, 일부 언론에서는 중국 대북 압박을 주문하고 있는데.

정세현 : 북한이 핵문제로 하도 중국을 곤란하게 만드니까 중국도 짜증이 날 수도 있죠. 하지만 더 큰 그림을 보아야 합니다. 중국은 후진타오(胡錦燾) 주석 후반기부터 동북3성 진흥 계획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 계획 속에는 길림성 쪽에서 나진·선봉으로 나가는 출해권을 확보하는 문제가 아주 중요합니다. 중국이 자기 돈을 투자해서 나진·선봉 쪽으로 고속도로 등의 인프라를 만들고 있어요. 그것은 중국의 경제 부흥에 북한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는 뜻입니다. 또한 중국은 서쪽으로는 신압록강 대교를 건설 중입니다. 신압록강 대교는 앞으로 남한으로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만큼 북한이 중국에 경제적, 정치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북한을 어떻게든 자기 편으로 끌어안아야 하는데 자꾸 골치 아픈 일을 벌이니까 중국도 피곤할 겁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국제 사회에서 북한을 관리하라고 주문하는데 여기에 또 반응을 안 할 수도 없잖아요? 그렇다고 세게 나가다 북한이 튕겨 나가면 동북3성 진흥 계획이 무너집니다. 동북3성에서 생산하는 물자를 중국 내륙으로 수송하는 데도 북한을 통해야 편하고, 수출할 물건들을 나진·선봉을 통해 상하이나 홍콩으로 옮기는 물류비용이 훨씬 싸게 먹힙니다. 나진·선봉·신의주는 중국 경제 순환에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북한을 중국보고 내치라고 하는 것은 순진한 요구입니다.

중국이 눈앞의 경제적 이익 때문에도 북한을 함부로 내칠 수 없지만 구조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우리는 한미동맹이 최고인 줄 알고 그것을 계속 강화해야 한다고 하지만. 중국이 외국과 맺은 조약 중 가장 강력한 것이 1961년 맺은 '북·중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 조약'입니다. 그 닷새 전인 7월 6일 김일성이 소련에 가서 흐루쇼프(Nikita Khrushchyov)를 만나 '북·소 우호 협력 및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6월 29일 평양을 떠난 뒤 7월 6일에야 동맹조약을 체결했으니, 사실은 그동안 소련이 북한의 요구를 잘 안 들어주었다는 얘기죠. 소련과 어렵사리 조약을 체결한 뒤 바로 중국으로 가서 11일에 북·중 동맹조약을 체결한 겁니다. 두 조약 1조에는 똑같이 "어느 일방이 무력침공을 당하거나 개전상태에 놓이게 되면 상대방은 지체 없이 군 및 기타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그만큼 강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소련의 조약 효력 기간은 10년이고 이후 5년씩 연장하게 돼 있었습니다. 그 중간에 한쪽이 문제 제기를 하면 고칠 수도 있었습니다. 5년씩 연장해오다 1992년 러시아 쪽에서 이런 조약은 부담돼서 안 되겠다면서 북한에 폐기를 통보했습니다. 그런 후에 2000년 9월 '북·러 신(新)우호선린협력조약'을 새로 체결했습니다. 두 나라의 관계는 이제 일반적 우호관계가 된 것입니다. 조소동맹은 이미 1992년에 끝났죠. 반면 조중동맹 조약은 20년 기간으로 하되 또 20년씩 연장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폐기하려면 쌍방이 합의해야 합니다. 지금도 강력하고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그만큼 북한이 중국에게는 중요한 국가라는 얘기죠. 사정이 이런데 중국보고 북한을 내치라? 그건 물정을 잘 모르는 얘기입니다.

더 근본적인 건 한(漢)나라, 당(唐)나라 이래 중국은 전통적으로 주변 유목민족들이 중국을 괴롭혀도 그들을 다스리는 데 군사적 조치가 아닌 화친(和親)으로 다스려왔다는 것입니다. 귀찮게 하면 먹을 것을 주거나 공주를 시집보내 그 왕을 사위로 만들어서 관리하는 식으로 화친(和親) 외교를 했습니다. 중국 외교에는 기미부절(羈縻不絶)이란 중국 외교 방침도 있습니다. 기미는 소나 말의 고삐와 재갈이란 뜻인데, 고삐를 느슨하게 놔두고 일정한 테두리에서 움직이게 하고 그 테두리를 벗어나려 하면 경고를 하거나 제재를 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중국 외교의 기본이고 전통 외교의 방식입니다. 그게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저우언라이(周恩來) 평화공존 5원칙 속에 그대로 들어가 있습니다. 내정불간섭.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평화공존, 호혜평등입니다. 주변국이 중국의 수염을 뽑으려는 짓만 안 하면 웬만하면 다독거려서 데리고 가는 것이 중국 주변 외교의 기본입니다.

▲ 정세현 원광대 총장 ⓒ서해문집

오늘날 중국 외교 방침은 4자성어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덩샤오핑(鄧小平) 시절 도광양회(韜光養晦, 어둠 속에 자신을 숨기고 때를 기다린다)로 시작해 힘을 기른 뒤 후진타오 시대인 2003년부터는 화평굴기(和平崛起, 평화롭게 우뚝 선다). 2004년 유소작위(有所作爲, 적극적으로 참여해 내 뜻을 관철시킨다)를 얘기했습니다. 이제는 시키는 대로만 안 한다, 행동이 필요하면 행동을 하겠다는 것이었죠. 그러다 2005년에 와서는 화해세계(和諧世界, 세계와 조화롭게 어울린다)를 얘기했습니다. 조화롭게 만든다는 뜻이지만, 그 말 속에서 팍스 시니카(Pax Sinica)의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중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만들겠다는 것이죠. 주변국들과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얘기는 골치 아픈 놈들도 자기 편으로 만들어 자기 말을 듣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시진핑(習近平)은 중화부흥(中華復興), 중국의 꿈(中國夢)을 들고 나왔습니다. 화해세계와 연결되면서도 "중국은 하늘 아래 가장 가운데 있는 나라다. 이게 중화다"라는 걸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흥시키겠다는 방침으로 나가는 데 거기서 제일 중요한 것이 미국과 관계 설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게 붙어 있는 북한을 어떻게든지 안정적으로 관리해야만 중화부흥으로 가면서 동북아에서 미국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중국에다 대고 북한을 버리라니요? 중국이 러시아에 가서 낡은 무기 사주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인도, 파키스탄과도 손을 잡고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했죠. 미국이 베트남에 가서 협력을 한 데 이어 러시아에도 손을 뻗치려 하니까 중국이 이를 차단하기 위해 수호이-35 전투기 같은 낡은 무기를 사줬습니다. 러시아더러 중국 편이 되든지 아니면 최소한 중립을 지키라는 얘기죠.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가서 200억 달러를 차관으로 주기로 한 것이나, 잠비아에 50억 달러를 원조하겠다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걸 보면서 시진핑 시대 중국 외교가 마오쩌둥(毛澤東) 시절의 '3개 세계론'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오쩌둥 시절 중국은 미국 중심 나라들을 1세계, 소련 중심 나라들을 2세계로 분류했습니다. 그리고 그 축에 못 끼거나 둘 다 상대 안하는 나라들인 아프리카, 동남아 등의 나라들을 3세계로 분류하고, 그들에게 중국과 손잡고 미국, 소련에 대항하자고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중국의 패권을 확립하겠다는 것이 '3개 세계론'이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의 천하 3분론관도 비슷한데, "지금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 편입 안 된 나라들은 모두 중국 편으로 만들겠다. 그렇게 해서 전 지구적 차원에서 미국과 한번 힘겨루기를 해보자", 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도 북한은 중국에게 중요한 나라입니다.

프레시안 : 그렇다면 북핵 문제를 푸는 데 있어 중국에 어떤 합리적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정세현 : 중국에 기대할 수 있는 건 북한이 비핵화를 확실히 할 수 있게 설득하는 일입니다. 중국이 북한을 압박하는 방식은 잘 안 쓸 거라고 봅니다. 아무튼 북한의 비핵화가 중국에도 바람직합니다. 비확산은 중국에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는 용인하되 대외 확산만 못하도록 막으면서, 북한의 핵무기를 빌미로 중국에 대한 군사적 봉쇄 조치를 강화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 : 중국도 비확산보다는 비핵화를 바란다?

정세현 :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는 한중 간 긴밀한 협의를 통해서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서 중국이 확실한 입장을 정립하도록 협조를 해야죠. 뭐든지 미국에게만 부탁하거나 매달리지 말고, 북핵 문제 때문에라도 독자적인 중국 외교를 강화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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